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나는 어쩌다 명상에 입문했나
요요
2023-01-10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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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문탁에서 불교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불교 공부도 철학 공부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10년은 불교세미나를 계속 함께 할 친구들을 찾고 있다. 불교를 공부하는데 철학공부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듦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존엄하게 늙는 길을 찾고 싶다.
명상적 삶, 일상의 영성, 공동체와 영성, 나이듦과 영성이 풀어야 할 화두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쩌다 명상에 입문했나
아침 6시 20분에 눈을 떴다. 자동적으로 핸드폰으로 손이 간다. 카톡이 여러 개 와 있다. 어제 저녁 자기 전에 침대에 앉아 명상할 때 까톡까톡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게 그제서야 기억이 난다. 자기 전에 잠깐이라도 명상을 하면 진짜 잠이 잘 온다. 어젯밤에도 명상 덕분에 아무 생각 없이 스르륵 잠이 들었나 보다. 카톡을 읽기 위해 더듬더듬 돋보기를 찾다가 이건 아니지 싶어 멈추었다. 카톡을 읽다 보면 또 다른 연관 검색어들을 찾아 인터넷 세상 어디를 헤매게 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나서 옷을 챙겨입고 작은 방으로 가서 명상 방석 위에 앉았다. 나의 아침 루틴이다. 아침마다 명상을 시작한 게 2019년 초부터이니 4년을 꽉 채웠나보다. 늦잠을 자거나 바쁜 일이 있으면 명상을 건너뛰는 날도 많다. 하지만 4년전부터 어쨌든 가능한 매일 명상을 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 밥먹을 때 먹을까 말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매일같이 꾸준히 명상하는 게 나의 목표다.
봉옥샘에게 얻은 나의 명상방석
부처님이 가르친 명상법이라고 하는 위빠사나를 접하기 전부터 나는 명상 비슷한 것과 인연이 있었다. 처음 시작은 단전호흡이었다. 인천에서 노동운동하던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는 남편이 단전호흡을 하자고 권유해서 그걸 배운다고 새벽에 일어나 멀리 서울까지 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방하선원인지 방하도장인지 하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그 때는 그 뜻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방하가 나름 의미심장한 말이라는 것은 나중에 불교공부를 하면서 알았다. 선수행에서는 방하착(放下著)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방하착이란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뜻으로 방하는 거기에서 유래한 것이었던 듯. 길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나에게 수행이라는 걸 생각하게 한 최초의 수련이었던 셈이다.
90년대 초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노동운동을 떠나 남들처럼 직장도 다니며 아이 키우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 돈벌이가 괴로웠다. 이 세상을 뒤집는 혁명을 꿈꾸며 살다가 자본주의 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각자도생의 경쟁적 삶을 살려니 이념과 실제 생활의 괴리가 너무 컸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곪아 들어가는 현실 부적응자로 거의 십년 가까이 살면서 나는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 알 수 없는 분열을 견디고 있었다. 혹시 부자가 되었으면 내적 분열을 극복하고 그 달콤함에 젖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끝내 현실의 나와 화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밥을 벌어야 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현실과 화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90년대는 바야흐로 심리학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와중에도 집단상담 프로그램과 MBTI 워크샵, 애니어그램, 심성수련 프로그램들과 같은 힐링판을 기웃거리면서 숨 쉴 구멍을 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단지 미봉책일 뿐이었다. 일시적 충전으로 잠깐씩 반짝하기는 했지만 결국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밥이 모래 알갱이처럼 서걱거리더니 힘이 쑥 빠져 나갔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제야 병이 났다는 핑계로 일을 그만 둘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다. 병이 나기 전에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몰랐던 때였다. 쉬는 동안 단전호흡도 하고 요가도 하고 108배도 했다. 심지어 뜨개질도 했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수행의 세계와 접했고 우연히 인연이 닿아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월정사 아래 명상마을에서
본격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배운 것은 21세기 초였다. 불교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미얀마에서 공부하고 와서 선원을 열어 위빠사나를 가르친다는 스님의 기사를 읽고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서 초보자를 위한 위빠사나를 배웠다. 수행처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명상을 할 때면 편안하고 좋았다. 마침 그즈음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올인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을 하는 것에 재미를 느껴서였는지, 명상을 해서 그런 것인지 나도 잘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 삶에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하기 싫은 일도 그만두고 좀 의미있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때에 심각한 가정경제의 위기가 왔다. 남편의 사업이 망한 것이다. 경제적 위기도 버거웠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춘기를 맞은 아들이 담배, 술, 삥땅 등 요즘 같으면 학폭이라 불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반듯한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터라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윤리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지금 생각하면 담배가 뭐 어때서, 술이 뭐 어때서 싶은데 말이다. 삥땅은 다른 문제이지만) 리버럴하게 아이를 키워서 그렇다는 둥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모욕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를 괴롭힌 건 다름 아닌 내가 만든 아상(我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의식이었다.
