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0회] 택수곤(澤水困), 뉘우치는 마음으로 가라

봄날
2023-04-22 18:40
377

주역의 4대 난괘 중 하나인 택수곤(澤水困)괘는 한 마디로 ‘결핍의 시대’을 상징한다. 이때의 결핍은 위는 연못이고 아래는 물인 곤괘의 물상이 변하면서 발생한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연못인데, 연못에 차 있어야 할 물이 아래로 다 빠져나가 버려 못이 바짝 말라있는 상태. 물이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연못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택수곤괘의 결핍은 곧 생명력의 결핍이다. 나는 그 모양이 정확하게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태파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수천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연 생태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곤괘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택수곤괘에는 그런 비극적인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있지 않을까? 나는 택수곤괘를 생태적 관점으로 읽어보려 한다.

 

인류문명은 택()에서 시작됐다

곤괘를 생태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연못을 뜻하는 ‘택(澤)’이라는 글자 때문이다. 주역의 괘는 여덟 가지의 자연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3획을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다. 여덟 개의 괘에서 표현하는 자연의 물상은 하늘(☰), 땅(☷), 불(☲), 우레(☳), 바람(☴), 물(☵), 산(☶), 연못(☱)이다. 이 물상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서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고 만든 것이 주역이니, 주역은 당연히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성괘 중에서 다른 괘의 물상은 뚜렷한데, 연못은 어딘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엄연히 있는데 굳이 같은 물을 머금고 있는 택괘(澤卦)가 또 다른 소성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연못, 즉 ‘택(澤)’이라는 글자가 가리키는 습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됐기 때문이다. 습지는 옛날에는 하늘과 땅, 불, 바람, 그리고 물에 견줄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성질과 능력(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유독 습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변한 것에는 까닭이 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이런 것이다. 인류 문명은 관개농업이 가능한 큰 강 유역에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부터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이다. 그러나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인류 문명은 습지에서 시작됐으며, 오늘날의 문명은 고대 사람들이 수 만년 동안 유지했던 ‘길들지 않은 자연’을 파괴한 위에 세워진 국가주의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초기에 인류가 모여 살기 시작한 곳은 습지였는데,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거의 전적으로 습지 자원을 이용했다. 습지는 수련이나 부들 같은 식물들 말고도 조개, 가재, 작은 포유류, 철따라 이동하는 짐승 등 주요 단백질 공급원들이 함께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습지는 사람들이 정착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주역에서 말하는 택(澤)은 고대사회의 수많은 동식물들이 그곳에 깃들어 살면서 의식주를 해결했던, 풍부한 생명력이 살아있던 습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초기 정착 촌락과 초기 도시생활이 습지에서 기원됐다는 사실은 왜 간과되었는지 묻게 된다...늪지, 소택지, 습지는 일반적으로 문명의 거울상으로 여겨졌다. (이것들은)길들지 않은 자연이고 인적미답의 땅이며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소택지와 관련해서 문명이 벌인 일은 바로 배수작업을 통해 잘 정리된 생산적 곡물 경작지와 촌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건조지대의 문명화는 곧 관개를 의미한다. 물이 찬 늪지대의 문명화는 곧 배수를 의미한다.”(제임스 C. 스콧 『농경의 배신』)

 

문명과 야만의 전도(轉倒)

습지에서 먹이를 구하던 개구리가 그곳에 알을 낳고 개구리가 부화되면 그것을 먹이로 하는 뱀 등이 습지를 찾아온다. 또 뱀을 잡아먹는 짐승들이 습지에 모여든다. 짐승들의 분비물이 습지 주변 식물들의 양분이 되어 풍성한 수풀을 구성한다. 하지만 택지에서 물이 빠져나가면 택지에 기댄 이 생태계가 파괴된다. 택지의 물이 마르는 순간, 먹이사슬은 깨지고,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는’ 불모지가 된다. 그러니까 벼, 밀, 보리 같은 곡물 중심의 농업이 온갖 채집과 수렵의 문화를 ‘야만’으로 딱지 붙이자, 온갖 생명의 보물창고였던 습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문명인가. 바로 그 문명의 이름으로 늪지대의 물이 빠져버린 모습이 정확히 택수곤괘 아닌가. 곤괘의 곤(困)이라는 글자는 나무(木)를 에워싼(囗) 모양을 가지고 있다. 나무의 성장이 어떤 방식으로 방해받아 어려움에 빠진 상태. 이때 곤괘의 어려움, 결핍은 원래 가지고 있는 힘이 가리워지거나 가로막혀 생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힘은 무엇이고, 그 무엇을 가로막는 것은 또 무엇일까.

 

곤괘의 괘사는 “곤은 형통하고 바르니, 대인이라서 길하고 허물이 없다. (그러나)말을 하면 믿지 않는다(困 亨 貞 大人吉 无咎 有言不信)”이다. 이때의 말(言)은 대인의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대인이면 길한데, 지금은 그 대인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곤괘가 처한 상황은 대인의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의 모습을 가리킨다. 생태의 관점에서 보자면, 곤괘의 괘사에 나오는 대인은 바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주체이다. 습지는 습지대로 온갖 생물들이 사는 형태를 보전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대기가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주체. 자연 그 자체이거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아닐까.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소인일 것이다. 곤괘는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대인과 소인의 싸움터이며 곤괘의 상황은 소인들에 가로막혀 대인의 힘이 발휘되지 못하는 사태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곤괘의 효사들은 그렇게 대인의 도가 소인에 가로막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미 물이 빠져버린 습지에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는 데 큰 곤란을 겪거나, 간신히 뿌리를 내렸다 해도 성장의 고통이 극심하거나 기계로 파헤쳐지는 습지에서 버티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늪이 머금고 있어야 할 물이 빠져나가 버려 생긴 이 사태는 소인들이 벌인 일의 결과이다. 이때 곤괘의 대인은 자연이다. 자연의 도(道)가 가리워지거나 방해받지 않으면 습지는 뭇 생명들의 안식처로 살아갈 수 있다.

