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정상을 벗어난 관계

우현
2023-09-1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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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벗어난 관계

- 브래디 미카코, 『아이들의 계급투쟁』 리뷰 

 

 

 

   『아이들의 계급투쟁』.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아프리카 아이들이 직접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급 불평등에 분노하는 어른들, 그리고 그에 동화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했지만, 책에선 전혀 다른 내용들이 펼쳐졌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계 영국인 브래디 미카코로, 책은 미카코가 오랫동안 보육교사로 활동해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는 그녀가 처음 보육 봉사를 시작했던 영국 저변에 위치한 탁아소의 이야기이다. 미카코는 저변 탁아소의 활동을 인정받아 정식 보육교사가 되었으며, 민간 어린이집 교사로 채용된다. 1부는 그녀가 일하던 민간 어린이집이 문을 닫으면서 과거에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저변 탁아소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바뀌면서 민간 보육 기관으로 향하던 복지예산의 상당 부분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단순한 ‘보육일지’라기 보다는 보육 현장 최전선에서 기록한 ‘투쟁일지’에 가깝다. 그녀가 돌아간 탁아소는 영국 브라이턴에 소재한 하층계급 주민들을 돕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탁아소는 스스로를 영국 생활수준의 최하위권이라고 명시히고 있으며, 그렇기에 흔히들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책에선 1부와 2부의 내용을 구분하기 위해 보육기관으로 향하는 예산이 긴축된 시점의 1부를 ‘긴축 탁아소’라 부르고,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이자 미카코가 보육 봉사를 하던 시기의 2부를 ‘저변 탁아소’라고 부른다.

   평소 슬프거나 감동적인 작품을 봐도 잘 울지 않는 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수시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자는 저변의 이야기를 다루며 감정적인 호소를 하기 보다는, 보육과 가족, 인종, 복지, 국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면서 그 어떤 것도 ‘정답’이나 ‘정의’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저자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감독 켄 로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켄 로치는 자신의 영화들에서 ‘희망’을 제거하고 적나라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는데, 그러한 방식에서 오는 현실의 답답함이 나에겐 훨씬 감정적인 동요를 만들어 낸다. 미카코는 최하층 계급 아이들과 그들의 보호자들의 삶에 깃들어 있는 불안정성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어떤 것이 정의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결코 쉽게 판가름 할 수 없다.

 

 

 

 

                           

브래디 미카코와 『아이들의 계급투쟁』

 

 

'좋은 환경'에서 자랄 권리?

   내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익숙하지 않았던 부분은 ‘아이는 사회가 키운다’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아동복지제도였다. 아이에게 폭력을 가한다던가(방치, 음식 미제공, 물리적 폭력 등), 부모의 생활상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 사회복지사가 아이를 데려가 다른 수양부모에게 연결하는 구조다. 이는 문제 가정에서 아이를 구출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영국 사회에서 살아갈 능력’이라는 ‘정상성’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부모가 명백하게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면 당연히 아이를 구출해야 하겠지만, 아이를 방치하는 것인지 아이의 독립성을 기르는 과정인지 애매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에게 가하는 폭력의 범주는 어디까지이며, 사회적 삶이 불가능하다고, 부모에게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국가는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미카코는 튀니지에서 온 이민자와 그녀의 두 아이를 이야기한다. 튀니지 어머니는 두 아이를 아주 엄격하게 길렀다. 아이에게 체벌이나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에, 큰아이는 반항심이 세고, 작은 아이는 정서 발달이 살짝 느리게 보였다. 하지만 미카코가 보기에는 꼭 학대받고 있다고 보이지도 않았다.

 

“작은 아이는 언어 발달은 좀 느리지만 손끝이 야무지고 표적이나 몸으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어요. 학대받는 유아라면 그렇게 자라지 못해요. 지금 신세지고 있는 친척집이 경제적으로 힘든 모양이라 세끼 식사가 불가능할 수는 있는데…. 그런데 이 센터는 그런 가족을 돕는 곳이잖아요. 그리고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반항하는 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브레디 미카코, 노수경 역, 『아이들의 계급투쟁』, 사계절, 81쪽.

 

미카코는 ‘복지’에 신고해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대신 어머니가 잘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과거의 탁아소와 탁아소가 속해있는 주민 센터 멤버들이었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센터 직원은 딱 잘라 답한다.

 

“그 엄격함에 체벌이 포함된다면 그건 학대입니다.”    같은 책, 81쪽.

 

   ‘이민 가정’이 가진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법이 규정하는 ‘정상성’에 따라 특정한 양육 방식을 규정하는 것만이 정당한 것일까? 모든 아동이 좋은 환경에서 자랄 권리를 갖는다는 것에는 백번 천번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좋은 환경’은 도대체 어떤 환경일까? 영국과 같은 서구 선진국의 법규에서 규정하고 있는 환경만이 ‘좋은 환경’일까? 튀니지의 이민자는 아직 서구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좋은 환경’을 아이에게 제공할 수 없는 걸까? 서구 선진국과 그 외의 문화권 사이의 줄 세우기를 피하면서 공통의 기준을 생각해 내는 일은 어렵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저자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실제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는 드물다. 튀니지 어머니와 아이들은 그 뒤로 센터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미카코의 역량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아이에게든 어른에게든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것은 언어가 아니라 그 나라에서의 ‘정상성’이다.             같은 책, 76쪽

