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12회] 저물어가는 춘추시대

진달래
2023-07-1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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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자(제나라 대부 진항)가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나가 애공에게 알렸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그를 토벌하십시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들에게 말하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세 대부들에게 말하라 하시는구나.”

공자께서 세 대부들에게 가서 말했으나 모두 안 된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恆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논어> 헌문-22

 

내가 동양 고전을 처음 읽었을 때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진성자(陳成子)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여기는 진성자라고 되어 있지만 대체로 전성자(田成子)라고 하고, 진항(陳恒), 전항(田恒), 혹 전상(田常)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자(成子)는 그의 시호이며, 이름이 항(恒)인데 『사기』에는 상(常)으로도 되어 있다. 진성자 혹은 전성자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들이 진(陳)나라에서 살다가 제(齊)나라로 이주하여 성을 전(田)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1. ()씨의 제나라에서 전()씨의 제나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들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노나라의 역사는 「노세가」에 진나라는 「진세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제나라의 경우 「제세가」로 되어 있지 않고 「제태공세가」와 「전경중완세가」로 나누어져 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가 강태공의 강씨에서 바로 진성자, 아니 전성자의 전씨로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陳)나라에서 처음 제나라로 이주한 이는 진완(陳完)이다. 완은 원래 진나라의 공족(公族)이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예들에게 봉해 준 나라로 규(嬀)성이다. 진(陳) 선공 21년, 그가 친하게 지내던 태자 어구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겁이 난 진완은 제나라로 도망을 갔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환공이었는데 도망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완에게 경(卿)의 자리를 제안한다. 이 때 완은 “객지를 떠도는 신하로서 이처럼 은혜를 입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제 환공의 제안을 사양했다. 완의 겸손한 태도가 마음에 든 환공은 수공업자들을 감독하는 공정(工正) 자리를 맡게 했다. 이 사람이 바로 「전경중완세가」의 전경중, 그러니까 전완이다.

완이 어렸을 때 주나라의 태사가 그를 보고 주역 점을 봤는데 그가 다른 나라에 가서 귀하게 될 것이며, 후대에는 천자의 귀한 손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다른 나라는 강(姜)성을 가진 나라일 것이며 반드시 후대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후대에 만들어 진 것이겠지만 이들은 완 이후 5대 전환자 때에 이르면 제나라 유력 대부의 집안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8대 후손인 전성자(田常)는 간공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그 100년 뒤 전화(田和)가 왕이 되면서 전(田)씨의 제나라가 된다.

 

『논어』에 등장하는 전/진성자가 간공을 시해할 당시 제나라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제 경공은 안자(晏子)와 함께 한동안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렸지만 안자가 죽고 난 이후에 제나라에 유력 대부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서 군주가 여러 번 바뀌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공은 말년에 장성한 아들을 놔두고 어린 아들인 도(筡)를 태자로 세웠다. 경공이 죽자 대대로 세력이 있었던 국(國)씨와 고(高)씨가 도를 군주로 세웠다. 그러나 평소 국씨와 고씨와 세력 다툼을 하던 포(鮑)씨와 전(田)씨가 경공의 다른 아들인 양생을 도공으로 옹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공과 사이가 나빠진 포씨가 도공을 시해하고 도공의 아들을 즉위시켰는데 그가 간공(簡公)이다.

간공은 즉위 후 전성자와 감지를 재상으로 두었다. 간공이 감지를 총애하자, 감지는 전성자를 죽이려했다. 그러나 전성자가 역으로 이를 치고, 간공을 시해했다. 전성자는 간공을 대신해서 평공(平公)을 세웠다. 제 경공 시기에 평화는 안자에 의해 각 대부들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이었다. 안자가 죽고 각 대부들의 권력 다툼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간공의 시해 사건은 이러한 권력 다툼에서 전씨가 제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 명분이 사라지는 시대

 

춘추시대 말 대부들에 의해 제후가 바뀌는 경우는 워낙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전성자에 의해 간공이 시해되고 평공이 세워진 일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논어』에 이 장면이 등장하면서 이 일은 춘추시대가 끝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공자가 노 애공에게 제나라 토벌을 건의하는 이 장면은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다. 먼저 제나라 군주가 시해 당했는데 노나라에서 토벌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나라 같은 큰 나라를 작은 노나라가 토벌을 하네 마네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일을 성토(討)하는 것은 천자(天子)의 역할이기 때문에 패자(覇者)는 되어야 이런 일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패자도 아닌 노나라 군주에게 전성자를 토벌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예(禮)에 맞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했을까?

