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7회] 충치 같은 지리멸렬한 삶 / <오발탄(1961)> - 한국고전영화_03

청량리
2023-04-09 20:00
418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충치 같은 지리멸렬한 삶

<오발탄>(1961) | 감독 : 유현목 , 주연 : 김진규, 최무룡 | 107분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영화 <오발탄>(1961)은 어느 가족에 대한 짧은 이야기지만, 오랫동안 암울함이 지속됐던 당시의 사회모습을 짜임새 있게 보여준 유현목(1925~2009) 감독의 수작이다. 영화 <오발탄>이 한국 고전영화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건, 동명의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유현목 감독의 진지하고 풍부한 디테일이 잘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실주의적인 관점이 잘 드러난 영상미는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자전거도둑>(1948)에도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린다. 허나 대부분 멜로드라마와 스릴러, 액션영화 등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던 점을 고려한다면, <오발탄>은 촬영기법이나 내용, 장르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의 제작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개봉됐다가 이듬해 5·16 군사정권 하에서 3년 간 상영이 금지된 바 있다. 노모가 가자는 곳이 ‘북’이라는 이유다. 제작비가 없어서 당시 조명감독이었던 김성춘이 사비를 털어 겨우겨우 필름을 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60년대 초, 당시 전후 한국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서민들의 삶은 직격탄을 맞았다. 내가 살던 고향은 더 이상 '꽃 피는 산골'이 아니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넋 놓고 있었고, 기반시설이 전부 무너져 일자리도 없었다. 월남한 실향민과 집 없는 피난민이 뒤엉켜 값싼 노동력이 무제한으로 제공되던 시절이었다.

시내에는 ‘짚차’가 돌아다니고 회계사를 둘 정도로 재산관리를 해야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판자로 지붕을 얹고 거적으로 대문을 대신한 집에 사는 이들이 도시 속에 공존했다.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에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았으나, 커져가는 상대적 빈곤 속에 돈 없는 설움은 극에 달했다. 그 시절, 가난에서 자국민을 구한 이가 ‘박정희’라 평가받으니, 5.16 군사쿠데타가 누군가에게는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다.

 

 

가자, 어떻게?

어두운 골목길 ‘스탠드빠 서라벌’의 간판 아래로 오늘도 군복 입은 사내들이 휘청거린다. 그들은 ‘육이오 때 쓰고 남은 잔재’인 상이군인들이다. 영호(최무룡)의 옆구리에는 총상이 남아있고, 그의 친구 경식은 절름발이가 되었다. 정부는 그들을 국가영웅으로 칭송했으나, 현실은 전쟁에서 손상을 입은 피해자, 장애인이라는 인식과 차별이 존재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곳에서, 더군다나 불구가 된 그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해 지난 군가나 부를 따름이다.

비틀거리는 영호는 집 앞에서 그의 형, 철호(김진규)와 마주친다. 충치를 뽑으러 갈 여유도, 돈도 없이 언제나 일그러진 얼굴로 ‘남의 재산이나 계산해주는 일’을 하는 철호. 영호는 그의 형이 못마땅하지만, 철호의 손에 딸린 식구가 자신을 포함해 여섯이다. 실성한 어머니, 만삭인 아내, 영호, 여동생 명숙, 막내 동생 민호와 딸아이. 그러니 꼬질꼬질한 잠자리에 몸을 구겨 넣는 수밖에 영호도 달리 방법이 없다.

제대 후 안 해 본 게 없는 영호, 그러나 곰은 커녕 아직 ‘토끼 한 마리’도 손에 넣질 못했다. 영호는 괜히 은행 앞을 서성거린다. 그는 “허수아비를 비웃는 까마귀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 즈음, 우연히 만난 간호장교 오중위의 집에서 권총 한 자루를 발견한다.

 

우물물로 타는 목을 축이던 영호(좌측, 최무룡)는 형 철호(우측, 김진규)와 마주한다. 영호는 형을 존경하지만, 그의 삶을 따라하고 싶진 않다.

 

 

가자, 누구와?

한편, 영호의 친구인 경식은 동생 명숙(서애자)과는 연인 사이였다. 경식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명숙은 그에게 결혼을 재촉한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벌써 2년이 지났으나, 경식은 명숙을 향해 제대로 걷질 못한다. 그를 향한 사랑의 미련도 있겠으나, 명숙은 서둘러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미칠 수 있어요?”

그러나 경식은 불구가 된 자신을 용납할 수도, 기다리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명숙에 대한 사랑보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키운 ‘자폐’에 가까웠다. 전쟁으로 불구가 된 건 그의 신체뿐만이 아니었다. 명숙은 결국 스스로 돈을 벌어서 이 집에서 나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그녀가 가진 유일한 밑천은 자신의 몸, 뿐이었다.

어느 날, 철호가 일하는 계리사(회계사) 사무실로 전화가 한통 온다. 그의 누이동생 명숙이 서울중부경찰서에 있단다.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던 명숙은 경찰서에서 그의 오빠 철호와 마주한다. 그러나 무능력한 철호는 동생에게도 특별히 해 줄 말이 없다. 훈방조치 된 명숙은 철호와 함께 경찰서를 나와 서로 멀찍이 떨어진 채로 길을 걷는다.

