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과 장자> 2회 춤 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2023-06-1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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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다 배운 연독이위경

 

기린

 

 

연독이위경, 중도를 지키는 삶

 

좋은 일을 해서 명성이 나는 것도, 나쁜 일을 해서 형벌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爲善無近名,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可以保身,可以全生,可以養親,可以盡年._낭송장자 78쪽)

 

  위 문장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좇는 위험을 밝힌 「양생주」 1장의 후반부 내용이다. 내편에서 선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첫 문장인데, 장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삶에서 양생의 가능성을 본다. 좋은 일이 드러나서 명성을 얻게 되면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쁜 일로 형벌을 받게 되면 몸을 상하게 된다. 온전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양생에서 선도 악도 해로울 뿐이라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중도의 삶을 통해 시비선악을 넘을 수 있을 때, 자신과 주변까지 보살피면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원문을 살펴보면 중도의 삶은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이다. 직역하면 살피는 선으로써 날실로 삼는다 는 의미인데, 이때 날실은 아래 위로 지난다. 위진시대 곽상은 연독이위경을 “순중이위상(順中以爲常)”으로 주석하였다. 중심을 따름으로써 법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살핀다는 의미의 독(督)을 가운데(中)로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주석은 『황제내경』 「영추」편에서 사람에게는 여덟 개의 맥(脈)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독맥(督脈)은 중앙(中)을 흐르는 맥이라는 설명에 따른 영향이라고 한다. 독맥은 꼬리뼈 부근에서 등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가 정수리를 지나 인중에 이르는 길로, 몸의 중앙에 선 척추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기운의 길이다. 독맥은 아래에서부터 들이쉰 숨으로 위로 뇌까지 이른 후 내쉬는 호흡의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도의 삶은 독맥을 타고 흐르는 호흡을 다스리는 삶으로 볼 수도 있다.

 

 

 

  호흡은 들숨과 날숨의 리듬을 통해 터득된다. 이러한 리듬은 자연에서 낮과 밤, 사계절이 번갈아 돌아오는 리듬과도 연결된다. 자연의 리듬이 항상 하여 계절의 변화를 가져오듯이, 들숨과 날숨의 호흡처럼, 끊임없이 오고가는 가운데 일상의 중심을 잡는 삶이 곧 중도의 삶이다. 이때 중심은 양쪽에서 나뉜 평균점이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점을 가리킨다. 이러한 균형점은 날숨과 들숨이 저절로 교차하며 생명을 기르듯이, 일상에서도 선과 악으로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은 채 일상에 응할 때 가능해진다.

 

 

춤추러 가다

 

 

  작년에 공동체 홈피에서 “몸에 힘을 덜어내면서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해지는” 경험에 대한 글을 읽었다. 몇 년간 마을에서 주관하는 커뮤니티 댄스에 참가해 춤을 추면서 느낀 것이라고 했다. 춤에는 일도 관심이 없었지만,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에 솔깃해졌다. 몸도 마음도 평안한 경지야말로 내가 양생의 삶에서 지향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글을 쓴 친구에게 언제 춤 강좌가 열리는지 물어보고 그 때를 기다렸다가 춤을 추러 갔다.

 

  춤을 배우러 간 첫 날, 바닥에 누워서 한 시간 정도 몸 풀기부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간 터라 따듯한 바닥에 누우니 온 몸이 나른해졌다. 춤 선생님은 온 몸이 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몸에 힘을 빼라고 했다. 그리고는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흐름에 집중하라고 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니 잠이 스르르 왔다. 잠을 쫓느라 몸은 뻣뻣해지는데다 누워서 점점 꿈지럭거리라는 자세도 영 어색했다. 선생님은 숨을 쉬는 리듬에 따라 그 숨을 손가락 끝까지 밀어보라고 했다. 우리 몸은 70 프로가 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호흡을 통해 그 흐름을 전신으로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도 온 몸으로 리듬을 타기는커녕, 어느 순간 잡생각을 좇아 생각 따로 숨 따로로 되돌아갔다.

 

 

 

  첫 시간의 어색함은 둘째 시간에도 이어졌다. 그나마 음악을 틀어 놓으면 그 음악의 리듬으로 몸을 꿈지럭거리지만, 누운 채로 한 시간이나 그러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계속 호흡을 강조하는 샘의 말도 점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 번째 시간 다른 일정과 겹쳐서 춤 강좌에 못 가게 되었을 때 은근히 기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번 빠지고 다시 갔을 때는 또 어색하고, 좀처럼 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

 

 

춤과 호흡의 상관관계

 

 

  『장자』의 「달생」편에는 헤엄의 달인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강을 유람하다 보았는데 어떤 이가 폭포아래 사십 리나 되는 급류를 타며 헤엄치고 있었다. 공자는 그가 죽으려는 줄 알고 제자들에게 구해 주라고 했다. 제자들이 쫓아가도 잡지 못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 그 사람은 물에서 유유히 빠져나와 제방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공자는 그를 따라가서 헤엄의 비결을 물었다. 그 사람은 물의 길(道)을 따른 것뿐, 사사로이 따로 익힌 비결은 없다고 답했다. 소용돌이를 따라서는 물속으로 들어가고, 솟아오르는 물결을 따라서는 물 위로 따라 올랐다. 자연의 리듬은 따로 익히지 않아도 따를 수 있으니, 타고 날 때 따랐던 호흡으로 뭍에서만이 아니라 물에서도 편안해졌다고 했다.

