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스르륵
2023-09-17 20:57
405

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작동해서 발생 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한다면 차별에 대해 이제껏 제기된 다양한 이야기들과 소기의 성과들은 장기적인 효과로 이어지기 힘들다.

 

 

하여 구조 속에 숨겨진 차별을 인식하는 것은 무너진 자존감과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첫걸음이다. 보통 우리는 조직(구조)이 합리적일 거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조직은 모든 절차를 정당화하면서 차별이나 불평등에 관한 문제들을 감추는데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사와 육아에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는 여성의 문제는 고려되지 않은 채 행해지는 성 중립적 채용 절차들, 그리고 차별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공정하게 요구되는 졸업장과 시험 성적이 알고 보면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가리는 간접차별인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시장 경쟁이 자연스럽게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조직에서의 차별 문제는 구조적 차별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쉽게 치환되어 버린다. 인적자원에 대한 합리적인 투자라는 명목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은 무시되고, 백인보다 흑인이 소프트 스킬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종차별 역시 자연스레 합리화된다. 무한 경쟁에 대처해야 하는 유연하고 효율적인 조직에서 요구하는 인재란 아픈 아이를 돌보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즉 조직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추상화된 개인이다. 성과와 경쟁 중심의 조직 구조 내에서 우리가 겪는 차별은 개인적인 문제로 평가절하 되기 일쑤다.

 

 

멀리 가지 않아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익숙하게 유통되는 차별의 서사인 ’능력주의‘ 역시 구조적인 차별을 지속시키는 주범이다. 능력에 따른 분배는 정당하고 평등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친 임금 격차로 연결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불평등이 극대화된 지금의 시대에는 재능과 노력, 어쩌면 운까지도 ‘가진’ 부모와 거기서 유래한 재능과 유전자, 환경적 요인이라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기반하고 있기에 말이다. 불평등과‘불평등’하게 분배된 자원에 기대어 ‘공정하게’ 펼쳐지는 오징어 게임의 ‘무한 경쟁’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무엇보다 차별에 대한 이러한 구조적인 접근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점은 구조적 차별이 조직에 한 번 자리 잡게 되면 고치기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이는 차별을 시정할 때 생겨날 위험을 회피하려는 조직의 엄청난 관성때문이기도 하고, 한번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 개인이 지배적인 사고로부터 쉽게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점에 기인한다. 즉 우리가 경쟁적 시장의 원리라든가 개인주의, 혹은 능력주의에서 파생된 시험 서열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 대안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차별받는 사람은 스스로 체념하거나 순응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여 구조와 맞물려 있는 차별 속에서는 차별이 잉태한 감정들이 발아된다.

 

 

감정은 구조를 드러낸다

순응이나 체념, 정치적 혐오나 무기력한 분노같은 감정들은 차별하는 구조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지금의 시대적 감정이다. 우리가 차별과 함께 이런 감정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감정을 통해 거시 구조의 전면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모든 집합적 행동에 연루되어 있기에 감정사회학은 감정 그 ‘자체’보다 감정을 ‘통한’ 연구에 집중하고자 한다. 감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지금의 시공간을 해석하고 느끼며 새로운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학 분야에서 일찍이 감정의 중요성에 주목해온 마이클 해먼드와 혹실드에 주목한다. 해먼드는 거시 구조를 인간의 정서적 역량의 산물로 정의한다. 혹실드 역시 『감정노동』에서 거시 구조 속에서 억압되고 관리되고 있는 인간의 감정을 포착해 냄으로써 거대 구조와 맞물려 있는 인간의 감정을 재발견한다. 그리고 이는 감정적 해방이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지적인 해방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저자의 성찰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저항을 할 때 그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만이 아닌 그것에 대한 대안적인 감정을 느낄 권리까지 가져야 진정 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여성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단지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정해놓은 감정 규칙, 즉 죄책감이나 수치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어떤 새로운 감정양식이 출현한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에서 새로운 방식이 생겨난다는 말과 같다. 하여 고용주에게도 화를 내고 비판할 수 있는 ‘노동자’, 분노의 감정을 전통적 여성성 뒤에 숨기지 않으며 정당하게 분출시킬 수 있는 ‘여성’은 거시 구조의 프레임 규칙과 감정 규칙과의 투쟁 속에 있는 일종의 혁명가다. 알고 보면 한 사회의 지배층이나 일반적인 사회 집단 모두가 서로서로 그들의 감정 규칙의 정당성을 위해 주장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런 감정 관리를 지배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영역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차별받는 사람이 이런 투쟁에서 승리하는 확률은 적다. 오히려 체념하고 적응하기 쉬운 이유는 저항에 대한 불이익과 고난에 대한 공포, 혹은 특권층에 대한 인정과 복종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종종 자신과 혹은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소수자집단에 대한 혐오의 감정으로 투사되기도 한다. 특히 혐오는 차별과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 노인,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혐오의 원래적 맥락에서 지나치게 확대되어 정체성 정치에 이용당하거나 죽음의 서사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2021년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조사 대상의 70페센트 이상이 실생활에서 혐오 표현을 접한 경험으로 입증되며, 또 한국 성소수자 자살 시도 비율이 일반인의 9배가 넘는다는 사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OECD 국가 평균보다 2,7배가 넘어 전체 1위라는 사실, 그리고 능력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요구하는 이중적 위계 구조로 내몰린 우리나라 2030여성의 자살률 역시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비극으로 드러난다. 차별받은 감정은 취약하고 불평등한 구조를 민낯으로 드러낸다.

