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읽읍시다 1회]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 허무와 의미의 변증법?

정군
2023-05-16 14:13
421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허무'는 생生의 옷을 입고 나타난 '죽음'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 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명함에 박혀있는 회사명과 직급,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소 등등, 각자에게 붙어있는 이런 '라벨'들을 모두 떼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우리는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전장의 그 어떤 장군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싸운다. 그러나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칼비노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는’ 기사 '아질울포'를 통해서 던지는 질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장과 유니폼을 벗어버린 후에도, 아무런 소속이 없어도 과연 자신의 '존재'를 붙잡아둘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아질울포는 일을 하거나, 전투를 벌이지 않을 때에는 작은 돌을 이용해서 열을 맞추거나, 빵쪼가리를 뭉쳐서 정렬된 도형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식이 흩어져 소멸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잠이 들지도 못한다. 의식의 중단은 곧 소멸이기 때문이다. 아질울포의 일과 휴식은 컴퓨터를 통해서 일을 하고, 쉬는 동안에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쇼핑, SNS에 몰두하는 현대인과 몹시 닮았다. '스마트폰을 하면서 쉰다'라고 하지만, 스마트폰을 오래볼수록 일한 것보다 더 피곤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행동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내가 진정 존재하는지 실감할 수가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상태를 견딜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노리고 들어오는 '허무'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질울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뭐라도 '해야만' 의식을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잠도 잘 수 없다. 잠들면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아질울포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모든 것을 망각 속으로 몰아넣은 아질울포의 하인 '구르둘루'다. 그에게는 '자아'가 없다. 식량을 배급하는 줄 어느 곳에나 그가 있다. 매번 이름을 바꾸고, 매번 다른 사람이 되어서 거기에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구르둘루'라는 것도 모른다. 단 한순간도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그는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는 아질울포의 거울상에 다름 아니다. 어느 곳에나 존재하나 자기 것이라고는 단 한순간도 갖지 못하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으나 매순간 '존재'를 자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쌍을 이루고 있다. '구르둘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나 존재하는 구르둘루, 월급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웃거리는 구르둘루, 매번 다른 인간이 되는 구르둘루, 단 한순간도 집중하지 못하는 구르둘루, 구르둘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구르둘루는 늘 '허무'를 피해서 다닌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허무'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이 또한 역설이다. 모든 의미를 집어삼키고 마는 죽음-허무야말로 '의미'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된다. 반대로 존재 자체가 허무인 아질울포는 생의 모든 것을 '의미'로 채운다. 이 극단의 사이에 랭보와 테오도라 수녀가 있다. 랭보는 '허무'와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기 증명의 열망에 가득찬 '젊음'을 상징한다. 그에게 인생은 '허무'를 향해 달려가는 행로가 아니다. 여느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얻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가, 그 다음엔 야망이, 그 다음에는 사랑이 그를 움직인다.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을 만개시키는 여름날의 나무처럼 그는 생의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전쟁터에서 우연히 만난 여전사 브라다만테에 대한 사랑으로 열병을 앓는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이 열망의 곁에는 어떤 허무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무의미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이다. 생의 허무 속에서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혹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이 있다면 그것은 청년 랭보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을 뚫고 올라와 비와 바람을 맞으며 커가는 나무. 나무는 자신의 성장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생도 나무를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모든 이야기는 테오도라 수녀(화자)의 기록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를 통해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기가막힌 형식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쓰지 않겠다. 알고보면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니까. 본문 페이지가 170여쪽 밖에 안 되는 '긴 단편'이니 읽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이 짧은 우화 속에 칼비노는 '인생'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 근본적인 허무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큰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배울 수 있을까?

 

"그도 배우겠지요…….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존재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거랍니다……."
168쪽

 

댓글 5
  • 2023-05-16 17:13

    170쪽이라 하니 솔깃해집니다. 허무와 우울이 의미를 위해선 필요한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3-05-16 20:52

    지난 겨울, 소설 읽고싶다고 할 때 정군님이 빌려줘서 읽은 책입니다. 빌린 책 돌려줘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읽고 싶은 분 있으면 한 바퀴 돌린 다음에 돌려줘도 되겠지요?^^ 아무튼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읽고 나서 인스타에 이런 글을 남겼더라고요.

    칼비노의 소설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떠올리게 하는, 오직 규정과 원칙과 질서로만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프와 그 대극에 있는 무질서, 무원칙, 무규정의 화신, 자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존재, 그래서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도 말해도 좋은 구르둘루와 그들 사이에 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 사이에는 본성상의 차이가 있는 걸까, 아니면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일까?
    -------------------

    한차례 싸움이 끝나고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묻으러 가서 의식-아질울프와 사물-구르둘루, 그 둘 사이에 놓인 불안한 현존재 랭보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질울프) 오 죽은 자여, 너는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되지 않을 시체로구나. 다시 말하면 넌 시체로 존재하는 거지. 그러니까 바로 이 때문에 가끔씩 우울한 순간이면 놀랍게도 난 존재하는 인간들을 질투한다. … 난 존재하는 사람들보다 수많은 일들을 훨씬 잘 할 수 있어. 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조잡함이나 부주의함이나 지리멸렬함 같은 결함 없이, 악취를 풍기는 일 없이 말이야.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흔적을 남길 수 있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는 것도 사실이야.

    (구르둘루) 시체야, 네게 부족한 게 뭐 있어? 이젠 네 몸에서 물이 흘러나와 거름이 되어 풀밭의 풀들이 햇볕을 받으며 점점 더 잘 자랄 수 있게 해 줄 거야. 넌 풀이 되고 풀을 먹은 젖소의 우유가 되고 우유를 먹을 어린아이의 피가 될 수 있어. 봐, 나보다 훨씬 더 멋지게 살 수 있지, 시체야?

    (랭보) 망자여, 살아있는 우리들에게나 죽은 당신들에게나 무덤에 가기 전의 이 하루하루가 존재할 뿐입니다. … 어쨌든 당신의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내 주사위는 아직도 요술 주머니 속에서 소용돌이칩니다. 망자여, 난 당신의 평화보다는 나의 불안을 사랑합니다.(70~71)

  • 2023-05-16 21:29

    읽어봐야지~ 감사합니다^^

  • 2023-05-18 19:05

    와 재밌어보여요^^
    근데 첨부된 사진들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 2023-05-22 09:29

    김영민 교수가 소식의 '적벽부'를 모티프로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썼던데 한번 읽어 볼까 하고 생각했더랬는데...
    이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ㅎ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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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79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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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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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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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7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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