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불교산책13회]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요요
2023-06-11 09:09
385

부처님의 죽음, 완전한 열반

 

 

“아난다여, 그대는 나를 위해 쌀라 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한 침상을 만들어라,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니 누워야겠다.”(『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

 

아난다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침상을 마련했다.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며 누웠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을 불러 작별인사를 나누고, 제자들과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을 끝으로, 마음을 집중한 고요한 상태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옆으로 누운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롤로그: 부처님 없는 승가에 대한 암시

 

기원전 6~5세기, 부처님이 활동한 북인도 지역은 중앙집중적 왕권국가들이 벌이는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의 조직을 사라져가는 부족 공화국들의 운영원리를 간직한 이름, 상가라고 불렀다. 승가란 상가(saṅgha)를 음차한 말로, 구성원들의 토론과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모임을 의미했다. 승가는 중앙집중적인 복종과 명령, 통제가 아니라 수행자들의 화합과 자율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부처님은 승가의 조직자이자 지도자였지만, 자신이 승가를 이끈다거나 승가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처님에게는 승가의 열쇠를 건넬 후계구도도 의발의 전수도 없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제자들게 무엇을 남기고 싶어했는지 그 정수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에게 마가다국의 재상이 찾아와서 왕이 밧지족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길 수 있겠는지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화와 자비의 부처님은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부처님은 재상의 질문에 직접적으로는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등 뒤에서 부채질하던 아난다에게 “밧지족은 자주 모임을 갖는지, 일을 할 때 화합하는지” 물었다. 그렇다는 아난다의 대답을 들은 부처님은 밧지족이 자주 모임을 갖고 서로 존중하고 화합하며 일하는 한 밧지족에게는 번영이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부처님의 마음을 읽은 재상은 물러간다. 나는 이 대화가 부족 공화국들이 무력에 의해 흡수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토착적 삶의 방식을 오래도록 유지하기를 바라는 부처님의 진심이 담긴 응원이었다고 생각한다.

 

재상이 돌아가자 부처님은 수행승들을 불러 모아 승가의 운영원리를 재확인했다.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으로의 변화는 승가에도 영향을 미칠 터였다. 부처님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자주 모이고, 서로 존중하고, 화합하며 수행자로서 할 일을 다한다면 승가는 번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과 명예, 경제적 부유함이나 영토의 확장과 같은 세속적 번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냐하면 수행자들이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고 삼매와 통찰지를 닦는 정진을 계속할 때에만 가능한 번영이었기 때문이다. 『대반열반경』이 수행자들에 대한 당부를 프롤로그로 배치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도입부는 정복전쟁의 어두운 전조를 배경으로 부처님 없는 승가의 앞날을 암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월인석보 쌍림열반상(조선시대)

 

 

늙고 병든 부처님

 

승가의 수행승들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언제나 길을 떠나는 유행자로 살았다. 부처님도 다르지 않았다. 부처님은 전쟁을 준비하는 도시 라자가하를 떠났다. 그 발걸음은 마가다국 왕이 장차 정복하고자 한 밧지족의 땅을 향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마을로, 숲에서 숲으로 법을 설하며 이동하던 부처님은 베쌀리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우기를 만나 유행을 멈추고 3개월의 안거에 들었다. 안거 중에 부처님은 많이 아팠다. 옆에서 돌보던 아난다는 이러다 돌아가시는 것 아닐까 두려움에 떨었다. 다행히 질병을 이겨냈지만 몸은 눈에 띄게 노쇠해졌다. 빛나던 황금빛 피부도 사슴의 장딴지 같았던 강건한 다리도 없었다. 주름진 얼굴과 손, 구부정한 등, 힘없는 걸음걸이, 완연한 노인의 모습을 보고 아난다는 슬픔에 잠겼다. 부처님은 그런 아난다에게 말을 건넸다.

 

아난다여, 나는 지금 늙고, 나이먹고,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고, 노인이 되고, 만년에 이르렀다. 내 나이는 여든을 넘어섰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가 밧줄에 의지해서 계속 유지하듯이, 아난다여, 그와 같이 여래의 몸은 가죽끈에 의지해서 계속 유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가 일체의 인상에 정신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어떠한 느낌마저도 소멸하여 인상을 여의는 마음의 삼매에 들면, 아난다여, 그 때 여래의 몸은 지극히 안온하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라.(『대반열반경』)

 