 

 

 

저는 몰랐습니다만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소득의 불평등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실존적 불평등(수명이나 인권)에 관련해서는 대대적인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소수자의 실존적 평등을 인정해주더라도 경제적인 상위 계층의 지위가 위협받지 않기에 일어난 ‘웃픈’ 현상일 뿐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이네와 박사장네가 서로 적대시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저 서로를 모를 뿐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보면 테르보른의 이 평가는 정확해 보인다. 차별에서 이어지는 불평등의 구조는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로써 더 선명해 진다. 차별하는 구조와 차별받는 감정은 이제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른다.

 

 

 

 

결론은? 결론은 ‘짐작했듯이’ 적극적인 입법과 실효성 있는 정책의 실행이다. ‘차별 금지법’이나 ‘적극적 조치’, ‘기본 소득’ 너무 익숙한 결말인가? 그러나 ‘차별’과 ‘구조’와 ‘감정’의 트릴로지를 경유해서 도착한 이 결말은 이전과는 좀 다르게 다가온다. 제목이 제시하는 목적이 너무나 분명해서 다 안다고 느껴졌던 ‘차별금지법’이 실은 2000년대 초부터 입안이 시작되어 2022년까지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사실, 난 몰랐다. 무엇보다 이미 성별, 장애, 고용에 관한 개별 차별금지법이 있음에도 이 법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중 소수자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더 두텁게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점,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차별을 꼭 적시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만큼 차별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은밀해진 현실을 반증하고 있으며, 또 경제계와 기독교계의 반발은 알고 보면 차별금지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역시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적극적 조치’란 이미 저질러진 과거의 차별적 처우에 대해 보상하고 현재의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소수집단을 우대하는 정책이다., 차별금지법이 있어도 차별하는 사람의 악의와 고의를 항상 증명하기는 어렵기에 차별금지법의 시행착오를 보완하는 역할도 한다. 적극적 조치는 단 하나의 정책이라기 보다 다양한 법제와 판례로 구성되어 있는 보편적이며 광범위한 정책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용개선조치, 사회배려자 전형, 지역균형선발, 양성평등 및 지방인재 채용 목표제, 장애인 구분모집제, 여성관리자 임용목표관리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동화, 구조조정이 상시화 된 지금에 적극적 조치는 역차별이라는 반발에 직면하기도 한다. 저자는 역차별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현실에서나 나올 수 있는 반론이라 일갈하며, 무엇보다 이런 차별의 구조와 감정을 재배열 할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기본 소득’을 호명한다.

 

 

 

 

지금 코로나19를 통과한 우리 노동의 현주소는 국가 간 물리적 이동 감소를 포함한 반세계화 추세와 대면 노동 기피, 자동화 급증과 노동 수요 감소, 경기 침체의 장기화, 극심한 중산층의 붕괴다. 유연한 고용체계와 기업의 금융화는 고소득자의 지속적인 세금 감소 추진으로 이어질 것이며, 뒤따라 공공 서비스가 삭감되고 비자발적 실업이 그 뒤를 쌍둥이처럼 따른다. 그리고 과거 산업화 시기에 만들어졌던 복지 국가 모델은 지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와 기후 위기, 극단적인 불평등의 문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간다. 하여 기본소득은 새로운 사회 시스템의 개혁을 촉발할 수 있는 제도로서 원래적 의미가 크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무엇보다 기본소득은 다른 조건부 현금 지원책 보다 진일보한 제도로서 수혜자가 원하는 곳에 쓸 수 있는 자유를 늘린다. 이 자유에는 모두의 우려(?)처럼 ‘일하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되는데, 저자는 이를 나쁜 일자리를 피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적 자유로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일하지 않을 자유는 노동자의 노동 교섭권을 향상시키고 작업장에서의 민주적인 통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기본소득은 ‘일 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하는데, 남성의 일하지 않을 자유가 평등한 가사 분담으로 이어져 여성의 일할 자유로 연결될 수 있다는게 그 주장이다.

 

 

 

 

물론 반대 의견이나 문제점들 역시 만만치 않다. 기존의 복지가 축소될 위험, 조세 부담의 심리적 저항들, 그리고 능력주의와 성과주의적 맥락에서 여전히 기본 소득이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제도가, 어떤 특정한 기술 수준이 사회적 삶을 우리가 기대한 형태로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기본 소득과 차별 금지법 그리고 적극적인 조치가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똑같은 정책이라도 나라마다 다른 효과로 나타나는 국제적 아이러니는 정치나 제도가 그 사회의 맥락과 어떻게 융합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기에 말이다. 하여 결국 이 책이 기본 소득이냐 아니냐를 너머 지금, 여기, 우리의 서사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를 다시 묻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이 리뷰의 마지막 한 줄 결론을 어떻게 맺으면 좋을까... ‘음 저기... 우리 지금 차별이나 기본 소득 난상토론 한번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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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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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34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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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6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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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65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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