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흐름으로서의 세계

진달래
2023-09-1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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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1.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투쟁을 접고 호남의 석선산에 은거 한다. 은거 후에는 교육과 저술 활동에만 매달렸다고 하는데 왕부지는 역사와 철학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經)과 사(史), 문예 등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왕부지의 사상은 명나라의 멸망의 원인을 사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그는 북송의 장재(張載:1020~1077)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계승하여 주자학이나 양명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현대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유물론자로 평가 받고 있다.

『운행과 창조』는 왕부지의 『주역내전』을 통해 ‘운행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즉, 『주역』으로 동양의 사유체계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동양사상이라고 하면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를 떠올리지만 실제 동양사상에서 가장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주역』의 역(易), 즉 ‘변화’에 대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주역』이 오래된 텍스트인 만큼 『주역』에 대한 주석서도 많다. 문탁에서도 우응순선생님과 『주역전의(周易傳義)』를 읽었다. 『주역전의』는 정이의 『이천역전』과 주희의 『주역본의』가 합쳐진 것으로 철학서와 점서(占書)의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하는 주석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보니 줄리앙은 왜 많은 『주역』의 주석서들 중에 왕부지의 『주역내전』을 선택했을까?

 

“그의 저술은 정통유가사(正統儒家史)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지만 분명 그의 저술은 중국사상의 탐구의 각별한 적소(適所)로서 중국 사상의 전개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사상에 실린 여러 입장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저술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은 일련의 주장들이나 체계화된 하나의 교의가 아니라 유가의 직관에 담긴 잠재성이 어떻게 철저하게 표출되며 엄격함과 명석함을 통한 가장 강도 높은 노력으로서의 사유가 그 준거인 정신적 틀에 대해 어떻게 항상 능동성을 견지하는가 하는 점이다.”p19

 

줄리앙은 『운행과 창조』를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먼저 ‘운행’에 대한 고찰을, 두 번째는 유가 사상에 나타난 ‘비가시’와 ‘초월’의 위상에 대하여, 세 번째는 운행 사상이 어떻게 윤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는 시(詩)를 통해 예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운행’과 ‘창조’를 서로 비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왜 왕부지의 사상을 통해서 운행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왕부지 초상 - 바이두

 

  1. 이롭고도 규칙적인 운행

 

『주역』은 음·양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운행과 창조』에서는 이를 “태초에 교대가 있었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교대의 예로 낮과 밤, 가시와 비가시, 수축과 팽창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왕부지는 사실 대립이 아니라 시간적 대조일 뿐이고 현동(現動)과 잠재(潛在)의 연쇄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교대의 순환논리를 따르면서도 척박한 반복과는 상반된다. 교대가 있기에 흐름이 펼쳐지며 운행도 나아가게 된다.”(p37)

 

교대는 반복이 아니라 상호 자극과 조절에 의한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며 흐름으로 펼쳐진다. 낮과 밤은 분절이 아니라 흐름이다. 이들은 연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운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운행을 ‘흐름’으로 본다는 것이다. 왕부지는 장재를 이어받아 이 세계를 기의 흐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장재는 이 세계는 기로 꽉 차 있으며 이 기가 응축되거나 분산되면서 변화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왕부지는 음(陰)과 양(陽)을 기의 본체로 보는데 이 두 기의 인(絪)·온(縕)운동으로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줄리앙은 왕부지가 말한 음·양의 운동을 ‘감응을 통한 영향(感通)’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으로 존재의 발생기원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모든 실재는 상호감응(相感)으로서 음·양의 작용에 의해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때 상호감응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야 하며 한편,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공통된 토대를 가져야한다. 즉, 같음은 다름(非同則不能異)을 다름은 같음(非異則不能同)을 상정한다.

왕부지는 다른 신유학자들과 달리 태극(太極)과 같은 하나의 근원에서 음·양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고, 음·양 자체가 태극이라고 본다. 즉 음·양이라는 이원성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다. 왕부지는 『주역』에서도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를 다른 괘들과 분리해서 본다. 이 두 괘를 가장 기본적인 괘라고 보는데 음과 양이 그 자체로 태극이 된다면 이 두 괘 사이에는 어느 것이 먼저라거나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건(하늘)과 곤(땅)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이 두 괘는 교대를 통해서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분절적이지 않고 운행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1. 잠재성의 세계

 

왕부지는 신유학자들이 사용하는 태극의 개념과 헷갈리지 않도록 장재가 말한 태허(太虛)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우주 전체에는 기(氣)가 꽉 차있으나 이는 비가시의 상태로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부지에게 있어서 가시와 비가시의 상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변화로서의 운행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왕부지는 비가시의 상태를 주목하여 이러한 빔(虛) 속에 무한한 잠재성을 부여하며 실재 안에 흐름을 내재시켰다.