부처님 역시 몸을 가진 인간이었으므로 늙고 병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은 젊은 시절의 치열한 고행 때문인지 자주 등이 아팠고 그럴 때면 제자들에게 설법을 맡기고 누워서 쉬곤 했다. 피곤할 때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에 들기도 했다. 그렇다. 제아무리 깨달은 부처라 해도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하고, 등이 아프면 누워서 쉬어야 한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한탄하고 우울에 빠지기 쉽다. 늙어서 변해가는 몸을 부정하고 혐오하고 감추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집중된 주의로써 살필 뿐이었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고,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고, 현상에 대하여 현상을 관찰했다. 부처님은 죽음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아난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

 

아난다는 처음에는 부처님의 말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 같다. 원치 않는 이별 앞에서 우리가 흔히 취하는 현실 부정의 태도였다. 그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더 오래오래 옆에 계셔 달라고 매달리며 간청했다. 아난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겠지만 부처님의 답은 쿨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했다.

 

“아난다여, 생겨나고 생성되고 형성되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을 두고 ‘부서지지 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반열반경』)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설령 부처라 해도! 그러니 헛된 기대를 접어라. 어떤 이들은 아난다가 좀 더 일찍 간청했더라면 부처님이 더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아난다의 뒤늦은 청원을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는가. 부처의 위대함은 생명의 질서와 우주의 법칙을 임의로 바꾸는 신통력이 아니라 어떤 욕망에도 매이지 않고 삶과 죽음의 진실을 꿰뚫는 통찰에 있는 것일진대.

 

간다라미술 양식 열반상

 

 

쭌다의 마지막 공양

 

부처님은 다시 노구를 이끌고 길 위에 섰다. 이 마을 저 마을을 거쳐 빠바에 도착했을 때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가 부처님 일행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부처님은 쑤까라맛다바를 들고 피가 섞여 나오는 이질에 걸렸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닥쳐왔다. 안거 중의 첫 번째 발병에 이어 두 번째로 죽음을 부르는 병에 걸린 것이다. 몸이 허약해지니 면역력도 소화력도 떨어진 결과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빠바에 머물지 않고 꾸시나라로 향했다. 밧지족 연합을 구성하는 씨족이 릿차비족과 말라족이다. 이미 베쌀리에서 릿차비족을 만났으니 이제 말라족을 만날 차례였다. 어쩌면 이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기에 말라족의 땅 꾸시나라로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선 그분에게는 생에 대한 탐착도 죽음에 대한 혐오도 없었다. 부처님은 알아차림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고, 강력한 집중상태인 삼매의 힘으로 몸과 마음의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열반의 장소인 꾸시나라로 향하는 그 걸음은 느렸다. 몸은 쉬 피로를 느꼈고, 자주 목이 말랐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맑은 물을 구해야 했고 편히 쉴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부처님은 아난다를 기다리며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좌선 상태로 깊은 선정에 들어 휴식을 취했다.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좌선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경지는 어느 정도의 수행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일까? 몸소 체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경지이리라.

 

드디어 말라족의 마을 꾸시나라 가까이 왔을 때 부처님은 까꿋타 강의 맑은 물에 목욕을 하고 목을 축였다. 그리고 강가의 망고숲으로 들어가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고 피곤한 모습으로 누웠다. 부처님은 아난다를 불렀다. 쭌다에게 전하는 말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아난다여, 누군가가 쭌다에게 “그대가 마지막으로 여래에게 공양을 올려 여래가 완전한 열반에 드셨드니, 그것은 참으로 이익이 되기 어렵다”고 회한을 일으킬 것이다. 아난다여, 쭌다에게 이와 같이 그 회한을 없애주어야 한다. “벗이여, 그대가 마지막으로 여래에게 공양을 올려 여래가 완전히 열반에 드셨으니, 그것은 참으로 그대에게 최상의 이익이 됩니다.” (…) “나는 세존 앞에서 ‘여래가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때의 공양과 완전한 열반에 드는 때의 공양은 동등한 공덕이 있다. 이는 다른 공덕을 훨씬 능가한다’라고 직접 들었습니다.”(『대반열반경』)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쭌다에게 남긴 자비의 말씀이었다. 부처님은 쭌다가 회한을 일으키고, 더불어 쭌다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분노와 미움 때문에 악업을 쌓을 것을 염려했다. 쭌다의 공양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 받은 수자타의 공양과 같은 공덕이 있다는 이 말씀을 듣고 누가 감히 쭌다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우리 중생들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을 만나면 원망과 분노를 터뜨릴 곳을 찾아내어 비난을 퍼붓고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 씀씀이는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처의 깨달음이란 바로 이런 마음의 역량이 아니겠는가? 중생은 원망과 후회로 복수와 원한의 씨앗을 심지만, 부처는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기에 세상에 평화와 자비의 씨앗을 심는다. 중생과 부처의 품격의 차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

 

아잔타 석굴 열반상

 

 

완전한 열반

 

열반(涅槃)은 빨리어 닙바나(nibbana),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를 옮긴 말이다. 번뇌의 불을 끈다는 뜻으로, 열반은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로 어떤 번뇌도 없이 마음의 평화와 지복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이란 어떤 지식을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전환,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도 명상 중에 간혹 번뇌가 사라지는 마음의 상태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찰나적으로 생겨나 찰나에 사라진다. 일시적 해탈이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변화라는 의미에서의 열반은 아니다. 그런 경험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 누구에게나 있음을 알려준다.

