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그들
천유상
2023-06-07 01:04
264
1.
“그리고 다른 부류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가 세고 주관이 뚜렷한 이들. 대차고 까다롭고, ‘집시의 음울함’을 풍기고, 탁월한 지성을 갖추었으나 세심하지 않고, 감성은 공격적이지 온화하지 않으며, 말투와 태도는 냅다 직설적이고, 우아함이나 겸손함 따위는 결여되어 있으며 아슬아슬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사나운 애착」, 비비안 고닉, 202쪽)
드라마 ‘닥터 차정숙’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늦은 나이에 병원에 취직하여 실수도 하고 좌절도 하며 녹록하지 않은 직장 생활을 버텨내는 주인공(차정숙)의 모습이 판타지 같지만은 않아서 공감하며 보고 있다. 나에게 주인공보다 더 눈길이 갔던 인물은 같은 과 선배이자 주인공 아들의 여자 친구 ‘소라’이다. ‘일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며 이러한 원칙은 후배 교육에서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jtbc. 닥터 차정숙. 인물 소개) 드라마 속 그녀는 주인공의 실수에 직설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그녀의 날카로운 질책은 온 병동에 울리고 이를 보다 못한 남자 친구(주인공의 아들)가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라’고 조언하자 ‘나는 잘하고 있다’며 돌아선다. 드라마의 전개 상 소라는 자신이 그렇게 다그치던 나이 많은 주인공이 남자 친구의 엄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텐데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가 궁금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거친 태도를 후회할 것인가? 그 상대가 시어머니인데’. 소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잠시 이불킥 하지만 ‘우리가 결혼할 사이도 아니고, 남자 친구의 엄마라고 해서 내가 달라져야하는지’ 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기에 신선했다. 왜 나는 시어머니라고 해서 그녀가 달라져야한다고 생각했을까?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전형적인 구조 안에서만 관계를 한정지었기에 다른 유형의 관계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못했다. 드라마 마지막 소라는 남편의 불륜 사실로 실의에 빠진 주인공에게 드라이브를 제안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그녀를 위로한다. 할 말을 솔직하게 다 하고야 마는 ‘기가 센’ 소라의 캐릭터가 처음에는 불편했다. 그것이 여성이기에 나에게 더 크게 다가왔을까? 아니면 그냥 성별에 상관없는 개인적인 호불호였을까? 오래 전 작은 이모가 나에게 ‘너 여자애가 왜 이렇게 고집이 세니’ 하며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고집 센’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묻기도 전 나는 그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했고 ‘나에게 무슨 단점이 있는 것일까’ 하며 고민했다. 수다스럽지 않거나 사교성이 없어서였을까. 고집 센 여성은 별로라는 것일까. 이모가 생각하는 여성은 어떤 이미지일까. ‘그들은 따지고 말대꾸하는 아내를 원하지 않는다’ (「사나운 애착」, 비비안 고닉, 204쪽) 는 비비안 고닉의 말처럼 나 역시 ‘그들’의 입장으로 ‘여성’의 자기 주장과 당당함에 대해 낯선 이질감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했다.
2.
“솔직히 말해봐요. 나랑 자고 싶었죠?”
“지유씨는 아니었나봐요?”
“전, 반반?”
뭐 이런 게 다 있지.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뭐 이런 게 다 있지.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75쪽)
이야기의 말미 남자 주인공은 지유 씨에게 거절 받는다. 함께 료칸도 가고, 공원도 가고 분위기가 다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지유 씨는 아니었다. 그러자 남자는 생각했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소설을 읽으며 나도 생각했다. 지유 씨가 남자 주인공에게 착각을 줄만한 행동을 한 건 아니었을까? 남자 주인공의 억울함에 동조하는 나의 시각이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그런 비슷한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로 임용이 되고 처음 근무지는 경기도 여주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풍물을 배우는 교사 동아리에 가입해 장구를 배우게 되었다. 동아리를 이끄는 남자 교사가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그는 미혼이었고 혼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장구를 더 가르쳐주겠다면서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여자 혼자 남자 혼자 있는 집에 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가 나에게 호감을 표시한다는 것에 대해 나도 싫지는 않았다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런 제안이 단지 호감만으로 그치리라는 것은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는 내게 장구의 리듬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은근슬쩍 나를 만지기 시작했고, 내가 그의 손을 쳐내며 싫다는 신호를 보내도 손길은 더욱 거세져 갔다. 급기야 나를 침대로 끌고 가 눕히는 상황에 이르자 나는 정말 있는 힘껏 그를 밀쳐내야 했고 울면서 그의 집을 뛰쳐나와야 했다. 그날 밤 나는 어떻게 나의 집으로 돌아왔는지, 그의 집 안까지 들어갔던 나 자신을, 그것도 단둘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여겼었는지 기억이 난다. 다음 날 내가 사과를 요구했을 때 그는 사과를 회피했던 것 같다. 나 혼자로는 사과를 받아내기 어렵다는 생각에 가까운 선배 여자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선배 교사는 그에게 교육청에 신고할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제야 그는 두려워하며 사과의 뜻을 건네왔다. 교육청으로의 신고는 나에게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비난은 나에게도 쏟아질 수 있었기에 나도 거기까지는 원하지 않았다. 이 일을 사귀었던 남자 친구도 알게 되었고 남자 친구는 그를 불러내 주먹을 날리며 분을 풀었지만 그 일은 남자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상처로 남았다. 남자 친구는 그의 집까지 단 둘이 들어간 나에게 실망감을 표했고, 그로부터 얼마 안되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건넸다. (물론 여러 다른 이유도 많았으리라). 애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성의 호감(그것이 순수한 호감인지, 아니면 같이 자자는 표현이었는지)에 반응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님 그가 나의 이런 모호한 마음을 이용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 일에 대한 나의 혼란스러움이었다.
