<양생과 장자 4회> 양생, 자연을 따르는 자유로운 삶

기린
2023-10-25 18:37
389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화살로 쏴서 잡는다고 한다.

 

 

   장자는 들꿩의 섭생에 대해 십보일탁 백보일음, 열 걸음을 걸어서 모이를 한번 쪼아 먹고 백 걸음을 걸어 물 한 모금 마신다고 썼다. 이 정도의 디테일은 실제로 일삼아 꿩의 일상을 지켜보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옻나무 동산을 관리했다는 그의 이력과 맞닿은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자 장자가 옻나무를 보살피는 임무와 연관된 온갖 자연물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벼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장자가 칠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어떤 사유를 길어 올렸을까?

 

2.자연에서 터득하는 생명의 본성

 

「산목」 편에는 위왕을 만난 장자의 일화가 나온다. 누덕누덕 기워진 거친 베옷에 삼끈으로 얽어맨 신발을 신은 장자를 만난 위왕은 어찌 이리 고달픈 모습이냐고 물었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가난한(貧) 것이지 고달픈(憊) 것이 아닙니다. 선비가 타고난 덕(德)과 도(道)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고달픈 것입니다. 옷이 해지고 신발에 구멍이 난 것은 가난한 것이지 고달픈 것이 아닙니다. 단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일 뿐이지요. 「산목」 『낭송장자』 22쪽

 

   장자는 자신의 겉모습을 보고 고달프다고 여기는 위왕에게 가난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타고난 덕과 도대로 살지 못하는 선비가 고달프다고 했다. 타고난 덕과 도대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장자』의 다른 편에서 어린아이가 하루 종일 손아귀를 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덕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성인(聖人)은 타고난 덕을 자연과 합치시켜 만물의 생성변화에 통달한다. 이렇게 타고난 바탕대로 자연의 변화에 따르다보면 가난할 때에도 무심하게 살아가게 된다. 반면 명분을 내세워 시비를 따지거나 이해관계에 연루되어 실리를 다투는 것은 모두 인위의 삶이다. 이렇게 인위에 매여 타고난 덕을 거스를 때 삶은 고달파진다.

 

 장자는 연이어 자연에 사는 원숭이의 삶을 예로 든다. 즉, 원숭이는 굴거리나무 등의 단단하고 수피가 매끄러운 나무에서는 의기양양하게 나무를 타지만, 탱자나무처럼 가시가 많은 나무에서는 겁에 질려서 부들부들 떤다. 그래서 원숭이는 가시들이 돋은 나무에는 다가가지 않는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을 따르면서 저절로 익히게 된다. 아무리 굶주려도 스스로 고달프게 하지 않으면서 생명을 보존하는 것, 이것이 자연에서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생명의 본성이다.

 

 

 

 들꿩도 마찬가지다. 열 걸음을 가서 한 번 먹이를 쪼고, 백 걸음을 가서 물 한 모금 마시며 배를 채워야 하니 수고롭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들꿩은 배부를 먹이와 마르지 않는 물통이 늘 구비되어 있는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연에서 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점점 사는 것이 고달파지고 생명력은 쉽게 소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들꿩은 배부른 새장에서 타고난 본성을 잃고 고달파지느니, 자연에서 제 마음 편히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는 삶을 원한다.

 

3.본성을 거스르는 고달픔

 

  위 글의 마지막에서 장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때를 어리석은 왕과 세상을 어지럽히는 신하들 사이에서 고달픈 시대라고 했다. 왕과 신하라는 관계에 매여 명분을 따지느라 타고난 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왕이 자기 기분에 따라 난폭해지기까지 한다면 신하는 어떻게 해야할 지 갈피를 못 잡으니 고달플 수밖에 없다. 장자는 비간이라는 신하를 예로 든다. 비간(比干)은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에게 정치를 바로 잡을 것을 간언했다가 죽은 신하이다. 주왕(紂王)은 그의 간언에 화를 내며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 그런지 확인하겠다며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전해진다.

 

 

 

  비간은 왕 앞에서 신하로서의 명분을 지켰다. 그것이 난폭한 왕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었고 결국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비간으로서는 신하의 명분이 더 중요했겠지만, 장자가 보기에는 그러느라 정작 타고난 생명의 소중함을 소홀히 했다. 이것은 자연에서 주어진 본성을 거스르고 고달픔에 처하는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 왕이 없는 곳은 없으니, 비간이 그 세상에 연루된 것을 무조건 나무랄 수도 없다. 장자는 이 고달픔에서 벗어나는 해법을 인간 세상을 벗어나 자연에 깃든 다른 생명체들에서 찾았다. 새장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 들꿩이나 가시 많은 나무를 가리는 원숭이의 삶이었다. 인간 또한 왕이나 신하라는 인위적인 관계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 옳고 그름의 분별에서 벗어나 생명을 보존하는데 충실한 삶 말이다.

 

   자연에 깃든 모든 것들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 생명은 어디에도 구속될 수 없으며 스스로 위험에 빠져들지도 않는다. 안락한 구속보다는 가난한 자유에 본성이 살아있고,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벗어날 때에야 평안하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장자도 본성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벼슬을 주겠다는 왕의 제안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가난할지언정 고달프지 않으며 자유롭게 사는 삶에 충실할 수 있었다.

 

4.양생, 자연을 따르는 자유로운 삶

 

   장자가 발견한 자연은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 모든 생명들이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장이었다. 하지만 자연은 이 분투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밤낮이 교대하고 사계절이 바뀔 따름이다. 이 변화에 뭇 생명들은 저마다의 생명력을 발휘하여 삶을 지속하면서 자연의 흐름을 따랐다. 그런데 인간세상은 명분을 내세워 시비를 따지며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일에도 서슴없이 나섰다. 그런가하면 가난을 멀리하고 부귀영화를 좇느라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는 자연의 흐름에서 벗어나 인위의 재난을 일으켰다. 비간이 목숨을 잃은 것도 이러한 재난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칠원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장자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양생의 도를 배웠다. 들꿩이 굶주림을 감당하며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 속에서도 새장을 원하지 않는 자유, 타고난 기량을 훨훨 펼치기 위해서 자신이 처할 곳을 가리는 원숭이의 자유가 읽혔다. 그러자 해진 옷과 구멍 난 신발을 신는 가난 속에서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곧 양생임을 깨우쳤다. 시간이 흘러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읊으며 죽음을 맞아 자연으로 돌아갔다.

 

나는 하늘과 땅을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행렬의 장식 옥으로 삼고, 별들을 죽은 자의 입에 물리는 구슬로 삼고, 이 세상 만물을 저승길의 선물로 삼으련다. 나의 장례용품이 이미 다 갖추어져 있는데 무엇을 여기에 덧붙이겠는가? 「열어구」 『낭송장자』 36쪽

 

댓글 2
  • 2023-10-28 22:42

    기린님의 양생은 걸으면서 자유로와지는 삶이군요^^
    11월에 불곡산 한 번 더 걸어요!

  • 2023-11-15 09:45

    장자에 온갖 식물, 나무 이름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있었네요. ㅎ
    기린의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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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3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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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60
영화대로 42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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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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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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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 조회 15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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