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 1234] 공동체 속 인간의 행복한 삶

토용
2023-06-01 22:15
270

공동체 속 인간의 행복한 삶

 

 

뜬금없는 행복

얼마 전 문탁 점심에 연잎밥과 장아찌를 비롯한 여러 반찬들, 디저트로 사과정과, 오디정과가 차려졌다. 동은이가 주방에 들어와 차려진 상을 보더니 “행복해!”라고 외쳤다. 순간 ‘별게 다 행복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꽤 무거운데, 동은이에게는 한없이 경쾌하고 가볍게 쓸 수 있는 말이라는게 신기했다. 동은이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연이어 나와 좀 의아했다. 윤리학 책에 갑자기 웬 행복론?

 

행복은 보통 처한 현실에 비추어 결여된 것이 충족되었을 때 특별하게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병이 들었을 때는 건강을 행복이라 여기고, 가난한데 로또라도 맞으면 최상의 행복을 느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예를 얻었을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뭔가 얻기 힘들고 어려운 것을 해냈을 때 느끼는 최고조의 감정 상태가 행복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소확행’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행복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소소한 만족, 기쁨과 같은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뭐가됐든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단순히 감정에 국한된 것이 아닌 인간의 삶에서 최종적인 목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이고 행복한 삶인가를 묻는다. 인간에게 좋음은 무엇인가?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 속에서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좋음이다. 좋음에는 그 자체로 좋은 것과 좋음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좋은 것이 있다. 부, 권력, 명예, 쾌락 등은 수단으로서의 좋음이지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 즉 최고선은 바로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소유한 상태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활동성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행복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지속적인 활동이다. 지혜로써 사리를 비춰보고 고요한 마음으로 삶을 음미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관조의 활동이 가장 즐겁고 자족적이며 완전한 행복이다.

관조적 활동은 인간의 모든 활동들 중에서 신의 활동을 가장 많이 닮은 것으로 가장 행복한 활동이다. 그리고 행복은 신이 내린 최선의 선물이다. 행복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eudaimonia인데, eu는 잘, daimon은 신적 존재를 뜻한다. 행복은 신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에우다이모니아에 그 의미가 그대로 들어있다.

 

행복은 미덕을 타고 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알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식물, 동물과 공통적인 부분을 빼면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 남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고유의 기능을 이성적인 원리를 따르거나 이성적인 원리를 내포하는 혼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인간은 자신이 가진 미덕으로 행위를 잘 수행한다. 인간의 좋음은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이며, 이러한 혼의 활동은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한다.

 

행복이 미덕에 걸맞은 혼의 활동이기 때문에 미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행복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미덕은 아레테(arete)로 탁월함을 뜻한다. 이정우 선생은 미덕의 일차적 의미가 영혼의 힘이라고 했는데, 행복을 영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영혼의 활동 즉 이성의 활동이라고 할 때 아레테의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미덕은 “그것을 지닌 것이 좋은 상태에 있게 해주고 제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미덕에는 지적인 미덕과 도덕적인 미덕이 있다. 지적인 미덕은 교육을 통해서 또는 성장함에 따라 생기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인 미덕이다. 도덕적인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다. 용기, 절제, 정의, 우애, 자제력, 자부심, 온유함, 진실성, 재치 등의 도덕적 미덕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본성적으로 받아들여 습관화해야 한다. 미덕들은 부단한 노력과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좋은 습관을 형성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기술자, 연주자가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기술과 연주력을 연마하듯이 도덕적인 올바른 행동도 자꾸 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다. (실천을 통해 습관화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동양의 쇄소응대와 굉장히 비슷한 것 같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아침에 또는 단기간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미덕의 원리, 중용

행복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활동이며 미덕에 걸맞은 고상하고 훌륭한 활동이다. 그런데 이 미덕들은 모자람과 지나침에 의해 손상이 된다. 음식을 먹을 때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적게 먹으면 탈이 나듯이 절제와 용기 등과 같은 미덕도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손상이 된다. 한마디로 과유불급.

