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과 장자> 3회 포정해우 그리고 에세이 쓰기

기린
2023-08-17 21:03
291

1.포정해우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소의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신묘한 기운으로 대합니다.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소의 자연스러운 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빈틈에 칼을 넣어 움직이며, 원래 나 있는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입니다. (.....) 지금 제 칼은 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지만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은 더없이 얇아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틈새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서 칼이 자유자재로 놀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십구 년이 지났어도 이 칼은 막 숫돌에서 갈아낸 듯 예리합니다. <낭송장자> 84쪽

 

  「양생주」 2장은 소를 잡는 백정 포정의 이야기다. 포정은 자신이 소를 잡는 일에 대해 기술로 한 것이 아니라 도(道)로 했다고 했다. 처음 보았을 때 통째로 보였던 소가 삼 년이 지나자 갈라야 할 부분이 보이는 변화였다. 포정은 그 시간동안 덩어리째 보이는 소를 분해하는 기술부터 습득하면서 기술에 그치지 않고 소를 이해하기에까지 나아갔다. 즉, 소의 생김새라든가 섭생, 생명의 주기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로 태어난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를 통해 도의 운행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깨우친 도로 십구 년이나 이어진 포정의 일은 여느 백정의 일과는 다른 길(道)을 낸 것이다.

 

 

 

  포정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으면서 이룩한 도는 십구 년이 지나도 예리함을 유지하고 있는 포정의 칼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백정들이 소의 살을 베거나 뼈를 쳐서 칼날을 무뎌지게 한다면, 그는 소의 뼈마디 틈새로 칼날의 길을 만든다고 한다. 포정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감각기관은 활동을 멈추고 신묘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감각기관이 활동을 멈춘다는 것은 실제로 보지 않거나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고 듣는 순간의 모든 감각이 오로지 포정 앞에 있는 소에게 집중한 상태이다. 이 상태는 포정이 소와 자신의 몸과 칼이 함께 움직였던 수많은 시간을 통해 도달된다. 그 시간이 응집되면 포정의 움직임은 신묘해져서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단계에 이른다. 칼은 신묘한 기운에 실려서 소의 결을 따라가노라면, 뼈를 치거나 살을 베는 억지 없이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여전히 예리한 칼과 포정의 몸과 한 마리 소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가능해진 일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기술의 단련에 머무르지 않고 기운까지 신묘하게 연마했기에 이룩한 경지이다.

 

 포정은 연이어 이 경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순간을 고백한다. “뼈와 살이 엉겨있는 곳”에 닿은 칼날의 움직임은 더욱 미묘해지는데, 엉김이 복잡할수록 기운을 집중하는 강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소가 해체되어 버리는 결과와 마주치게 된다고 했다. 포정은 이 순간을 어리둥절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소와 포정과 칼날이 더 이상 경계가 없어지는 지점에 이르러 분별이 사라지고 도의 운행에 합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반복에 반복을 지속했을 때에야 스스로 도달하게 되는 순간이다. 여느 백정과 달리 포정의 소 잡기가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매번 이러한 긴장에서도 예리하게 집중하는 기운을 부단히 연마했기 때문이다.

 

 

 

2. 에세이 쓰기

 

  여느 해처럼 올해도 기획세미나를 하게 되었고, 두 학기로 구성된 세미나는 한 학기가 끝나고 에세이 기간이 되었다. 세미나 기간 내내 의식 무의식할 것 없이 이번 에세이 주제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염두에 두게 될 수밖에 없다. 거의 십여 년을 반복해 온 과정이 내 몸에 새긴 감각 때문이다. 그렇다고 에세이가 수월하게 써지는 것은 아니다. 매주 정해진 범위의 책을 읽고 차례가 돌아오는 발제를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제대로 파악되기 어렵고 문제의식은 좀처럼 벼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에세이 쓰기는 아무리 반복해도 매번 처음 경험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일쑤였다. 나의 에세이 쓰기는 어떤 반복을 거치고 있는 것일까?

 

 포정이 소를 처음 보았을 때 덩어리째 보였던 것처럼, 나 역시 낯선 개념들로 꽉 찬 책은 통째로 보였다. 저자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맥락을 찾기는 어렵고, 세미나 시간에 오가는 말들은 책의 내용과 연결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렇게 세미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뭘 아는지 뭘 모르는지 분간도 안 된 시간이 뭉텅 지나간 것을 느끼게 된다. 포정은 소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과했을 때에야 갈라야 할 부분이 보였다. 그 과정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기운으로 볼 수 있을 때 터득되었다. 그렇다면 텍스트 역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운으로 읽는 감각을 터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쉬이 터득되는 경지가 아니다. 술술 넘어가지 않는 텍스트를 읽다보면 우선 아는 내용에 눈이 가게 마련이다. 모르는 단어는 일단 건너뛰면서,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는 내가 아는 대로 좇아간다. 하지만 문장의 어려움이 내가 아는 것들을 통해 속도를 못 낼만큼 느려지면 읽기를 위한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저자의 사유가 내는 길에 집중하는 순간은 쪼개지고 시간은 속절없이 간다. 이런 시간이 반복되다 보면 읽기를 위한 기운 자체가 피곤에 휩싸이게 된다.

