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정군
2023-09-11 13:49
215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1)
― 미래에,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사소하지 않은 문제
프랜시스 윈의 맑스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맑스가 머물던 루트비히 쿠겔만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맑스에게 ‘공산주의 사회에서 구두는 누가 닦나요?’라고 묻는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맑스는 ‘당신이 닦으시오!’라고 쏘아붙였다2). 그렇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누군가는 구두를 닦아야 하고, 거리를 청소해야하며, 음식물 쓰레기도 누군가는 수거해야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체제의 변환이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게다가 맑스주의 담론 안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제기’에 대한 충실한 방어 논리도 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가 개체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다. 사적소유가 철폐된 세계에서 그런 일들은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이 아니게 될 테고, 누가되었든, 그게 누구든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하에서 빈번한, 직업의 귀천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그곳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차별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꺼리는 것이 다만 ‘자본주의적 심성’에서 비롯된 문제일까? 그러면 사회적 관계가 전체가 전변했던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그런 일들은 누구의 몫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른바 ‘고급 당원’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시스템은 결국 자신의 목표였던 계급의 철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전의 계급을 새로운 계급으로 대체했을 뿐. 심지어 ‘출신성분’을 따져가며 계급을 분할한다는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 경쟁에서조차 자본주의에게 패배한 셈이다. 맑스가 쿠겔만 박사의 집에서 느꼈던 모욕감은 이미 어떤 징후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구두 닦기 문제’로 대표되는 ‘필요 노동’의 적절한 분배 시스템을 창출하는 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1)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에서 아론 베나바브는 지난 읽고쓰기1234에서 리뷰한 바 있는 아론 바스타니의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자동화 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행한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자동화 담론’이 ‘새로운 체제’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해당 담론의 ‘기계의 발달로 탈희소성 사회가 도래하고,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주장은 비판한다. 베나바브의 기본 관점은 ‘희소성’은 이미 거의 극복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오히려 문제는 ‘정치’에 있다는 것이다.

2) 프랜시스 윈, 정영목 옮김, 『마르크스 평전』, 408쪽, 푸른숲. 

 

‘자동화’는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 기술적 대량실업 가설
오늘날 이른바 ‘자동화 담론3)’이 범좌파진영의 큰 관심을 받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것은 ‘기술’로 ‘인간 노동’을 대체함으로써 ‘구두 닦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드디어 인간이 ‘노동’할 운명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처참한 붕괴를 기억하는 좌파들에게 그것은 다시 ‘사회주의’를 상상해 볼 여지를 준다. 좌파만이 아니다. 레이 커즈와일과 앤드루 양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담론은 우파(?) 또는 이미 자본가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실리콘 밸리의 신흥부자들에게도 어필할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자동화 담론’은 이 시대의 ‘자본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생산비용 제로의 달성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조명이 없어도 가동되는 공장, 산재처리가 불필요한 노동-로봇들, 임금협상이 사라진 24시간 작업장을 마다할 자본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 ‘소비자’가 사라지지 않겠냐고? 괜찮다. 기본소득이 있으니까! 기본소득을 비롯한 사회적 투자 및 보편적 소득과 같은 분배에 대한 결정권은 여전히 ‘생산’을 통제하는 쪽에게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을 감액한다’, ‘기본소득을 선별적으로 지급한다’ 등등. 기본소득에 관한 어떤 ‘결정’에 대해 무엇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그렇게 ‘기본소득’이 문제가 됨으로써 사회에 대한 ‘통치권’의 문제는 시야 밖으로 밀려나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은 문제를 전도시킨다.