그럴 때 명상이 의지처가 되었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알아차리라고 했다. 방하착하기 위해 앉아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나를 괴롭히던 자의식이 엷어져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들이 친 숱한 사건 사고가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쉽게 아상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 보면 세상 일에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는게 분명하다. 좋은 것인 줄 알았던 것이 나의 괴로움을 증장시키는 조건이 되고, 나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인 알았던 일이 나를 구원하는 동앗줄로 변신하기도 하니 말이다.
아들이 한참 속썩이던 시절 집중명상을 간 적이 있다. 일주일인지 열흘인지 묵언하며 명상하던 중에 엄청난 희열이 느껴졌다. 아, 이런 것이구나! 이러다 내가 거의 깨닫게 되는 건 아닐까, 기뻤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어찌나 명상이 잘 되는지, 명상 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고 스스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이제 아들이 어떤 짓을 해도 마음이 고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집중명상이 끝나고 선문을 나서는 순간 그동안 잠잠했던 온갖 마음의 소리가 시끄럽게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며칠간 꺼놓았던 핸드폰을 켜자마자 나는 산사의 집중수행으로부터 멀리멀리 멀어져 갔다. 명상 후의 나는 이전의 나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부처님이 처음 출가한 후 웃따까 라마뿟따와 알랄라 깔라마에게 선정을 배운 뒤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왜 고행의 길로 나섰는지 아주 쪼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 또한 부끄럽다.^^) 아무튼 그 이후에도 마음이 시끄러울 때면 앉아서 명상을 하기도 하고, 수행처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뭔가 변했다. 나는 이전처럼 명상에 매달리지 않았다. 물론 문탁에서 인문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물긷고 밥짓고 땔감을 마련해 와야 하는 사미승처럼 문탁에서 밥짓고 청소하고 댓글 달고 사포질을 하고 유리창을 닦고 책읽고 세미나를 하고 에세이를 썼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버라이어티한 문탁의 일상은 한동안은 명상만큼이나 강력한 성찰을 요구했고 새롭게 접한 인문학 공부도 그랬다.
그러다 4년 전인 2019년 새해를 맞이하며 나는 매일 명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다시 명상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중요한 계기는 일본의 애즈원 네트워크를 방문한 것이었다. 2018년 가을 그곳을 방문하고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 사는 분들이 너무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문탁은 학생모집이 되지 않는 파지스쿨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내부의 갈등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이 다르다고 이해를 못한다고 누구는 화를 냈고, 누구는 마음이 상해서 울고, 누구는 좌절했다. 어쨌든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만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내 마음도 그 일로 무척 괴로웠던 차였다.
2020년 2월, 문탁친구들의 두번째 애즈원 방문
인문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도 왜 우리는 ‘나’를 내려놓지 못할까, 질문이 계속 일어났다. 애즈원을 만나고 나서 나는 인문학 공부가 주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일까? 지적인 성찰을 넘어 몸을 변형시키는 수행이 필요했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하나로 체화하지 못하고 있는 한 지금까지 소홀히 해 온 영성에 실천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득 내게 다시 영성이라는 문제계가 던져졌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그 물음에 성실히 응답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게는 불교 공부였고, 명상 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상에서 명상 루틴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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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님, 글 읽고 보니 공감이 많이 가서 댓글 남기게 되네요.