 

이 미덕이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은 인간이 자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음 상태이다. 중용은 적정량, 적당함을 뜻한다. 지나침과 모자람이라는 두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예를 들면 두려움과 자신감에서 중용은 용기이다. 자신감에 지나치면 무모하고, 두려움이 지나치고 자신감이 모자라면 겁쟁이가 된다. 즉 무모함과 겁쟁이 사이의 중용은 용기가 된다. 재밌는 것은 돈에 있어서이다. 돈 거래에서 중용은 후함이고, 지나침은 방탕, 모자람은 인색이다. 그런데 돈에 관련된 미덕이 두 가지이다. 후함이 재물에 관련된 모든 행위라면 통 큼은 지출을 포함하는 행위들에만 적용된다. 비교적 규모가 큰 지출이다. 이런 미덕의 모자람은 좀스러움이고, 지나침은 속물근성・몰취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결코 재밌는 책은 아닌데 읽다보면 예상치 못한 웃음 포인트가 있다. 특히 여러 미덕들의 중용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다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세미나를 하면 굉장히 재밌을 것 같다.)

 

미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지만 중간이라고 해서 양쪽의 정 가운데가 아니다.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며 중간을 찾아야 한다. 중용을 알고 지키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 어려우면 두 악덕 중 덜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때로는 지나침 쪽으로 때로는 모자람 쪽으로 치우쳐봐야 중용을 지키고 좋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일단 뭐가됐든 미덕을 실천해라, 좌충우돌 고민하고 행동하면서 균형을 찾아라, 습관화 해라,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어려운 중용을 도와주는 미덕이 실천적 지혜이다. “건장한 사람도 시력을 잃으면 볼 수가 없어 돌아다니다가 크게 넘어지는데, 미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행위자가 지성을 갖게 되면 그의 행위는 아주 달라질 것이고, 진정한 미덕이 될 것이다” 지성이 바로 실천적인 지혜이며, 이성적이고 참된 마음가짐이다.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아닌 중간을 선택할 때, 이 중간은 올바른 이성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기능은 실천적인 지혜와 도덕적인 미덕이 결합될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미덕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실천적 지혜는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을 올바르게 해주기 때문이다.”

 

행복은 공동체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폴리스라는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를 중심에 둔다. 그가 말하는 개인도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일원으로서의 개인이다.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자 자족적이라고 할 때, 자족은 혼자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자족은 “그 자체로 삶을 바람직하게 만들며 아무것도 모자람이 없는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족은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에게 해당한다. 공동체 속의 개인이 미덕을 습관화하는 자기배려, 자기수양을 통해 공동체를 좋음의 상태로 만들고, 다시 개인의 좋음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어떤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문탁샘 글을 보니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꼴찌라고 한다. 만약 소확행 같은 행복이라면 행복지수가 이렇게 낮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개인중심 사회 속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따라서 행복은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많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행복지수가 꼴찌라는 것은 공동체 속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 중 하나가 우애이다. 그가 말하는 우애는 “인격체들 간의 상호적 태도”이다.(『서양철학사』 p.169) 우애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우정이라는 좁은 의미부터 부모 자식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도 우애로 특징짓고 있다. 사실 우애뿐만이 아니라 정의 등 다른 미덕들도 마찬가지이다. 미덕은 타인과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기반이 된다. 그러고 보니 동은이의 “행복해!”라는 외침은 우애의 미덕에 걸맞은 영혼의 활동이었다.

 

댓글 2
  • 2023-06-03 06:51

    내년에는 그리스 고전 읽기 세미나를 만들고 싶다는 토용샘, 그 바램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고대중국과 고대그리스를 교차시키는 읽기와 쓰기도 기대해봅니다~~

  • 2023-06-03 11:55

    저도 토용샘의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를 쿄차시키는 글을 기대합니다~^^ 토용샘 홧팅!!!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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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26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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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32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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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85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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