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2023-09-11 21:07
318

현실이 상상으로, 상상이 다시 현실로

동은

 

 

 

1. 빛나는 정지된 순간

   몇 년 전 여울아쌤과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을 읽으면서 받았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탕누어가 다양한 주제로 소개하는 한자들을 경험하며 한자에 담겨있는 고대의 시대상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느꼈던 영감과 자극 덕분에 한자로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이 닳도록 한자는 재미있고, 흥미롭고,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을까? 최근 <한문이 예술> 글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재미와 사람들에게 잘 전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요즘에는 그 문제의 원인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알고 있는 지식과 배경이 너무 짧고 얕고 좁아서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한자의 풍경>은 탕누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자의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와 유물 조사의 기록, 시대적 배경과 흐름, 최근까지 계속 달라지고 있는 담론을 소개하면서 비교적 추상적이고 짐작되는 내용보다는 실재적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한자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학술적인 책이라고 생각됐지만 저자는 동시에 한자가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는다.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빛나는 정지된 순간을 만나게 된다. (6)

 

  저자는 형태에 의미가 남아있는 한자의 특성상 문자가 만들어진 순간을 파헤치다 보면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본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고 전한다. 그 경외심은 그가 포착해 낸 어떤 장면이 탁월한 형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을 사유하는 은유와 상상의 과정을 경험할 때 느껴진다. 밝을 명明은 단순히 해와 달이 더해져 ‘밝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밤, 창틀에 달빛이 내린 장면을 담은 문자이고, 성인 성聖은 보는 것보다 듣고耳 말하는 것口을 더 훌륭한 덕목으로 여긴 고대 사람들의 신념을 담은 문자다. 고대의 사고방식과 시선으로 포착된 세상은 한자에 박제되어 흘러간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빛나고 있다. … 이 감동을 다른 사람에게도 잘 전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재미있고 흥미롭기만 한 영역이 아니라 조금 더 면밀하게, 한자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다각도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내용을 기대하며 <한자의 풍경>을 읽어나갔다.

 

 

 

2. 한자의 탄생은 언제?

 

  한자의 기원은 흔히 갑골문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갑골문은 상당히 완성된 체계를 가진 문자로 처음부터 짠!!하고 갑골문의 형태를 갖춰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체계적인 문자가 된 것일까? 책에서는 다양한 가설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문구 문화의 도문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듯하다. 대문구 도문이란 신석기 앙소 문화보다 후기인 산둥성 태안현(泰安縣) 대문구(大汶口)의 신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도자기에 새겨져 있던 도상을 의미한다. 이 도상은 이전 시기에 발견된 다른 도상에 비해 구체적이면서도, 이후 시기의 산, 해의 갑골문과 비슷한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같은 도상이 넓은 지역에서 다량으로 발견되었으니 우연히 만들어진 기호도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오랜 세월동안, 이 대문구 도문이 한자의 기원으로 여겨졌다.

 

  나 또한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에서 이 도상을 본 적이 있다. 탕누어의 책에서는 이 도상이 후에 아침 단旦으로 발전되어 ‘산 위에 해가 뜨는 것으로 보아 이 한자가 만들어진 지역은 동쪽에 산이 많았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후에 산인 줄 알았던 형태가 산이 아니라 장강 하류에 있던 양저문화의 제단이라는 설이 제시되면서 한자의 기원이 대문구 도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고 한다.  

 

 

 

 

  한자의 기원을 파헤치는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에는 기원전 6000년 전의 정공촌 정공 도문이 발견된 것을 두고 누군가는 이것이 대문구 도문에서 갑골문으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라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부족이 사용하던 글자일 수도 있다고 본다. 이보다 더 앞서서 다양한 도상이 담긴 암각화도 한자의 기원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바라보기도 한다. 물론 그 암각화에는 의미가 담겨있지만, 언어와 얼마나 연관되었는지 알기 어렵고, 대부분 부호와 상징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한자의 기원과 얼마나 연관되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다양한 요소들이 한자 형성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확실한 건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글자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한자의 발전이 단선적인 과정을 겪은 것이 아니라 생성과 변형, 그리고 도태가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복합적인 과정을 겪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인류가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농경사회가 시작된 시대적 배경이 문자의 생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바라본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잉여 자원들을 다른 자원들과 교환하는 교역이 이루어졌고, 그 내용을 기록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구체적인 상형 형태는 점점 단순한 기호로 바뀌고 간단히 보관할 수 있는 기록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쐐기의 형태로 사용된 수메르 문자가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바라볼 수 있다. 

  그런데 수메르 문자와 비슷한 시기에 사용되던 갑골문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갑골문이 만들어진 상나라는 본격적인 농경 사회로 진입했지만, 아직 고대 국가의 단계는 아니었다. 왕은 다양한 씨족 세력을 통솔하는 수준이었으며 주변 세력에 왕족을 파견하는 느슨한 네트워크의 상태에 더 가까웠다. 구속력이 약했기 때문에 통치자에게는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했다. 갑골문은 신과 소통하기 위한 점복 제의를 위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으며 제정일치를 위한 주술적인 용도가 훨씬 강했다. 그들은 절대적 권위를 확인하기 위한 용도로 갑골문을 사용했으며, 갑골문을 천상의 권위를 자신의 통치 권력으로 바꾸는 도구로 사용했다. 