 

일반적으로 스님이 죽으면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열반은 죽음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의 죽음이 완전한 열반이 된 것일까? 부처나 아라한은 수행을 통해 몸을 가진 상태로 열반을 얻는다. 그 경우 번뇌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더라도 신체가 겪어야 하는 늙음과 질병마저 피할 수는 없다. 죽음은 살아서 해탈한 자가 신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사건이다. 그리하여 몸이 있는 상태의 해탈[유여열반(有餘涅槃)]과 몸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구별이 생겨났다. 무여열반으로서의 죽음이 완전한 열반이다.

 

깨달음은 즐겁고 복된 소식이지만, 죽음 즉 완전한 열반은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남은 자에게는 상실과 이별의 슬픔을 동반한다. 아난다는 스승과의 이별 앞에서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울며불며 몸을 구르고 땅을 치며 애통해 하는 제자도 있었다. 부처님은 자신의 죽음 앞에 담담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병들기 얼마 전 사랑하는 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앞에 대중이 가득하지만, 그들이 없으니 세상이 텅 빈 것 같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부재로 인한 쓸쓸함을 감추지도 않았다. 모든 죽음은 애도를 필요로 한다. 살아서 남은 자는 자신의 감정을 잘 추스르고 일상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출가수행자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부처님은 누구보다 자신을 돌보는데 힘썼던 아난다에 대한 위로도 잊지 않았다. 아난다가 넋 놓지 않고 수행에 힘쓰기를 바라는 스승의 애정어린 감사였다.

 

아난다여, 그대는 오랜 세월 안녕을 주고 안락을 주는 순일 무량한 자애로운 신체적 행위로, 자애로운 언어적 행위로, 자애로운 정신적 행위로 여래를 섬겼다. 아난다여, 그대는 공덕을 쌓았으니 정진에 몰두하라. 곧 번뇌를 여읜 님이 되리라.(『대반열반경』)

 

양산통도사 쌍림열반도

 

 

마지막 유훈

 

부처님의 죽음의 과정은 여느 죽음과 다르지 않다. 부처님은 늙고 병들고 피로하고 지친 몸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목이 마르다고, 몸이 피곤하다고, 누워서 쉬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참으로 담백하다. 부처님은 생명 연장을 꿈꾸지도 않았고 고통을 피해 서둘러 죽음을 앞당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통찰의 지혜로서 꿰뚫어 보았고, 두 차례의 심각한 질병을 앓는 와중에도 몸과 마음에 대한 명징한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았다. 깨달은 자로서의 삶이 그러했듯이 죽음에서도 그 여여함을 잃지 않았다.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가야 할 길을 가는 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부처님의 죽음은 어떤 아쉬움도 잉여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소멸이었다. 말 그대로 위대하고 완전한 열반이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지금 그대들에게 당부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었다.(『대반열반경』)

 

부처님처럼 죽으려면 부처님처럼 살아야 한다. 부처님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처님을 스승으로, 길의 안내자로 깊이 존경하며 따를 수는 있다. 나는 부처님의 유훈을 따르는 삶을 수행자의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댓글 3
  • 2023-06-12 11:34

    앗, 나도 대반열반경으로 글 한번 쓰려고 했는데...
    하여, 이 글을 읽어야 하는지 (읽으면 베끼게 될까봐...ㅋㅋ) 아니면 눈 딱감고 읽지 말아야 할건지
    하하, 그것이 문제로닷!!

    • 2023-06-12 17:19

      죽을 때까지 정진해라 했으니,
      읽었어도 읽지 않은 것처럼
      읽지 않았어도 읽은 것처럼 쓰면 될 듯요.......
      뭐래 ....ㅎㅎㅎ. 휘리릭.

  • 2023-06-15 13:39

    절에 가면 가끔 와불이 있어 궁금하던 차였는데 부처의 마지막 모습을 따온 건가 봐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기린
2024.05.10 | 조회 6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45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4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7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