 

 

 

  나의 경우 홈피에서 춤을 추며 ‘몸과 마음의 평안’에 도달했다는 문장은 솔깃했지만, 춤으로 그 상태까지 어떻게 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너무 막연했다. 더구나 내가 경험했던 춤은 대부분 막춤이라서, 온 몸을 있는 대로 흔들면서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호흡에 집중하라고 할 때마다 몇 번 리듬을 타기도 전에 이게 무슨 춤이냐 싶은 분별이 생겼다. 그러자 몸의 중심을 타고 흐르는 호흡의 리듬이 자꾸만 깨졌다.

 

 호흡을 통해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몸에도 차츰 균형이 잡히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몸놀림에도 힘이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뭍에서든 물에서든 편안히 그 흐름에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규칙적인 리듬에서 몸도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게 될 때 춤이 시작될 수 있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으로 균형 감각이 터득되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지가 ‘연독이위경’ 곧 중도의 삶이다.

 

 

어쩌다 보니 평안의 순간

 

 

  네 번째로 춤 강좌에 갔던 날이다. 그날도 한 시간 동안 바닥에 누워서 호흡을 따라 꿈지럭거리던 몸 풀기 시간이 지나고 일어서서 춤을 추는 시간이 되었다. 한 사람이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 마주보고 있는 짝이 상대의 몸을 터치해 주었다. 눈을 감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여서 불안할 것 같았는데 웬걸 상대의 터치를 따라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그러면서 리듬을 타는 몸과 호흡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어느 순간 몸의 움직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어떤 잡생각도 끼어들지 않았고, 짝이 터치해주는 감각을 따라 온전히 춤에 빠질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의 경계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았다. 다음 시간 다시 꿈지럭거리며 몸으로 호흡의 리듬을 익히자니 여전히 잘 안 되었다. 그사이 또 다른 일정이 겹쳐지면 춤 강좌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렇게 퐁당퐁당 가자니 안 그래도 가기 싫은 마음이 더 극성을 부렸다. 결국 마지막 시간까지 흐지부지하다가 한 시즌이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춤을 통해 ‘몸과 마음의 평안’을 터득하고 싶었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춤 배우기는 포기했지만, 그 경험으로 내가 일상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는 살펴보게 되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리듬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몸과 마음의 균형 감각이 무너져서 혹시라도 실수를 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 호흡을 의식하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리듬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언젠가는 매사를 평안하게 맞이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우선 호흡부터 제대로 들이마시고~ 내쉬고~. 거기서부터 리듬을 타보자. 들이마시고~ 내쉬고~.

 

 

댓글 5
  • 2023-06-14 13:46

    그렇지 않아도 커뮤니티 댄스 시즌2에 참여하지 않아 춤 수업 참여 소감이 궁금했습니다.
    그래도 기린님이 춤 수업을 계기로 일상에서 몸을 돌아보고 호흡을 의식하게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이번 춤 수업은 '컨티늄'이라고 하는 몸 움직임으로 저도 처음으로 경험하고 어려웠습니다. 저도 따라하기 쉽지 않고 초반에는 지루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춤 추면서 느끼던 환희를 이번 시즌에서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번 시즌을 지나면서 천천히 약하게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뭉치거나 결리던 근육이 풀어지는 경험은 좋았습니다. 하기는 쉽지 않지만 노년의 몸의 일상의 몸 치유로는 효과가 좋았습니다.
    소감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린님 이글 컴댄스에 공유해도 되지요?

  • 2023-06-16 18:08

    커플댄스 하러가신게 아녔구나ᆢ 글을 읽으니 명상이 생각나네요. 춤도 호흡을 중심 삼아 일상을 살피는 기예라니 저도 뭔가 춤이 급궁금해집니다ㅎㅎ 그나저나 누워서 배우는(?) 춤이라니 ᆢ 저거....... 춤 맞죠~~? 😊

  • 2023-06-17 08:14

    들숨과 날숨의 리듬, 그게 참 오묘한 것 같아요.
    거기서부터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가능할 터인데
    저는 가만히 쉬는 호흡도 버거워하고 있네요ㅠㅠ

    그나저나 춤추러 간다고 할때
    제가 떠올린 그림이랑은 사뭇 다르네요ㅎㅎ
    막춤에서는 어떤 것을 쓸 수 있을까요? 기린님~~~

  • 2023-06-18 09:41

    숨이 중요하군요. 생각해보니 감정이 숨으로 다 나타나네요.
    머리가 아닌 숨으로 몸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경지가 또 하나의 양생법인가봅니다.
    그나저나 춤 계속 해보시지....

  • 2023-06-19 10:37

    기린님하고 나이트 가야하나했는데 ㅋㅋ 명상적이네요. 실패담이라고 하기엔 알아차림으로 충만한 순간들이네요.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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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23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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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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