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과 장자>1회 양생을 위한 지식

기린
2023-04-11 08:39
441

양생을 위한 지식

기린

 

 

 

  양생(養生)을 탐구하는 기획 세미나를 4년째 하고 있다. 그간 양생과 관련해서 동서양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읽었다. 구체적으로 양생을 정의하는 텍스트도 있었고, 현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담론을 통해 내 삶과의 연관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양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여전히 막연하다. 양생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보고 싶었다.

 

  양생(養生)의 원출전은 『장자』 내편 중 「양생주」편이다. 직역을 하면 삶을 기른다, 가꾼다 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태어난 생명을 둘러싼 모든 보살핌을 포함하여 삶을 지속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영양도 섭취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알아가는 지식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양생주」 첫 장에서는 지식의 위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양생과 지식의 관계에 어떤 위험이 있을까? 나아가 양생을 위한 지식은 어떻게 터득하는 것일까?

 

 

삶을 위태롭게 하는 지식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지만 지식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러니 지식을 좇는다면 삶이 위태로워질 뿐입니다.(吾生也有涯,而知也無涯.以有涯隨無涯,殆已.已而爲知者,殆而已矣.「양생주」 1장_낭송장자)

 

 

  삶을 잘 가꾸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를 찾기 위해서다. 곧 삶을 위한 지식이다. 하지만 지식은 삶만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차츰차츰 자신이 속한 세계를 파악해나간다. 그 세계에 대해 지식이 쌓일수록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확장된다. 하지만 지식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 그 가능성은 삶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지식의 확장에 집착하게 되기도 한다. 지식 자체가 새로운 앎을 향한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을 향한 욕망을 좇다가 정작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쓸 에너지가 부족하게 된다. 장자는 이렇게 지식을 위한 지식의 추구가 유한한 삶의 양생을 위험하게 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장자』의 다른 편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천지」 편에 기심(機心)에 관한 고사가 나온다. 직역을 하면 기계에 관한 마음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시골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한 노인이 직접 우물을 파고 항아리에 그 물을 담아 밭으로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공은 기계를 사용하면 힘은 적게 들이고 얻게 되는 효과는 더 크다고 알려 주었다. 노인은 성을 냈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하면, 기계를 쓰게 되면 기계에 온 마음을 기울이게 되기에 이르러 스스로 해내고 만족하는 순박함을 잃게 된다고 했다. 그러니 기계를 몰라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빠지게 되는 부끄러움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직접 몸으로 해내는 것 보다 기계를 이용해서 우물을 파고 물을 길어 올려 밭에 주는 것이 수월하다. 그 결과로 여유를 얻게 되면 그 시간을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하는데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스승은 기계를 쓰게 되면 기계에 마음을 빼앗겨 그럴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몸을 써서 직접 성취하는 만족보다 기계로 인한 만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 큰 만족을 좇는 지식에 의존하게 될 것이며, 몸은 그 일에서 점점 소외되어서 스스로 만족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기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기계가 주는 효과에 매몰되어 무한히 뻗어나가도록 부추기는 지식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노인의 성찰

 

  「천도」 편에는 지식을 “옛사람의 찌꺼기”로 보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차의 수레바퀴를 깎는 노인이 대청 위에 앉아 글을 읽고 있는 제후에게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후는 “성인의 말씀”이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이미 죽고 없는 성인의 말씀을 가리켜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것이다. 제후가 화를 내자, 노인은 자신이 평생 바퀴를 깎는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을 밝힌다.

 

  즉,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많이 깎아서 몸체에 헐거워지지도 너무 꼭 맞게 깎아서 빡빡해지지도 않는 상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손으로 터득하면서 마음으로 느낄 뿐”이었다. 노인이 습득한 지식은 직접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터득된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설령 자식이라 할지라도 설명해줄 수 없다. 스스로 바퀴를 완성해서 수레가 제대로 굴러가는 것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은 평생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의 말씀 또한 생전에 시대 상황의 맥락을 충분히 숙고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지식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보여 졌을 것이다. 그 실천이 일으키는 효과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인으로 받들어졌을 따름이다. 그런데 제후가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성인의 말씀이라는 이유만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찌꺼기에 불과하다. 찌꺼기인줄도 모르고 읽는 것도 모자라 백성들에게 적용시키려 한다면 결과적으로 제후도 백성들도 모두 위험에 빠진다. 마치 맞지 않는 바퀴를 끼워서 굴러가는 수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삶을 위한 지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할까?