카메라는 철호를 앞에 두고 길 건너편의 명숙을 함께 보여주며 그들의 걷는 속도에 맞춰 따라 움직인다(트래킹샷). 이도저도 아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대사 없이 눈빛과 표정만으로 연기하는 김진규 배우와 유현목 감독의 절제된 연출력 역시 돋보이는 이 장면은 한국고전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철호에겐 자신을 희생해 돈을 버는 명숙에게도, 사회구조 속의 희생양이 된 영호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여유가 없다. 가족이 해체되고 공동체가 무너진 그런 세상에서 철호가 지켜야한다던 ‘양심과 윤리’란 무슨 소용이냐고 영호는 묻는다. 그렇다. 그건 어쩌면 공동체의 ‘신뢰’ 안에서만 작동하는 원리인지도 모른다.

 

“형님 어금니만 해도 그래요. 푹푹 쑤시고 아픈 걸 견딘다고 절약이 되나요? 지긋지긋하게 살아야 하니까 문제죠. 왜 우리라고 좀 더 넓은 테두리까지 못 나가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왜 우리만 이 좁은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 해요?”

 

경찰서를 나와 명숙(좌측, 서애자)과 철호는 나란히, 그러나 따로 멀찍이 떨어져서 걷는다. 카메라는 그 둘을 말없이 따라간다. 

 

 

가자, 어디로?

영호의 질문을 “마음 한 구석이 비틀려서 하는 억지”같은 말이라고 철호는 외면한다. 그러나 어차피 현실은 오중위와 함께 투신자살한 시인의 말마따나 “열편의 시마저 채워 줄” 여지조차 없는 메마른 세상이 아닌가. 오히려 철호야말로 ‘양심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피폐하고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려는 건 아닐까?

영호의 은행강도는 동료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붙잡힌 동생을 만나러 철호는 또다시 경찰서로 찾아간다. 그러나 영호 앞에서 역시 아무것도 해줄게 없는 철호는 얼굴만 바라보다 말없이 뒤돌아 나간다. 설상가상으로 만삭인 아내는 둘째를 낳다가 그만 죽게 된다. 허망하게 죽은 아내도 차마 볼 수가 없는 그는 영안실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병원 밖으로 나온다.

먹고 살기 위해 여동생은 ‘양공주’가 되고, 또 다른 동생은 ‘은행강도’가 되어 버린 세상. 더는 못 참겠다. 차라리 나에게 더 많은 고통을 다오!! 철호는 지긋지긋한 충치 두 개를 뽑아내고 과다출혈로 택시 안에서 정신을 잃는다. 어디로 가냐는 택시 기사의 물음에 그의 어머니처럼 ‘가자’는 말만 되풀이 한다.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철호의 죽은 아내가 낳은 둘째아이 앞에서 명숙은 다시 일어서길, 다시 웃으며 살길 다짐하지만 어쩐지 되풀이되는 영호의 거짓말 같아 씁쓸해진다. 저들의 형편이 절대로 풀리지 않을 답답함에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딘지 가긴 가야 하는데...”

 

죽은 아내와 경찰에 잡힌 동생을 뒤로 하고 택시에서 정신을 잃은 철호. 가긴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1960~70년대 기록필름들은 많다. 너무나 생경한 모습에 그저 멀리 떨어져 ‘관객’이 될 뿐이다. <오발탄>은 그 판자지붕을 걷어내고 그 안에 ‘리얼한 삶’의 모습을 담았다. 그러자 카메라가 안으로 훅 밀고 들어온다. 그래서 송철호 가족의 삶을 떨어져서 바라만 보긴 어렵다. 감각의 확장과 생각의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고전’은 시간이 지나도 우리에게 그런 ‘상상력’을 제공해 준다. 영화 <오발탄>도 그러하다.

 

댓글 6
  • 2023-04-10 14:21

    소설 <오발탄>도 짧지만 강렬했고, 영화도 예전의 흑백영화지만 그러했다. 상황이 강렬해서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이 강렬함은 옅어지지도 않는다.

  • 2023-04-11 10:22

    문탁에 처음 온 2009년?
    이 영화를 보았지...

    아ㅡㅡ 세상 갑갑한 이 영화를...

    요요.문탁.인디안.파랑. 아마 새털(지금 겸목)과 같이

    그 시절 서울시내를 보여주던 영상도 새로웠는데 ㅋㅋ

    • 2023-04-12 09:20

      옹기종기 모여 앉아 60년대 영화보던 시간이 떠오르는군요.^^
      OTT 없던 시절, 디비디 가져와 틀었겠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격세지감을 느낍니다.ㅎ
      그런데 60년도 더 된 이 영화 <오발탄>은 지금 청량리에게 너는 가는 곳이 어니냐고 묻나 봅니다.

      • 2023-04-23 18:27

        디비디...아닐 거에요. 제 기억엔 영상자료원인가에 회원가입해서 돈주고 스트리밍 한 것 같은디...

    • 2023-04-23 18:30

      미경이도 있었시유^^
      https://moontaknet.com/?page_id=228&mod=document&pageid=1&keyword=60%EB%85%84%EB%8C%80+%EC%98%81%ED%99%94&ddd=da&uid=1571

  • 2023-04-17 16:56

    오발탄, 김진규의 절제된 연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최무룡이 내뱉던 말들에 깊은 숨을 쉴 수밖에 없기도 했고..
    충치를 빨리 뽑기라도 하지ㅠㅠ

한문이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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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3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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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16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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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61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5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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