3.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남편과 나의 달콤한 신혼 생활은 끝이 났다. 육아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온종일 어린 아이를 돌보는 일은 굉장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이었다. 육아를 통해 나는 그동안 몰랐던 나의 모습을 직면했다.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심한 기복을 보였다. 아이가 사랑스러워 정성을 다하다가도 어떻게 해도 달래지지 않는 잠투정, 음식에 대한 거부에 직면하면 젖 먹던 아이를 침대, 소파 위에 던져버리거나, 숨 막히게 꽉 껴안아 버리거나 접시를 던져버리는 등 충동적인 폭력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거칠게 대한 뒤 밀려오는 ‘실패했다’는 죄책감과 좌절감은 무겁게 나를 끌어내렸지만 나도 모르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화’, ‘짜증’은 그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제어하기 쉽지 않았다. 감정적인 기복은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분출되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는 자주 싸웠다. 아마도 남편이 문자도 없이 늦게 오거나, 아니면 아예 전화를 받지 않거나 그런 종류의 사소한 것들이었다. 나는 남편과의 싸움 도중 화가 나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물건을 던졌다. 아이의 장난감을 포함한 집 안의 물건들이 부서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서로를 때리는 육탄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편은 이런 나를 두고 ‘지랄맞다’고 했다. 그리고 숨 막힌다고 했다. 나로서도 남편에게 할 말은 있었다. 밤에 왜 나만 깨어서 아이를 돌봐야하는지, 공공장소에서 왜 나만 아이를 동동거리며 안고 다녀야하는지, 너는 회식하며 늦는 게 당연한데 나는 왜 매일 집에 있어야 하는지 등. 그 시절 남편과 나,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나의 힘듦만을 이야기하며 상대방이 왜 더 나를 ‘배려’하지 않는지만 따지고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좀처럼 표출하지 않았던 나의 공격성은 가장 가까운 나의 가족, 남편과 연약한 존재였던 아이들을 향해 맹렬히 뿜어져 나왔고, 나는 그 사실이 몹시 괴롭고 막막했다. ‘나는 정말 지랄 맞은 사람인가?’.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문제의 화살을 나에게만 돌리는 건 절망적이었다.
4.
‘조화롭고 온전한 여성의 모델, 즉 강하고 관능적이고 야심 있으며 자신의 다양한 욕구와 요구를 잘 파악하고 그 모든 욕구와 요구를 탐색할 수 있는 자유와 자원을 갖춘 여성의 모델을 제시해주는 문화에 살기만 했더라면 ~ 동시에 공 아홉 개를 공중에 띄우고 던지고 받고 해야 한다는 강박을 덜 느꼈더라면, 그리고 그 공들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토록 쉽게 자신을 비난하는 성향이 덜했더라면 (이하 생략)’ ((「욕구들」, 캐럴라인 냅, 298쪽)
글쓰기를 하며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어느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캐럴라인 냅이 표현한 조화롭고 온전한 여성의 모습이 이상적으로만 느껴졌고, 세상과 조화로우면서도 온전하다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 ‘공들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토록 쉽게 자신을 비난하는 성향이 덜했더라면’의 표현은 나에게 많이 와 닿았다.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남자가 나를 강제로 침대에 눕히는 상황에 나의 잘못도 들어가 있는지 아닌지를 고민할 때,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나의 감정이 부드러운 것만은 아닐 때 더 이상 나 자신만을 자책하거나 비난하지 않기를 바래본다. 내 안에서 나를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그들’을 이제 조금 덜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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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샘, 유상샘, 유상샘, 유상샘, 유상샘... 엄청난 공감 속에서 잘 읽었어요.
우리 여성들이 처한 이 모든 문제, 우리 대부분이 겪었던 이 모든 문제는, 옳고 그른 게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매번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구요, 그래서 읽고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