 

  포정의 기운이 덩어리진 소의 부분의 길을 내기까지 점점 예리해져서 칼처럼 되기에 이른 것은, 소를 해체하는 몸의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반복에는 멈춤이 포함되어 있다. 즉 포정은 어느 지점에서 감각기관의 작용을 멈춘다고 했다. 소를 잡을 때 마다 새로운 소라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 바로 앞에 잡았던 소의 부분을 해체했던 감각을 멈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저자의 사유를 읽는 행위를 함에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읽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럴 때 모르는 부분을 괄호 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멈추어야 한다. 모르는 부분에서 멈추고 다시 읽기, 알고 있다고 지나쳐온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또 읽기의 반복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나의 인식을 끊임없이 해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인식부터 작동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서야, 저자의 사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기에 이른다. 포정의 반복은 이 과정을 거쳤다면,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저자의 사유를 이해하는 길을 내지 못했던 것이다.

 

 

 

3. 에세이 쓰기가 양생이 될 수 있을까

 

  포정이 소에게 몸을 밀착하여 해체하는 몸놀림이 춤사위 같았고, 칼이 내는 소리는 음악 같음에 감탄한 문혜군은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느냐 물었다. 포정은 기술을 넘어선 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고, 포정이 밝힌 소를 잡는 도를 들은 그는 양생(養生)을 터득했노라고 했다. 그렇다면 포정에게 소를 잡는 일은 자신의 삶을 가꾸는 기예를 연마해서 도를 터득할 수 있는 장이었다. 내가 일 년을 공부하는 기획세미나를 하고 에세이로 마무리하는 일도 나의 삶을 가꾸는 장으로 삼을 수 있을까?

 

  매년 기획 세미나를 하고 마무리로 에세이를 쓰는 반복이 매번 괴로운 상황에 대해 질문해 보고 나니, 포정의 반복이 다르게 읽혔다. 뼈와 살이 엉겨있는 복잡한 지점에서는 여전히 멈추어 기운을 예리하게 다듬는 포정이 보였다. 그에 비해 텍스트를 읽는 내내 기존의 인식을 작동시켜 아는 것만 읽느라 기운을 다 쓰고 마는 내가 보였다. 이러한 읽기의 반복은 결과적으로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벼릴 수 없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내용이 없는데 쥐어짜는 괴로움만 반복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읽기의 습관을 바꾸려면, 모르는 내용을 건너뛰어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나쳐서 읽어가려는 기운과 멈추려는 기운이 서로 겨루어서 다시 읽는 기운을 익혀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곧 포정이 몸을 놀려 거듭거듭 소를 잡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반복되어진 읽기를 통해 텍스트에 대한 이해의 폭이 쌓여도 쓰기에서는 또다시 괴로움에 봉착한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기존의 나의 인식을 해체하고 재조립해야 해서 써내야 하는 일은 여전히 시간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정의 십 구년은 그런 점에도 양과 질이 담보되는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기도 할 것이다.

 

  세미나에서 채택된 텍스트를 읽고 또 읽는 반복으로 나의 인식을 해체하는 일 자체가 몸의 기운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이해된 저자의 사유들이 나의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 제대로 설명되어지기까지 수없이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는 작업 또한 몸으로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온 몸으로 읽기와 쓰기를 통과하는 일, 오롯이 집중하는 경험을 몸에 새기는 일이 곧 에세이 쓰기일 것이다. 포정이 그렇게 소를 잡았듯이, 나도 그렇게 에세이를 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삶을 가꾸는 기예가 되어 좋은 삶을 지속하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4
  • 2023-08-21 11:01

    포정해우-에세이쓰기-양생의 연결이네요
    기린의 다양한 글쓰기를 응원합니다^^

  • 2023-08-21 21:22

    그렇다면 내가 저자의 사유를 읽는 행위를 함에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읽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다시 읽기를 무지 싫어하는 나를 뜨끔하게 만드는 문장!이넴......

  • 2023-08-22 16:31

    그럼유 그럼유 읽고 글쓰기는 ‘양생’이 되지유~~

  • 2023-08-23 06:55

    이제 에세이 쓸때마다 해우하는 심정으루다가ᆢ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동은
2024.05.14 | 조회 55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기린
2024.05.10 | 조회 16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67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6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