 

 

정상을 벗어라

   현실이 아무리 어려운 문제들을 재기한다하더라도, 그녀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떠날 수도 없다. 미카코는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매일매일 속에서 그때그때 문제를 고민하고, 최선의 답을 내려 애쓴다. 그녀는 저변 탁아소를 회상하며 그 때의 아이들이 더 변칙적이고 폭력적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건 단순히 과거여서, 그 당시 정권이 노동당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성향을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더 공동체적이었기 때문이다. 2부에 나오는 저변 탁아소에는 ‘정상’은 아니더라도 회생 가능성이 보이는 가정을 상대로 눈을 감아주는 사회복지사들, 아이뿐만 아니라 학부모들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던 주민 센터와 탁아소 직원들이 존재했다. 그때에 비하면 긴축 탁아소는 칼같이 자르는 주민 센터 직원과 복지사들, 불안정한 삶 속에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못하고 더욱 예민해진 부모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라야할 ‘좋은 환경’이 비단 ‘법’을 정확하게 적용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저변 시절’과 ‘긴축 시절’의 차이가 거기서 드러난다. 저변 시절에는 ‘하층계급’으로써의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긴축 시기에는 그 안에서도 인종, 계급, 장애와 비장애 등으로 서로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저변 탁아소가 가졌던 공동체성에 더 가치를 두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런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 또한 공동육아 출신인데, 이를 통해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정상 가족

   내가 나온 공동육아는 협동조합으로 학부모 조합원들이 운영에 참여하여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형태의 어린이집이었다. 내가 한창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 ADHD가 의심되는 한 아이에 대해 갑론을박이 터졌다.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며 그 아이를 내보내자고 주장하는 조합원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공동육아에서 쫓겨난 아이는 어디를 갈 수 있겠냐며 맞서다가 결국 둘 다 조합을 나오게 된다. 그 덕에 어린이집을 1년 조기 졸업한 나는 별일 없이 학교에 진학했고, 그 이후 내가 그 어린이집과 다시 얽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갈 때쯤 ‘터전살이’라는 행사에 초대받는다. 터전살이는 어린이집을 졸업한 친구들이 모여 하룻밤을 지내는 연말 행사였다. 1기 졸업생이었던 내 또래 친구들부터 갓 졸업한 초등학생 1학년까지 모이는 이 행사가 나는 정말 인상 깊었다. 지금은 춘천에 남아있는 친구들도 적고, 각자 하는 일도 정말 다르지만 매년 같은 ‘터전’에서 추억을 나누다 보면 정말 가족 같은 느낌이 난다. 동기 친구들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고, 잘 몰랐던 한두 살 터울의 동생들, 심지어 갓 졸업한 초등학생들과도 긴밀한 관계가 된다.

 

 

나들이 미션 중 하나였던 '조 별로 셀카 찍기'를 수행 중인 모습
연예인이 될 거라던 도영이(오른쪽 키 큰 친구)는 정말 단역 배우로 데뷔를 했다.

 

 

   이런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친한 친구들? 고향 친구들? 아무래도 내가 느끼는 정서로는 ‘가족’만한 것이 없다. 만약 지금과 같은 제도로서의 가족, 정상성의 범주로서의 ‘가족’이 문제라면, 아예 이렇게 어떤 정서상태를 공유하는 집단을 이르는 말로 ‘가족’이라는 말을 마구 써보면 어떨까? 처음엔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관계에서, ‘터전살이’를 통해 학부모들 없이도 특이한 관계성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공간이 없어진 올해는 또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전처럼 밥을 해 먹고, 나들이를 가고, 수건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카코가 겪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그와 같이 어떤 공통성을 새롭게 만들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탁아소를 졸업할 시기에 부모가 교도소에 들어가 갈 곳이 없어진 로자리는 탁아소 원장과 함께 살면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었다. 언더클래스의 전형인 10대 불량아 비키는 탁아소에서 자신의 동생을 돌봐주는 미카코의 모습에 감동해 탁아소에서 자원봉사를 신청했고,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렇게 놓고 생각해 보면 ‘공동체’의 ‘공동’을 막고 있는 것은 ‘가정된 정상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춘천의 공동육아도 없어졌고, 영국 저변의 탁아소도 결국 없어졌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언제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크게 보는 사회는 여전히 분열적이고 혼란스럽지만, 바닥까지 내려앉아서 본 저변 바닥에는 가능성들이 굴러다닐지도 모른다.

 

 

“분열된 영국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학자나 평론가, 저널리스트에게 맡기면 된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단절을 조금씩이라도, 단 1밀리미터씩이라도 좁히는 것이다.”

같은 책, 168쪽

 

 

댓글 2
  • 2023-09-11 20:14

    이래저래 육아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영국도 그렇구나.......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었던 대체리즘만이 그 원인이 아니겠지만, 그 열차 의 선로를 따라가고 있는 지금의 자본주의 열차에서는......ㅠ

  • 2023-09-13 18:08

    단절을 좁히는 길은 우현처럼 질문을 던지는 것, 그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잘 읽었어요. 춘천에 며칠 다녀온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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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83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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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6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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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70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6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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