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문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요요
2023-06-1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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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피터 고프리스미스, 『아더 마인즈』

 

 

 

나의 문어 선생님

친정집 제사상에는 늘 삶은 문어가 올라왔다. 제사가 끝나면 문어를 먹기 좋게 잘라 음복을 한 뒤 술안주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곤 했다. 그렇게 내게 문어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숙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넷플릭스 다큐 <나의 문어 선생님>을 통해 만난 문어는 한낱 먹거리가 아니었다. 문어는 한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고 자연의 신비와 생명에 대한 경이를 되살려 그를 다시 살게 한 신비롭고 놀라운 존재였다.

 

다시 문어를 만났다. 이번에는 영화가 아니라 책 <아더 마인즈>로. 이 책의 저자인 철학자 피터 고프리스미스 역시 <나의 문어 선생님>의 주인공과 같은 스쿠버 다이버다. 그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문어를 만났고, 문어를 관찰하고, 문어의 마음에 대해 물었고, 그 물음은 마음의 탄생에 대한 탐구로까지 나아갔다. <아더 마인즈>에서 시작한 그의 물음은 더 심화되어 의식과 마음의 진화 그리고 생명의 의미를 탐색하는 <후생동물>을 쓰게 되기에 이르렀다. 두 권의 책 모두 진화론의 관점에서 마음과 의식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인간이 진화의 정점에 서 있다고 보는 관점에 매우 비판적이다. 두권의 책 모두에서 마음과 의식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최근의 과학과 철학의 첨예한 담론들을 건드리며 전개된다. 사실 이 담론들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이 글에서는 마음과 의식의 진화보다는 문어를 알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마음과 의식의 진화 문제는 살펴보아야 할 쟁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관련한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

 


 

 

문어에게 배운다

문어는 우리 인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영화 <콘택트>의 외계인이 커다란 문어 형상을 했던 것처럼 문어야말로 인간과 다른 정신적 존재를 탐구할 때 가장 적합한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문어의 몸은 척추동물의 구조화된 몸과 다르다. 문어는 자신의 눈 크기 정도의 구멍이라면 몸을 접거나 구부려서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다. 문어의 몸의 모습과 구조, 그리고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문어의 피는 푸르고 심장은 세 개다. 문어는 똑똑하다. 문어는 사람의 얼굴을 구별할 줄 안다. 실험실에서의 문어는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먹물을 쏘기도 한다. 또 문어는 사람이 보지 않을 때를 기다렸다가 실험실 수조에서 벗어나 배수구를 통해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인간의 눈에는 문어가 계획을 세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어는 무척추 동물 세계에서는 가장 똑똑한 생물 넘버1이다. 인간은 1000억개, 벌은 100만개, 개가 5억개 정도의 뉴런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문어의 신경계에는 5억개 정도의 뉴런이 있다. 문어의 신경계는 척추동물들과 달리 머리-뇌의 중추신경 중심이 아니다. 문어는 전체 신경계 중 3분의 2가 여덟 개의 다리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의 팔다리와 달리 문어의 다리는 머리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문어의 다리는 중앙뇌의 명령 없이도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맛보고 세계를 탐색한다. 문어 다리의 빨판 하나에 100만개 정도의 뉴런이 있다고 하니 그 자체가 작은 뇌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뇌가 중앙통제형인 것과 다르게 문어는 몸전체가 뇌인 셈이다.

 

인간과 문어는 공통조상으로부터 6억년전쯤 갈라졌고, 각자 다른 길을 걸어서 지금에 이르렀다. 45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생명이 나타난 것이 38억년 전, 진핵세포가 나타난 것은 15억년 전. 진핵세포인 단세포들이 뭉쳐진 다세포 생물이 출현한 것은 약 9억년 전이다. 다세포 생물은 단세포 생물이 세포막으로 외부와 경계를 짓고 자극에 감각하고 반응하던 것과 차원이 다른 혁명적 변화를 조건으로 생겨났다. 바로 하나의 개체 내부에서의 세포들 사이의 소통과 신호체계, 그리고 협응시스템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 내부 소통이 없다면 다세포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내면적 소통 시스템의 발생은 세포들 사이에서 아주 빠르게 전기화학적 신호를 주고받는 신경계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대략 7억~8억년 전에 초보적 차원의 신경계가 등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바로 인간과 문어의 공통조상이 갈라지기 직전이었다. 그 조상은 아마 아주 작은 벌레 모양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6억년 전 공통조상으로부터 분기하여 오늘에 이른 인간과 문어는 전혀 다른 디자인의 신경계, 즉 뇌를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연이 단 하나의 신경계, 단 하나의 뇌, 나아가 단 하나의 마음만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뇌와 마음을 척도로 삼아 다른 생명체의 마음과 의식을 바라보는 관점은 단지 인간중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편협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의식의 통일성의 문제

인간을 비롯한 척추동물의 신경계는 중앙에서 통제하는 뇌구조를 갖추고 있다. 일반인들,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도 정신과 뇌를 단일한 것으로 여긴다. 몸도 하나, 뇌도 하나, 정신도 하나, 자아도 하나라고 생각한다. 주관적 경험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가 나를 나인 것처럼 느끼는 경험이다. 이러한 주관적 경험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히 ‘나’라는 통일된 자아를 상정한다.