『춘추좌전』에도 이 때 공자가 애공에게 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애공이 약한 노나라가 어떻게 제나라를 이길 수 있겠냐고 묻자 공자가 대답한다. “진항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백성들 중에 그의 편이 아닌 자가 반은 될 것입니다. 노나라 군대와 진항에 반대하는 백성 반을 합하면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애공이 이를 계손에게 이야기 하라고 하자 공자가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좌전』에 남아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공자는 간공 시해 사건을 계기로 제나라를 칠 수 있는 명분을 챙기면서 내란으로 혼란해진 틈을 이용하려고 한 듯하다. 이즈음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애릉 전투에서 노나라는 제나라에게 크게 패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후대 성리학자들은 이보다는 공자가 진항을 토벌해야 한다고 청한 것을 춘추시대의 예(禮)를 행하려고 한 것으로 보았다. 즉 명분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북송 때의 정자(程子)는 ‘공자의 뜻이 명분을 바로잡고 그 죄를 천자에게 고하고 여러 제후들에게 알려서 제후국들과 함께 그를 성토하려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패자도 아닌 노나라가 어떻게 제나라를 성토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노나라에 주나라의 예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이 주(周)나라의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생을 이러한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따라서 이 일도 무너져가는 옛 질서를 세우려는 공자의 사명감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말에 애공은 이를 ‘세 대부(三桓)’에게 고하라고 한다. 제후에게는 힘이 없음을, 이 또한 대부들에게 결정권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춘추좌전』을 읽다보면 가장 많이 보는 단어 중 하나가 회(會)와 맹(盟)이다 우리가 흔히 회맹(會盟)이라고 하는 것으로 매년 누가, 누구누구와 어디에서 맹약을 맺었다는 말이 나온다. 지금으로 치면 국제회담 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맹약을 맺고 주로 잘못이 있는 나라에 가서 성토를 한다. 물론 이런 춘추시대의 수많은 회맹(會盟)들이 명분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에 각각의 나라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숨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명분이 없이는 함부로 군사를 낼 수 없었고,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만 할 수도 없었다. 춘추시대는 이익보다는 명분과 의(義)를 중요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진(陳)나라에서 이주한 전씨가 제나라에서 유력한 대부 집안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를 전완의 이야기에서는 그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그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를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전성자의 아버지인 전희자(전걸)는 평소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큰 됫박으로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작은 됫박을 사용한 일이 유명하다. 또 이들은 목재나 생선 혹은 소금을 구입할 때 상인들이 부르는 대로 값을 쳐주었다. 내란이 일어났을 때는 자기들의 이익을 모두 나라에 바쳤고, 망명했던 공족들이 돌아오면 봉록을 올려 주었다. 또 작위가 없는 자들에게는 사적(私的)으로 전답을 나누어 주고, 오갈 데 없는 백성들에게는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사기세가』에 의하면 전씨가 제후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나라 사람들에게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전씨가 한 일들은 대체로 백성들을 위해 한 일들로 여겨졌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한 일이 과연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 자기 집안을 위한 것인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이들이 백성을 위해 이런 일들을 했다면 오히려 집안 일로 할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 행해질 수 있는 정책이나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런 일들을 전씨가 민심을 얻는데 사용한 것이지 제나라 전체를 위해서 사용했다고 볼 수 없다. 한편으로 전씨가 제후의 자리에 오르는데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한 것도 이들 역시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누가 군주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니까 제후의 자리에 오르는 이도 그를 받아들이는 백성들도 모두 자기의 이익을 최선으로 여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간공을 시해한 전성자를 토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논어』의 이 장면은 명분을 중시하는 춘추시대가 이제 막을 내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이제 이익이 되지 않은 일에는 누구도 나서지 않으며,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처음 “내가 대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를 읽었을 때는 공자가 안 될 줄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었다고만 읽혔다. 자기 행동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자꾸 보다보니 목욕재계하고 애공에게 나가 전성자를 성토해야 한다고 말하는 공자의 마음에서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공자는 다가올 시대가 오직 서로 이익(利)을 위해서 다투는 시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 일에 대해 화를 내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혹은 그 일이 성사되지 않아도 말이다.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댓글 3
  • 2023-07-12 17:00

    안되는 줄 알면서도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공자의 마음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네요. 그 마음을 과연 명분에 사로잡힌 고집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요?

  • 2023-07-14 11:45

    그런 상황에 자신이 해야할 일이 그것밖에 없음을 알고 그렇게 한게 아닐까요? 어려운 시대여서 공자가 공자님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같네요 ^^
    잘 읽었습니다~~

  • 2023-07-16 09:58

    논어에서 공자가 계속 아쉬워하고 비통해하는 것이 그런 것이었군요. 명분이 어떤 위중함을 갖고 있었는지 이해가 잘 되네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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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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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4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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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 조회 14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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