기술발달에 따른 생산 자동화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인간 노동이 결국엔 소멸할 것이라는 ‘자동화 가설’은 무엇보다 기술 발달에 따라 노동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어야만 확증될 수 있다. 그래야 ‘기술적 대량 실업’이 발생하게 될테고, 그에 따라 ‘노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베나바브는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에서 이 가설이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음을 다양한 고용지표 등을 통해 증명한다. 그에 따르면 자동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실업이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실업의 원인은 기술적 발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맑스도 언급한 바 있는) ‘생산력의 과잉’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나바브는 ‘자동화 담론’이 현재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과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담론적 장場을 열어준다는 점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만, 현재 지표들이 보여주는 바를 본인들의 ‘가설’에 끼워 맞춰 해석한다는 점에서, 따라서 ‘자동화 사회가 오리라’는 기대를 과하게 섞는 다는 점에서 ‘자동화 담론’이 뚜렷한 한계를 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술 발달에 따른 생산성의 증가에서 비롯되는 ‘실업율 증가’는 ‘기술적 대량 실업’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고, 자본주의 생산시스템이 생산력 과잉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베나바브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 전체의 생산성은 1970년대 이후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필요 생산량이 충분히 생산된 상태에서 과잉 생산된 상품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단위들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고 이 경쟁에서 탈락한 공장은 문을 닫는다. 남은 공장은 최대한 생산비를 낮춰 시장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쓴다. 기술발달에 따른 공장 자동화는 이러한 경쟁력 확보의 흐름 속에 있는 것으로 자동화된 공장에서 노동자 1인당 산출량은 전에 없이 증가한다. 그런데 동시에 경쟁에서 패배한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은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선진국 경제는 1990년대, 넓게 잡아 1980년대 중반부터 서비스업 중심으로 체제를 재편한다. 현재 통계를 보면 과거 직업군 전체의 절반을 넘나들던 선진국 경제의 제조업 고용율은 10-20%대로 떨어졌다. 그러면 그 많던 공장 노동자는 어디로 갔을까? 흔한 분석은 ‘서비스업’에서 해당 고용수요를 흡수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어떤 직군도 제조업 만큼 고용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일부는 서비스업 종사자로 흡수되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상시적 반실업상태, 불안정 노동자로 전락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실업율의 상승을 주도한 것은 기술발달이 아니라 제조업의 쇠퇴, 즉 생산력 과잉에 의한 생산성 저하4)다. 그러므로 ‘자동화 가설’은 시작부터 틀린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은 셈이 된다. 사라질 일자리가 있어야 ‘기술적 대량 실업’이 가능할 텐데, 이미 세계의 일자리는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일자리’가 늘었다고 해야 하나? 왜냐하면 실업율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무슨 일이 되었든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3)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류문명을 지탱해왔던 ‘인간 노동’이 ‘기계 노동’으로 대체되며, 그 결과 ‘모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고 했던 맑스의 말이 실현되는 ‘탈희소성 사회’가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담론들 일반을 말한다. 대표적인 주장자로 「가속주의자 정치 선언」을 쓴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셔니섹,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쓴 아론 바스타니 등이 있다. 넓게 보아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를 이야기 하는 레이 커즈와일이나, 『보통 사람들의 전쟁』을 쓴 앤드루 양도 ‘자동화주의자’로 꼽힌다. 다만, 커즈와일과 앤드루 양의 경우 전통적인 좌파담론과는 거리가 있다. 

4) 아론 베나바브, 『자동화 사회와 노동의 미래』, 책세상, 2장 전세계의 탈공업화, 제조업 생산능력 과잉이 가져온 해악.

 