 

 

 

3. 정체성의 공통 분모가 된 한자

 

  마음 심心은  갑골문이 얼마나 주술적인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한자다. 오늘날 사랑愛이나 염려念, 미움惡처럼 감정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心과 달리 갑골문에서 사용되는 心은 단순한 인간의 신체 기관을 의미하는 한자였다. 저자는 갑골문을 사용하던 상나라 시기에는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고 능동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신석기가 지난 청동기 시기에 쓰였던 금문에서도 心으로 구성된 글자는 20여 자가 전부다. 

 

 

 

 

  그런데 상나라로부터 1000년이 지난 한나라에 쓰인 <설문해자>를 살펴보면 心자를 부수로 하는 한자가 250개가 넘는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신에게 의지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차이를 알 수 있는 건 중국이 한자라는 같은 형식의 문자를 오랜 시간 동안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중국은 계속해서 같은 형식의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상나라가 망하고 씨족 연합 중 하나였던 주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과정에 있다고 바라본다.

 

  상나라는 국가형식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문자 체계와 강력한 제정일치 사회로서 상당히 발전된 문명이었다. 주나라 건국 세력은 이런 상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명분을 만들어 내야 했다. 주나라는 그 명분으로 이전과는 다른 국가이념을 만들어 낸다. 상나라 시절에는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인격신이었던 帝(제, 상제)를 주술로 달래고 두려워하며 의존하는 수동적인 관습을 유지해야 했는데, 이와 결별하기 위해 천명天命사상을 창안한 것이다. 천명은 인간의 도덕적인 의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반영된 것으로 주나라 초기에 개발되어 춘추 전국 시대 여러 사상가에 의해 체계적 구조를 갖춘 철학으로 완성된다. 저자는 <주역周易>이 이런 상황을 반영해 주 문명이 새롭게 구성한 세계의 과학적 원리를 정리한 책이라고 바라본다. 상나라 시대의 점복은 절대자인 신(帝)의 막연한 의지를 확인하는 제의였다. 하지만 주역은 64개의 기호로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법칙을 탐구해 하나의 정돈된 세계관을 형성한다. <주역>으로 종교적인 상징에서 인문적인 해석으로 전환하는 과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天은 이런 제를 대신할 새로운 권위로 보다 추상적이고 탈인간적인 형태의 지배 원리였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한자가 계속 중국의 역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나라가 새로운 문자를 채택하지 않고 상나라의 문자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문자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과거의 왕조와 문화적 차별성을 강조하고, 단일 문명권이 지속되는 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같은 문자이지만 다른 사상으로 사용하다 보니 갑골문은 서서히 그 성격과 역할이 바뀌게 된다. 문자를 소수의 사제와 왕이 독점하기보다 인간 중심의 보편적 사용이 강조되어 널리 퍼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면서 한자의 확산은 더욱 빨라졌다. 心의 용법이 달라진 것만 보아도 그들의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냥 쓴다’라는, 어쩌면 단순하고 특별해 보이지 않은 선택이 이후 몇천 년 동안 중국 문화권이 유지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느슨한 네트워크였던 씨족 연합에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이상비상한거다) 단순히 생각해 봐도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자보다도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니 말이다. 이후로 한자는 몇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용되면서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 현대까지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화하華夏라는 단일민족이라 여기는 민족주의를 갖고 있는데, 이 단일민족을 유전적 계통으로 구분 짓는 것은 허상에 가깝기에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자 사용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어에는 알파벳이 도입되기도 하고, 자형의 변화나 많은 간략화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한자는 정체성의 공통 분모로서 작동하고 있다.

 

 

 

화이사상과 중화사상은 화하민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4. 상상은 어떻게 현실이 되나

 

  “여러분과 한자를 공부하면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상상력이에요. 한자는 주변을 그림으로 옮기며 시작된 문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雨나 해日, 물水이나 불火같은 한자를 만들면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상상력을 가지고 그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어렵지 않게 고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을 거에요.”

 

  처음 <한문이 예술>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한자를 통한 상상력을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수업을 이끌고 가면 좋을 것 같다는 동료 선생님의 제안이 있었고(땡큐), 나 역시도 ‘이거다!’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자형의 다양함과 한자의 구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고대를 상상하고, 두려움 없이 자의적인 해석을 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상상력은 아이들이 독창적이고 충격(?)적인 해석을 제시할 수 있게 해줬고, 고대 사람들이 했던 상상의 과정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줬다. 나는 한자 공부에서 그 즐거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즐거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에는 단순히 갑골문의 형태와 구조만으로 분석할 때 드러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와 해석의 한계가 두렵기도 하다. <한자의 풍경> 저자도 형태나 속성에 매몰되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발상을 전환하고 표현하는 상상력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시대적 배경과 사료로 한자를 설명하려는 것에 더욱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책을 읽으면서 한자를 통한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대의 현장성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글로 다 담지는 못하지만, 하夏나라나 상商나라같이 궁금했던 나라 이름 한자나, 몇 년 동안 동양고전 공부를 하면서도 단박에 잘 정리가 안됐던 시대상들, 역사적 흐름이 한자를 키워드로 하니 훨씬 이해가 수월하기도 했다. 막연한 생각들이 여러 단서들을 통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기존에 느꼈던 즐거움과는 다른 즐거움이었다. 이후에 나에게 필요한 공부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한자의 풍경>은 나에게 조금 더 통찰력 있게 자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한자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론을 알려준 책이었다.

 

댓글 1
  • 2023-09-13 10:37

    동은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잘 읽혀지네요.
    고맙습니다! ^^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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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6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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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5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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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 조회 14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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