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아타락시아를 향해

토용
2023-08-28 10:59
150

아타락시아를 향해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을 읽고

 

  1. 쾌락에 대한 오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은 쾌락이라고 했다. 쾌락이라니... 아마도 사람들은 쾌락이 고상한 철학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쾌락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향락, 방탕함 등을 자연스레 떠올리면 말이다. 그렇지만 사전적 의미의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그리고 사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도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에피쿠로스주의’가 전용되어 감각적 향락주의, 즉 육체 탐닉이라든가 식도락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네이버)

 

실제 에피쿠로스 당대에도 에피쿠로스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티몬은 에피쿠로스에 대해 “자연철학자 중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자, 사모스에서 온 문법학교 교사, 모든 살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완고하고 다루기 힘든 자”라고 평했다. 에피쿠로스에 적대적이었던 스토아학파 철학자 디오티모스는 에피쿠로스가 50통의 음란한 서신을 썼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에픽테토스는 에피쿠로스를 음탕한 말을 늘어놓는 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심지어 에피쿠로스 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도에 떠난 티모크라테스는 에피쿠로스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 때문에 하루에 두 번이나 토했고, 밤늦게까지 벌어지는 철학 토론과 비밀 회합을 자신도 지긋지긋해했다고 주장했다. 비난의 이유 중 매춘도 빠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비난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의미를 알면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어댄 이유는 아마도 에피쿠로스학파가 ‘정원’을 꾸려 공동체생활을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신비주의는 때로 황당한 소문을 낳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많은 비난은 역설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의 번성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에피쿠로스는 미스라는 자기 집안의 노예에게 철학을 가르쳤고, 노예에서 해방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남긴 저작들을 보면 그는 대단히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추구했고, 대부분의 식사는 빵과 물만으로 만족했다. 그의 사후에도 에피쿠로스의 학교는 계속 이어졌고, 제자들 중에서 수많은 지도자가 계속해 배출되었다. 만약 에피쿠로스에게 가해진 비판이 진실이었다면 600여 년 동안 에피쿠로스학파가 존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에 태어나 기원전 270년에 죽었다.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시대는 도시국가에서 제국의 시대로 이행하던 시기였다. 폴리스라는 공동체 속의 인간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는 사모스에서 추방당하여 폴리스를 전전하다가 기원전 306년에 아테네에 도착하여 친구들과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는 고요하고 소박한 체제였다. 그는 700권이 넘는 책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은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서신> <피토클레스에게 보낸 서신>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서신> <주요 가르침들> 네 편이 전부다. 이 네 편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수록되어 있다. 남겨진 것이 적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단편적으로 밖에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이 무엇인지는 적어도 어떤 오해도 없이 알 수 있다.

 

 

  1.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아타락시아

에피쿠로스는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 아타락시아(평정)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으로 아타락시아를 들었다. 아타락시아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원인을 찾아서 그 불안에 근거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중 가장 큰 것이 신과 죽음이라고 여겼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어떠한 해결 방법을 제시했을까?

 

에피쿠로스는 신들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질 때 더 이상 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은 불멸하고 축복받은 행복한 존재일 뿐이다. 신들은 존재하고, 신들에 대한 지식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들이 악한 자들에게는 아주 큰 해를 끼치고 선한 자들에게는 아주 큰 도움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된 추측일 뿐이다. 신들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에피쿠로스는 자연현상을 탐구했다. 그는 공포와 불안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데서 생긴다고 여겼다. 그는 자연에 관해 쓴 저술로 『자연학』 37권을 남겼다.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쓴 방대한 『자연학』을 요약한 내용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연현상의 연구를 통해 종교적 미신에 빠져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했다. 그는 감각을 통해 관찰한 것이나 지성으로 인식한 것만 참이라고 말한다. 마음에서 가장 큰 혼란과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어떤 비이성적인 사고 속에서 천체들이 신적인 존재라고 믿고 이 천체들이 영원한 재앙을 줄 것을 예상하거나 상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기는 두려움을 제어해야 한다. 자연학에 관해 탐구해야지 신화를 믿어서는 안 된다. 천둥 벼락은 신들이 인간을 벌하는 수단이 아니다. 어떤 현상이 여러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그 여러 방식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도 중요하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죽음은 우리에게 오지 않고, 죽음이 우리에게 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져있다고 믿었던 에피쿠로스는 죽음도 원자로 이루어진 육체의 흩어짐일 뿐이라고 보았다. 죽음은 감각의 부재이기 때문에 쾌락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죽음 자체는 고통이 아닐지라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고통일 수도 있다고.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육체에 지속해서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극심한 고통은 가장 적은 시간 육체에 머물고, 쾌락을 뛰어넘는 육체적 고통도 여러 날 머물지 않는다. 격렬한 고통은 빨리 끝나고 약하게 지속되는 고통은 견딜 만하다. 이 사실을 알면 육체적 고통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다. 육체적 고통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끊임없는 배뇨통과 설사 때문에 어찌나 힘든지 더 심한 고통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야. 하지만 이런 고통에도 맞설 수 있는 건 자네와의 대화를 추억하며 느끼는 커다란 기쁨 덕분이라네.”