직업 없는 노동자와 일하는 실업자
그렇게 사라진 일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질 낮은 일자리들이다. 독일의 미니잡5), 한국의 비정규직과 알바, 일본의 프리터족, 미국의 파트타임 노동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살아남은 제조업 부분의 경쟁력을 떠받치고 있는 핵심 기반이기도 하다. 일례로 ‘도요타 생산방식6)’으로 알려진 ‘적시 생산 체제’를 생각해 보면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도요타는 고정비용 0% 달성을 위해 공장에 잉여 부품과 노동자를 두지 않는 정책을 시행한다. 생산은 실제 수요가 발생하는 순간, 공장 밖에 대기하고 있던 부품 하청회사들의 트럭에 실려 있던 부품과 단기 채용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라인에 투입할 때만 일어난다. 평상시 공장에는 부품도 노동자도 완제품 재고를 최대한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절감한 생산비용은 가격경쟁력으로, 초과이윤으로 다시 자본화된다. 이것이 생산력 과잉시대에 전통적인 제조업 기업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상시적인 반半고용-반실업 상태의 노동자와 하청에서 하청으로, 중간재에서 원자재로 이어지는 수탈구조가 기업의 경쟁력을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적시 생산에 동원 가능한 값싼 임금의 거대한 반半실업자군이 그렇게 태어난다. 국가가 이를 규제할 수 있을까? 이를 규제하려는 국가에 대해 자본은 공장 이전이나, 고용축소와 같은 사회적 투자를 철회함으로써 대응한다. 그러면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고용마저도 불가능해지고 만다.

 

이는 극단적으로 말해 한 사회의 생활수준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통제력이 사실상 자본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나마 있는 규제마저 완전히 사라진다면, 또는 자본이 규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더욱 정교하게 구축한다면 어떻게 될까? 필 존스의 『노동자 없는 노동』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노동의 미분화’와 그에 동반되는 끔찍한 결과를 잘 보여준다. 일자리는 매우 잘게 쪼개져서 짧게는 1분 이하, 길게는 1-2시간 단위로 미분화된다. 이때 노동자는 100장의 이미지에서 ‘자동차’를 찾아 클릭하는 ‘일’, 인공지능의 답변의 적합도를 5점 척도로 평가하는 일을 잠깐 하고 1-5달러 사이의 임금을 받는다. 그것도 기업이 발행하는 ‘쿠폰’으로! 자동화주의자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노동’은 여전히 실존한다. 다만 너무 잘게 쪼개져서 있는지 없는지, 그것이 노동인지 봉사인지, 고용인지 개인 사업인지 식별되지 않을 뿐이다. 거기 있는 것은 노동자인가 유령인가? 차라리 유령이라면 좋으련만, 여전히 인구의 대다수는 여전히 하루 일정량의 열량공급과 휴식이 필요한 유기체다. 이 분화과정이 지속되었을 때, 일자리와 임금이 필요한 노동자의 상당수는 ‘직업 없는 노동자’, ‘일하는 실업자’라는 역설적인 계급이 될 공산이 매우 크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의 완성태는 봉건영주에 상응하는 기업이 농노에 상응하는 기업 노예군을 분할 통치하는 테크노 봉건사회일 것이다.

 

5) 독일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칭하는 말. 월 520유로(약 75만원)의 두 배를 넘지 않는 범위의 일을 통칭한다. 사회보장 의무는 있으나 소득세 의무는 없다. 2000, 2010년대 유럽 경제의 성공모델로 꼽혔던 독일 경제의 가장 긍정적인 점으로 평가되었던 높은 고용율은 이와 같은 ‘미니잡’에 힘입은 바가 크다.

6) 이 시스템의 기만적인 성격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최악』에서 잘 묘사되는데, 주인공 중 하나인 철공소 사장 가와타니 신지로는 자신의 트럭에 납품할 부품을 싣고 도요타 공장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도요타 담장자에게 전화과 걸려오면 즉시 공장으로 들어가 납품을 한다. 다시 말해 도요타에겐 부품 재고가 0%이지만 그것은 신지로의 대기비용 덕에 상쇄된 비용이라 할 수 있다. 오쿠다 히데오, 양윤옥 옮김, 『최악』, 북스토리.