 

그런데 분할뇌 실험은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1940년대부터 간질환자의 발작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절제수술이 시작되었다. 이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일상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특별하게 조직된 실험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른 결과를 보였다. 오른쪽 눈을 가리고 달걀을 보여준 뒤, 무엇을 보았느냐고 하면 이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언어중추인 좌뇌가 말로 하는 답변이다. 그런데 여러 물건 중에서 자신이 본 것을 고르라고 하면 왼손은 달걀을 고른다. 우뇌의 답변이다. 이 실험으로 뇌량을 끊었을 때 좌뇌와 우뇌의 각 반구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할뇌 실험은 하나로 통일된 자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흔들었다. 의식이나 자아가 하나라는 생각에 균열이 온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서는 좌뇌와 우뇌가 두껍고 단단한 뇌량에 의해 강하게 연결된 인간의 경우가 오히려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포유류에 속하는 돌고래는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인간에 비해 가늘고 좁다. 돌고래는 잘 때 한쪽 뇌만이 잠을 잔다. 반대편은 깨어 있다. 돌고래에게 자아가 있다면 돌고래의 자아는 어느 쪽 뇌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양서류인 개구리의 경우 왼쪽 뇌는 주로 먹이감을, 오른 쪽 뇌는 환경과의 관계에 특화되어 있다. 먹이가 오른쪽에 나타나면 백발백중이지만 왼쪽에 나타나면 쉽게 놓친다. 또 천적이 왼쪽에 나타나면 얼른 피할 수 있지만 오른쪽에 나타나면 잘 분간을 못하고 잡아먹히기 쉽다. 자, 그렇다면 통합이 덜 된 뇌는 덜 떨어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통합이 되지 않는 경우는 두 정신을 갖는다고 보아야 할까.

 

이런 예들을 통해 피터 고프리스미스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자아의 통일성에 대한 이미지는 생명의 진화과정에서의 하나의 선택이고 성취이며 발명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인간의 경우가 생명을 보는 유일한 척도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어느 정도의 통일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인간의 뇌처럼 강하게 통합되지 않은 뇌 역시 자연의 성취이며 발명품이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주관적 경험만이 유일한 주관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문어의 주관적 경험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한 주관적 경험의 정의는 자신을 자신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문어가 자신과 다른 것들을 구별한다는 것은 이미 다양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런데 문어가 자신을 문어인 것처럼 느끼는 주관적 경험은 어떤 양상을 띄는 것일까? 문어의 다리가 중앙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상대적으로 자율적으로 행동할 때 문어의 주관적 경험은 우리 인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어의 다리는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하기도 하지만, 또 머리와 다리가 완전히 하나의 몸인 것처럼 행동할 때도 있다. 이런 관찰의 결과 피터 고프리스미스는 아마도 문어는 덜 통합된 상태와 더 통합된 상태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아무튼 문어는 뇌중심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문어는 신체 중심의 체화된 인지이론의 관점으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체화된 인지이론은 인지능력이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 체화되어 있어서 마치 즉흥 재즈 연주에서 각 연주자가 호흡을 맞추며 연주를 구성해 나가듯이 우리의 인지가 구성된다고 말한다. 문어는 체화된 인지이론이 뇌중심 인지이론을 비판할 때 자주 예시로 등장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의 각 부위가 특정한 기능과 역할과 한계를 갖고 있는 것과 달리 문어의 신체는 변화무쌍하고 가능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문어에게 체화된 인지가 있다면, 문어는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체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앙통제형 뇌중심 인지이론을 비판하는 체화된 인지이론조차도 인간중심의 패러다임에 갇힌 것인지도 모른다. 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신체와 뇌의 구분 너머에 사는, 인간과 달라도 너무 다른 생명체다.

 

 