 

합리적 이성만이 불안을 없앨 수 있다. 맑은 정신으로 이성적으로 추론하여 마음에 가장 큰 소동과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생각들을 몰아낼 때 쾌락은 온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고, 쾌락은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괴로움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저자의 말대로 굉장히 단순한 주장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쾌락에 미묘하게 존재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동적인’ 쾌락과 ‘정적인’ 쾌락의 차이이다. 배고플 때 먹는 행위의 동적인 쾌락도 있지만,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는 만족감을 느끼는 정적인 쾌락도 있다는 것이다. 배고픔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쾌락이 목적이지 먹는 즐거움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만족스러운 상태라는 정적인 쾌락, 이 정신적인 쾌락이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인 것이다.

 

  1. 아타락시아를 향해

얼마 전 불교세미나 에세이 발표를 들었다. 6명의 발표자가 주제로 삼은 것은 붓다가 말한 사성제 중 고(苦)였다. 한 시즌 동안 불교의 여러 개념을 공부했을 텐데 고에 관심이 집중된 것을 보니 고통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문제인 것 같다.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도 고통의 제거에서 얻어지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에피쿠로스 철학의 중심 키워드는 아타락시아가 아니라 고통일지도 모르겠다.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고통에 치료법을 제시하지 않는 철학자의 말은 공허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고통의 치료법으로 철학 공부를 제시했다. “젊은 시절에 철학 공부를 미루어서는 안 되며, 성숙한 뒤에도 철학에 싫증을 내서는 안 되네. 왜냐하면 정신건강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너무 이르거나 늦은 경우는 없기 때문이네.” 정신적 쾌락은 정신적인 고통을 없애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정신건강을 위한 해결책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에 있다. 단순히 이성적으로 바른 지식을 얻으면 정신적으로 괴로운 일이 사라질까? 이것은 에피쿠로스가 자연을 관찰하고 천체를 탐구해서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고통이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바대로 해결될 수 있을까? 아마 에피쿠로스는 이성적 추론으로 해결하지 못할 고통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저마다 고통의 원인은 다양하고 하나의 고통만을 겪는 것도 아니다.

 

나의 일상은 평온한 듯 보이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때로는 용암이 들끓듯 한다. 오빠를 먼저 보낸 후 슬픔과 추억만 남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난 오빠를 생각하면서 나의 행동이 최선이었나를 되짚어보며 후회와 자책을 할 때가 많다. 거기다가 친정 부모님과 올케 사이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져 마음이 너무 무겁다. 중간에서 내가 잘 해결해야 하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다. 친정 부모님에 대해서 양가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아버지는 나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을 토로한다. 때론 나도 감정이 올라와서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자식 잃은 아버지 마음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어 꾹 참는다. 그래서 그냥 덮어둔 채로 있다.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 때문에 괴로울 땐 다른 것에 집중을 한다. 예를 들면 1234 글을 쓴다든지. 사실 글쓰기도 고인데...그러고 보면 고를 고로 덮고 있는 셈이다.

 

철학이 고통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하는데 자연학 탐구방법은 나의 고통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자작나무님이 쓴 글을 보니 스토아 철학에서는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는 훈련법을 가르쳐 준다는데, 에픽테토스를 읽었어야 했나? 아니지, 에세이를 해피엔딩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에피쿠로스에서 찾아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삶과 미덕들은 본성적으로 결합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미덕들 중 중요한 것은 프로네시스, 실천적 지혜이다.(내가 읽은 책에서는 사려 깊음이라고 번역했다.) 프로네시스는 깊이 생각하고 잘 따져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이성을 통해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미덕을 통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잘될까? 모르겠다. 사실 인생에서 아타락시아를 경험할 때가 얼마나 자주 있을까? 고라는 기차를 타고 가는 인생의 여행에서 중간 중간 잠깐씩 아타락시아라는 기차역에서 머무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회는 3개월 인에 머물렀다는데, 난 3일만 아타락시아에 머물러도 참 좋을 것 같다.

댓글 1
  • 2023-09-01 20:43

    아타락시아........
    "인간의 고통에 치료법을 제시하지 않는 철학자의 말은 공허할 뿐이다”
    토용님의 글을 읽고 고대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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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12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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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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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82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6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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