 

사회운동과 필요 노동의 평등한 분배
베나바브는 ‘사회적 운동’만이 이와 같이 끔찍하게 구성될 미래로 향하는 경로를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자동화주의자들 주장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아 ‘기술발달’이 자동으로 ‘특이점’을 불러올 것까지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자본의 사회적 통제력, 다른 말로 ‘권력’을 회수하는 것은 자동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베나바브의 주장은 맑스가 오래 전에 시도한 자본주의 분석과 그에 대한 대안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은 현대적으로 번안된 맑스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쨌든 문제는 다시 ‘정치’다. 따라서 질문도 정치적인 수준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자본이 틀어쥐고 있는 사회적 투자권력을 해체할 수 있을까? 어떻게 노동을 사회적인 것으로 재조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기술발달을, 기술적 대상을 자본주의적 사용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화폐적이지 않은 보상체계를 구성할 수 있을까 등등. 베나바브는 자본의 독점권 회수 이후의 사회조직에 관한 흥미로운 것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구두는 누가 닦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베나바브의 답은 ‘모두’이다. 요컨대 그것은 ‘필요노동의 평등한 분배’다. 자본주의가 이미 인류 전체의 생활상태를 지탱할 수 있는 생산력을 확보한 이상, ‘필요노동’에 필요한 시간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때 모두에게 균등한 4시간의 필요노동이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공장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노동에 할당된 시간이 4시간이라면, 하수도 청소는 2시간만 하면 되는 식이다. 또 의사나 간호사 같이 특수한 전문직 노동에 할당된 사람에 대해 전사회적 칭찬으로 그의 전문성을 보상하자고 제안하다. 이 주장의 실현가능성이나 허점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딱히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통해 베나바브가 하고 싶은 말은 설사 우리가 ‘노동’에서 벗어날 역량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일’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탈희소성 사회’에서라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일하지 않을 수 있을 테지만, 현실의 우리는 한가함에 지쳐서 뭐라도 하려고 하는 동물들이다. 우리가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따라서 ‘노동’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노동’의 성질이 바뀔 뿐이다.(이 마저도 맑스의 주장과 동일하다.)

 

 

베나바브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중적이다.
첫째, 나는 분석의 치밀함과 대조되는 이러한 대안의 몽상적 성격이 마음에 든다. 맑스 조차도 항상 ‘대안’에 이르러서는 늘 시인이 되곤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분석과 대안의 이러한 격차는 현실에 펼쳐진 그물이 얼마나 촘촘한지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 몽상을 더 멀리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보편적 인간의 자유’를 주장했던 18세기의 계몽주의나 ‘생산수단의 독점 해체, 계급의 철폐’를 주장한 19세기의 사회주의의 주장이 당대에는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렸을지 생각해 보자. 어쩌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는지에 따라 100년 후의 세계의 풍경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투쟁’이 다음 세계에 도달하는 거의 유일한 경로라는 점에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나는 이른바 ‘투쟁’은 ‘투쟁 이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싸우는 동안은 ‘싸움’ 자체가 중요할 뿐, 싸움이 끝난 후의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하는 고민은 상대적으로 뒤로 밀린다. 맑스가 혁명 이후를 이야기할 때면 불현 듯 시인이 되었던 것이나, ‘보편적 인간의 자유’를 외쳐대던 레닌과 트로츠키가 전시공산주의 체제라는 사실상의 전체주의를 재도입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투쟁’과 ‘승리’는 자동으로 ‘진보’를 불러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계급적 질서는 바로 그 공백을 파고든다. ‘일단은 하던 대로 하자. 그 다음은 알아서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갖지 않은 피지배계급의 혁명이 계급을 철폐할 것이라는 도식도, 역사의 진보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하게, ‘사회적 투쟁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물론, 그 ‘투쟁’의 형상은 다양할 수 있을테고, 그래서 다양한 형상을 발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에게 그 이야기는 ‘대의제 민주주의도 잘만 작동하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당장은 대안이 없으니 그나마 나은 당에 투표하자’는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게 들린다. 그래서 여전히 여기가 나의 아포리아다. 우리는 주체와 모델 없이 싸울 수 있을까? 무수한 형상들 중에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가려낼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정말로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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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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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4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5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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