 

자연이 하는 일

택수곤괘는 고난을 풀어나가는 대인은 자연, 즉 자기복원력을 지닌 자연이라고 말한다. 자연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 구오의 효사가 대변한다.

 

“코를 베고 발을 벰이니 적불에 곤하나 마침내 늦게는 기쁨이 있으리니, 제사에 씀이 이롭다.(九五 劓刖 困于赤紱 乃徐有說 利用祭祀(구오 의월 곤우적불 내서유열 이용제사)”

 

의월(劓刖), 즉 코를 베고 발을 베는 것은 고대 중국에서 행해지던 신체형의 일종이다. 여기서는 파괴로 인해 습지의 생물들이 당하는 온갖 상처와 피해로 읽힌다. 거대 발전담론에 의한 오늘날의 습지 파괴는 주역에서 말해지는 것 이상으로 전면적이다. 구오의 효사에 등장하는 붉은 앞장식, 즉 적불(赤紱)은 곤괘의 고난을 타개하는 주인공으로서, 긴 시간에 걸쳐 상터를 치유하고  새살이 돋게 하는 굳센 존재이다. 자연의 하는 일은 하나의 종, 또는 하나의 개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만물이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배치하는 일이다.

 

인간의 할 일, 치유의 말 하기, 뉘우치기

하지만 자연의 복원력을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 자연의 도와 손을 맞잡고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곤괘 상육의 효사는 제일 먼저, 우리가 자연에 대해 습관처럼 해오던 것들을 멈추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칡넝쿨과 위태로운 곳에 곤함이니, 동할 때마다 뉘우침이 있다고 말하며 뉘우치는 마음으로 가면 길하다.(上六 困于葛藟 于臲卼 曰動悔 有悔 征吉 상육 곤우갈류 우얼올 왈동회 유회 정길)”

 

갈류(葛藟)는 칡넝쿨, 얼올(臲卼)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모양을 뜻한다. 칡넝쿨처럼 마구 엉켜있어 도저히 풀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해법은 바로 ‘뉘우치기’이다. 왈동회유회(曰動悔有悔)는 곤괘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데 있어 구오와 더불어 ‘치유하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실제로 뉘우침에 이르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습관처럼 후회할 짓만 해왔다. 인간 생활의 편리함을 들어 밤을 낮처럼 밝게 만들고, 숲의 나무를 잘라 힐링하우스를 만들고, 늪에서 자라던 뭇 생명들을 앗아 유전자콩을 수확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해왔다. 이제 그 말을 바꿀 때가 되었다.

 

“우리는 세상이 파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보의 홍수에 둘러싸여 있으나, 세상에 어떻게 양분을 공급할지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다. 환경주의가 암울한 예언과 무력감의 동의어가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로빈 월 키러머 『향모를 땋으며』)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동안 환경주의라는 스스로의 틀에 갇혀 비관과 상실감만 재생산해왔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치유의 말’을 하는 것이다. 지난 ‘414기후정의파업’은 그 규모나 언론 노출빈도에 상관없이 ‘치유의 말’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속삭임이라도 절망이 아닌 희망을 길어내는 말을 하면서 ‘뉘우침’에 입각해 하나씩 행동에 나설 일이다. 극한으로 치닫는 생태파괴 뿐 아니라, 이 땅위에 사는 인간의 기본권과 공공성의 가치가 묵살되고, 불공정, 부정의가 만연한 사회가 언제까지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후회의 말을 하고 후회하는 마음을 두라(曰動悔 有悔).” 곤괘의 상육은 분명 우리에게 그동안의 안일함과 자괴감의 시간을 뉘우치고, 스스로를 회복하는 자연과 함께 인간의 회복을 위해 나아가라고 말한다.

댓글 6
  • 2023-04-23 07:07

    인류의 문명은 '택'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새삼 다시 다가오네요.
    그리고 또다른 '택'에서도 우리의 태도를 볼 수 있겠지요. 뉘우치는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 2023-04-23 12:52

    택수곤괘를 생각하며 최근 황윤감독이 찍은 영화 <수라>를 같이 보고 싶습니다.
    <수라>는 또 다른 습지인 새만금의 수라갯벌을 찍은 영화입니다.
    6월에 개봉한다는데.. 이곳저곳에서 공동체상영을 하더라고요.

    • 2023-04-23 18:24

      내가 청량리한테 여러번 이야기했는데, 필름이다에서 공동체상영좀 추진해보라구...... 쩝!!!

  • 2023-04-23 18:23

    김산하의 <습지주의자>도 좋아요.^^

  • 2023-04-24 09:36

    습지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요...

  • 2023-04-26 07:29

    습지...... 관광지로만 생각해온 무지한 1인 입니다.
    뉘우치는 '택수'곤을 보니 거꾸로괘인 절제하는 '수택'절도 생각나네요.
    너무 잘읽었습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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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26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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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32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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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5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85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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