저역시 20대 중반부터 가톨릭 영성 수련을 해 왔죠. 몇년간 세파에 휘둘리며 이것 저것 변죽을 울려보다가, 방배동 제따와나 선원을 다니면서 초기 불교 경전에 따른 수행을 흉내내 보고, 절에 들어가 장기 묵언 명상도 빡세게 해보고...
그러다 지금은 다시 매일 1시간씩 깊은 침묵 가운데 가톨릭 영신 수련을 하고 있답니다. 예, 무척 귀한 시간 입니다.
"나를 버린다"... 요 며칠 저의 화두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나다(nothing)'를 통한 '토도(everything)'입니다. ㅎ
요요님,정진하시겠지요...? 기원합니다^^
요요샘의 어마어마한 세계를 엿보는 은혜(?)를! 요요샘이 어떤 분인지 은근히 궁금했는데 말이죠. 샘의 글을 읽으며, 불교철학과 명상에 반발짝 이끌려간 느낌입니다.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요요님 글을 읽으며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저도 집단상담, MBTI, 애니어그램, 심성수련 같은 프로그램을 거쳐 위빳사나 수행을 만났어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어요. 요요인 글 읽으며 저도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상을 깨기가 어렵다는 걸 매번 느낍니다. 일상에서 짧게라도 명상이던 영신수련이던 내관이던 자기를 들여다 볼 시간이 그래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간을 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음, 제가 말입니다, 저 위의 두번째 단락에 있는 방하 어쩌구에 새벽마다 그 부부를 좇아갔었더랬습니다.
음 지금 생각하면 제 발로 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강제동원된 것 아닐까요? ㅎㅎㅎ
그 때의 기억은 오로지 단 하나!! 새벽에 가서 내내 졸다 왔다는^^
전, 언제쯤 명상에 제대로 입문할 수 있을지... 전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 대신 요가 하거든요. ㅋㅋㅋㅋ
저 방석을 나도 갖고 있으니 조만간? ㅎㅎㅎㅎ
오, 집중명상이란 게 있군요, 열흘간~~~~ 명상한다고 앉아서 이후에 할일 체크했던 지난 캠프때의 내가 떠오르고.... 집중도 몸에 익히는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요요샘의 글에서는 개인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이 짧은 글에서는 몇 가지 사건이 눈에 띄네요^^ 전 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저도 한 때 아침 108배 루틴 만들려고 야침차게 절방석도 사고.. 예불 음원도 찾아보곤 했었는데ㅎㅎ 혼자서는 꾸준히가 안되더라고요.
올해 요요쌤 명상 에세이 구독하고 불교학교 참여하면서 작고 꾸준한 영적 루틴을 만들고 싶어요!
저두 봉옥생께 얻은 저 멋진 방석이 몇개나 있건만ᆢ
이참에 꺼내놔 봐야겠어요. 그럼 앉을테고ᆢ 앉으면ᆢ ^^
명상에 한동안 집중하고 기쁨도 덕도 보았는데 살만하면 놓아버리는 한 사람이네요. 꾸준히가 어려운 1인입니다. 여기 자주 찾아와서 영감과 힘을 얻어가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요요님, 잘 지내시죠^^
경덕님 에세이 타고 들어왔다가 요요님의 귀한 글까지 읽게 되었네요.
저도 불경 공부랑 명상 수행에 관심 많은 일인이랍니다ㅎ
나중에 한 번 찾아봴게요.
주고 받는 덕담 속에 정이 넘치는 설 명절 보내세요^^
오! 산책님, 반갑습니다!! 그러잖아도 경덕님의 글을 읽으면서 산책님을 생각했거든요.^^
요요샘의 명상에 관한 글이 드디어 올라왔네요. 세미나발표때 얘기듣고 샘의 명상도 참 궁금했었는데 글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나를 괴롭힌 건 다름 아닌 내가 만든 아상(我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의식" 요 문구가 뇌리에 남네요.
사주적으로 말하면 전 자의식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거든요. 내가 만든 아상에 갇힌 사람인거죠.
알면서도 벗어나는게 참 힘들어요. 명상이 필요한 1인인데, 자꾸 미루게 되네요... 급한 사건이 저를 떠밀지 않았다는 반증이겠지만..
이런 급조된 마음 말고 꾸준한 마음을 갖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