 

 

 

 

온전한 삶을 위한 지식

 

 「달생」 편에는 악기를 걸어 놓는 거(鐻)를 만드는 목수가 자신이 일을 실행하는 과정을 밝히는 이야기가 나온다. 목수는 거를 만들 때는 자신의 기(氣)를 소모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일에 집중한다. 벼슬을 하겠다는 욕망이나 훌륭한 작품으로 칭송을 받겠다는 생각들이 생겨났다 사라져서, 어떤 것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경지를 터득할 때까지이다. 그러고 나서야 산으로 올라가 거를 만들기에 적합한 나무를 고른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일 때에야 수많은 나무들 속에서 거를 만들기에 딱 적합한 나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목수는 거를 잘 만들어낼 때 목수로서의 명성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명성을 바라는 마음부터 일어나게 되면 그만큼 일에 쓰이는 에너지가 줄어든다. 그래서 목수는 명성을 향해 내달리는 마음의 에너지를 돌이켜 일을 하는 몸에 쌓이도록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일과 관련하여 이러한 인식을 실천하는 행위, 이것이 온전한 삶을 위한 지식이다. 곧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몸을 닦아서 일하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지식이다.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하는 양생을 위해 필요한 지식은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지향한다. 『장자』에 나오는 이러한 일화의 인물들이 실제로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들인 것을 보면, 장자는 전국시대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로 인해 초래된 지식의 위험을 밝히고 있다. 마음에서 생겨난 욕망을 좇느라 실천과 분리된 지식은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계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기심이 발동하는 순간

 

  일리치약국 초창기에는 한약을 달여서 일일이 계량을 해서 파우치에 담은 후 한 봉지씩 가정용 필름용접기로 꾹꾹 눌러서 포장을 했다. 파우치에 닿는 열이 조금만 세도 윗부분이 잘려 버리고, 약하면 달라붙지 않았다. 포장할 때는 붙어있었지만, 택배로 보내는 사이 미세하게라도 떨어지면 한약이 새서 엉망이 되었다는 클레임을 받았다. 그래서 한약을 계량해서 넣고 필름용접기로 누른 다음에도 제대로 붙었는지 일일이 재확인을 했다. 그래도 간혹 같은 문제가 발생해서 논의 끝에 한약 포장 기계를 들여놓았다. 기계의 계기판에 파우치에 넣을 양과 개수를 입력하면 한 봉지씩 계량되어 말끔하게 포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기계의 작동 원리에 익숙지 않아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조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드디어 제대로 포장된 파우치가 나왔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포장을 하면서 들였던 품은 확실히 줄었고, 약 한 재를 포장하는데 족히 30분은 걸렸던 일이 5분이면 해결되니 한결 몸이 편해졌다. 기계 앞에 앉아서 포장되어 나오는 파우치를 정리하며 이 약을 복용한 이들에게 효험이 있기는 바라는 여유도 생겼다. 그것도 잠깐, 점점 그 5분이 무료해졌다. 그러자 포장 일을 마치고 연이어 해야 할 일들로 마음이 내달렸다. 세미나 책 읽기, 다른 활동이나 회의 준비 기타 등등으로. 그러면 급해진 마음에 기계 앞에서 벗어나 남은 일들을 처리했다. 포장이 끝났다는 알림음을 듣고 돌아와 보면 뜨거운 파우치들이 마구 엉기고 흐트러져 쌓여 있었다. 그러면 파우치 포장이 구겨진 채로 택배를 보내야 했다.

 

  일하는 환경의 변화로 생긴 여유에 만족하는 기간은 매우 짧았다. 연이어 마음은 기계가 주는 편리함에 매몰되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다른 데로 옮겨가고 만 것이다. 이렇게 일어나는 마음이 기심(機心)이다. 기심이 일어나자 지금 몸이 하고 있는 일에 무관심해지는 소외가 발생했다. 파우치가 엉기고 구겨져도 상관없이 내일 세미나를 위해 읽어야 할 책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습득하는 지식이 온전한 나의 삶을 위한 지식이 될까. 온전한 삶을 위한 지식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내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고 집중하는 데서 터득된다. 5분의 여유에 집중하기, 내 몸이 하는 일과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내달릴 마음의 상태를 가라앉혀 양생을 위한 지식을 익히는 시간이다.

 

 

 

댓글 6
  • 2023-04-11 13:42

    이 글을 읽으니, 시간을 단축해주는 자동차, 공부를 가능하게 해주는 노트북을 생각해보게 되네. 자동차, 노트북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 2023-04-11 17:21

    멀티 태스킹을 잘 못하는데도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 번에 한 가지일을 하는 게 어려운 세상입니다. 5분이라도 온전히 몰두한다면 명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화장실에 휴대폰 안들고 가기부터 ㅋ.

  • 2023-04-11 19:33

    5분동안 파우치멍 하심이 어떨지..^^

  • 2023-04-17 09:12

    기계와 딱 붙어 사는데 기심을 어떻게 안 일어나게 하나 ㅠㅠ
    양생이 어려운 시대에 사네요

  • 2023-04-17 16:46

    몸과 마음의 분리가 어떻게 되나 싶지만 실제로 그런 시간이 하루 대부분인 경우가 많아요..우리 참 희한하게 살고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 2023-04-19 07:42

    저두 몸으로 하는 일에서 맘이 달아나려고 할 때가 많아요. 자꾸 시계를 확인하게 되죠. 그게 '기심'이군요. 기억할게요. 그리고 그때마다 전 되뇌여야겠어요. '지금 하고있는 일에 온맘을 두자.'라고^^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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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30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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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5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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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60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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