 

“가시에 대한 비가시의 관계는 현동에 대한 잠재의 관계이다. 우리가 운행의 논리에 따라 아무런 동인의 개입이 없는 이행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잠재상태의) 비가시가 운행의 본체이며 비가시의 현동이 운행의 작용을 형성한다는 이 유일한 사실에 의해서이다. 본체와 작용은 불가분하다. 내재라는 것은 반드시 펼쳐지게 마련이다.” p123

 

이 책이 ‘운행’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창조’와 달리 운행에는 외부적인 간섭이나 외적 규범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조물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물주가 ‘창조’하는 세계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인 운행은 어떤 의도를 지니게 할 수 없다.

왕부지가 설명하는 『주역』이 다른 주석가들과 다른 점은 왕부지는 하나의 괘(卦)가 여섯 개의 효(爻)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효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고려하여 열두 개의 효(爻)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비가시의 영역까지 고려한 것이다.

흔히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의 영역은 신비주의로 치부되면서 신(神)적인 것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가시와 비가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현동(現動)은 잠재(潛在)를 품고 있다. 줄리앙은 이러한 비가시의 영역을 동양사상의 핵심이라고 본다. 전통사회에서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을 비극적으로 보지 않는 것도 세계를 ‘변화의 흐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산자의 정신(神)과 죽은 자의 혼(鬼)을 이어주는 것도 바로 이 잠재와 현동 혹은 음양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조상과 후손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동양 사상에서 운행의 논리는 도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덕성은 세계의 운행과 유사 관계 속에서 고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흐름으로 인식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도덕 행위는 늘 조절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조절 행위는 신이나 신성한 중개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으며 쉼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비가시의 세계는 흐름과 같다. 흐름 안에서 ‘비편파성(中)’은 운행이 어긋나거나 정체되지 않도록 조절한다. ‘비편파성’은 단지 어디에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고정되지 않는 것이다. 운행의 순간에 언제나 완벽하게 부응하는 것이다. 운행에 잠재하는 바탕처럼 현자(賢者)는 자기 안에 잠재하는 모든 덕성을 지닌다. 현자는 완벽한 중(中) 속에 머무른다.(隨時而得中) 이 때 필요한 것은 운행의 흐름과 분리됨이 없이 나가는 ‘수행력’이다.

 

  1. 윤리적 삶의 가능성

 

줄리앙은 가시에서 비가시에 이르기 위해서는 중간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유가에서는 이 중간단계를 특히 강조한다고 보았다. 이 단계를 섬세함, 혹은 미묘함의 단계로 보는데 ‘전조’단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단계의 설정은 초월이나 신비주의 없이 가시와 비가시를 연결하고 이를 분리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 전통의 조물주 사상은 우주 창조론적 상상만으로 가득한 것도, 또한 원동인에 대한 철학적 필요성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다음 두 사항이 이 사상에 근본적으로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편으로는 유일함과 동시에 의지의 요체로서의 주체-행위자의 범주를 인류학적으로 부각시켰던 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물주와 창조물간의 근본적 위상의 차이를 이념적으로 부각시켰던 점이다.” p103

 

흐름 안에서는 위계를 정할 수 없다. 게다가 흐름 속에서 실재들은 서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주역』은 이러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하나의 괘(卦)를 이루고 있는 여섯 개의 효(爻)를 통해 다양한 배치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왕부지는 이 여섯 개의 효 중에 2와 5의 자리에 있는 두 개의 효가 중심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중심이 하나라면 구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중심은 대립, 보완하면서 밀고 당기기 때문에 연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줄리앙은 이런 변화가 윤리적인 차원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용(中庸)이다. 중용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비편파성’에서 본 것처럼 변화, 즉 흐름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이를 때로는 ‘순응(順應)한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보면 현자는 어떤 경우에도 도드라지지 않고 심지어는 무미건조해 보기이기까지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의 가르침에는 말이 없다. 또 여기에는 가시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가시의 영역이 늘 포함된다. 예악(禮樂)은 가시의 영역에서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흐름에 딱 맞을 때 느껴지는 조화로움은 비가시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조화로움은 만물을 감화시키고 확산한다.

 

 

사실 운행이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던가, 『주역』이 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왜 낯선 왕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운행만 이야기한다면 굳이 왕부지를 소환할 필요가 없겠지만 가시와 비가시의 세계가 한 흐름 안에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신유학자들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시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태극이라는 근원에서 음과 양이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양 자체가 근원이며 태극은 그것이 뒤섞여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왕부지의 주장이 색다르게 보였다. 게다가 중심이 두 개일 수도 있다니. 읽는 동안 스피노자도 생각나고 들뢰즈도 생각이 났다. 좀 더 공부하게 되면 왕부지가 말한 것들과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댓글 1
  • 2023-09-13 18:20

    왕양명 이후 왕가의 등장이네요. 왕부지. . 다소 우습게도 들리는 이름은 들뢰즈가 말하는 식별불가능성과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아직 그쪽으로 운행 중이라고 말하는 수밖에요. . ㅎㅎ 잘 읽었습니다.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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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4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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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8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1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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