고통의 문제

피터 고프리스미스는 의식만이 주관적 경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고통을 예로 들어서 설명한다. 오랫동안 동물의 고통 문제는 의식과 주관적 경험에서 중요한 이슈였다. 데카르트적 심신 이원론의 입장에서는 영혼이 없는 존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심신 이원론은 마치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의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고통이 아니라 기계적인 반사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동물실험도, 공장식 축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물해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피터싱어 같은 철학자는 동물이 고통을 감각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의식이 있다는 증거이므로 인간은 같은 의식적 존재로서 윤리적 책무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이유든 윤리적인 이유든 과학자들은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지 아닌지 알기 위해 여러 실험을 했다. 동물의 몸에 상처를 내고 그들이 상처를 보듬는지 아닌지, 어류가 진통제가 포함되어 있는 물을 선호하는지 아닌지, 혹은 고통완화 효과가 있는 음식을 먹는지 아닌지 등등. 소라게를 대상으로 한 전기충격실험도 있다. 그 실험에서 소라게는 똑같이 전기충격을 받았더라도 그들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소라껍질을 벗고 도망가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했다. 아주 안전하고 튼튼한 소라껍질을 가진 경우에도, 주변에 포식자가 있는 경우에도 소라게가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이 감지되었다. 소라게가 감각적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들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가는 소라게 차원에서도 복잡한 판단의 문제가 개입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곤충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곤충은 몸의 일부가 손상되어도 개의치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러나 그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상태가 그전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벌실험을 통해 몸이 손상된 벌들이 하던 일에 의욕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유사감정 상태는 곤충만이 아니라 달팽이와 같은 복족류에서도 확인된다. 이 실험들의 윤리성 문제는 미뤄두고 생각하더라도 고통의 문제 역시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만 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감각과 판단 양측면에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방식이 동물의 고통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에 대해서 물리-생물학적 생명 시스템은 온전히 작동하는 데도 불구하고 오직 주관적 경험 혹은 의식의 영역만이 텅 비어 있는 생화학적 기계라고 판단하는 관점이 과연 타당할 수 있을까.

 

문어가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피터 고프리스미스의 관찰에 따르면 문어는 부상을 입었을 때 다친 부위를 돌보거나 보듬기도 하고, 때로는 포식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다리를 잘라내기도 한다. 다른 물고기가 몸의 일부를 깨물었을 때 사람처럼 깜짝 놀라 튀어 오르기도 하지만, 싸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럽의 동물보호법은 연체동물은 그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됨에 따라 문어는 ‘명예 척추동물’로 대우받으며 보호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유럽의 경우 동물보호법의 대상이 척추동물 중심이기는 하지만, 문어를 포함한 동물의 주관적 경험과 고통 문제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바다는 우리의 과거이고 미래

바다에서 단세포 생명체가 탄생한 이후 생명은 수십억년의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 진화의 결과로 우리의 존재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서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생명들은 모두 생명의 나무에서 우리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과 우리는 우주와 지구의 진화사라는 공통 서사와 함께 각자의 서사를 갖는다. 문어를 만난 이후 바닷속을 탐험하며 수많은 생명들의 마음과 의식의 진화를 탐구하는 철학자 피터 고프리스미스가 알려준 문어의 삶도 다르지 않다. 나의 신경계가 진화의 결과인 것처럼 문어의 신경계 역시 그러하다. 두족류의 뇌는 포유류의 뇌가 자연의 유일무이한 표준모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더 나아간다면 마음도, 정신도, 의식도 그러하지 않을까. 곰팡이와 버섯과 같은 균류 그리고 지의류가 그랬듯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다른 존재와의 만남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킨다.

 

특히 문어와의 만남은 생명의 기원이자 마음과 의식이 생겨난 모태인 바다를 더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바다란 무엇일까. 바다는 문어의 터전이다. 바다는 인간을 위한 먹을거리를 내어놓는 공장이거나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위로하는 멋진 풍경 이상이다. 우리 몸 속에도 바다가 있다. 육상생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이 바다를 떠나면서 세포 속에 바닷물을 간직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고 자궁이다. 바다가 없다면 우리도 없다. 물론 지금 바다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들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바다는 우리의 과거이고 현재고 미래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목전에 둔 지금, 우리는 바다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한다. 문어와의 만남을 통해 생명에 대해, 의식에 대해, 바다에 대해,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고 있다.

 

 

 

댓글 3
  • 2023-06-18 13:59

    그래도 문어는 맛있어요......<- 퍽
    오염수를 버리라고 '주면 마시겠다'는 한국 총리는 ?
    문어보다 못한 생물!!!!!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고 자궁이다. 바다가 없다면 우리도 없다'.

    몇가지 방사능 기준치인 알량한 IAEA기준으로 괜찮다고 하는 인간들은
    가장 열등한 생물일지도.

  • 2023-06-29 21:31

    뇌, 신경계, 의식의 진화론적 계보는 문어를,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는 물고기의 계통 발생학을 (내 안의 물고기, 닐 슈빈, 김영사) 참고해 공부하면 좋겠어요. 그러고보니 어느쪽이든 뒤돌아 볼수록 바다를 향해 가고 있군요. 버섯(진균류)까진 아직 멀었네요. 더 한참 가야 만나겠죠? 3억년 정도? ^^

    • 2023-06-30 11:48

      세션샘! 같이 자연공부할래요? 닐 슈빈책도 반쯤 읽다가 멈춘 상태.^^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도 사놓고 못읽고 있네요.ㅎ
      바다도 무궁무진한데.. 올해는 두루두루 살펴보는 게 더 재미있어서 다음 1234는 하늘로 가려고요. 땅속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하늘로 유랑하는 독서를 합니다. 하하하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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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100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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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75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7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61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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