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23회] 우연의 만남 / 영화 <문라이트>(2017)

청량리
2022-12-18 10:53
335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우연의 만남

문라이트 Moonlight (2017) | 감독 베리 젠킨스 | 111분 |

 

 

지난 글 보기 :(1) 우연이라는 결과 / (2)우연한 선택 

 

 

우연이라는 결과(제너럴), 우연한 선택(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우연의 만남

 

변곡(變曲)점

 엄마와 단둘이 사는 샤이론은 조용한 성격과 작은 체구로 리틀(알렉스 R. 히버트)이라 불린다. 리틀은 아이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하지만 그곳은 마약거래상인 후안(마허샬라 알리)의 비밀창고였다. 쿵쿵. 창문 합판을 뜯어낸 후안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리틀과 마주한다.

 

    후안 : 여기서 뭐 하니, 꼬마야?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 안 해?

    리틀 : ...

    후안 : 저기...뭐 좀 먹으러 갈 건데, 가고 싶으면 같이 가고.

    리틀 : ...

    후안 : ...가자. 여기보다 나쁘겠어?

 

밥 먹으러 가자. 여기보다 더 나쁘기야 하겠어?

 

 엄마는 마약에 취해 리틀의 삶과 일상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후안이 리틀에게 주는 용돈까지 갈취해서 다시 후안에게 마약을 구매하는 대책 없는 엄마다. 1970~80년대 미국 마이애미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문라이트 Moonlight>(2017)는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의 미발표 희곡, 제목이 무척이나 시적(詩的)인,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를 원작으로 한다. 연극보다는 영화적인 요소가 많았던 터라 무대에 올리진 못하고, 시간이 흘러 베리 젠킨스 감독과 원작자인 터렐이 만나면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를 구성하는 3막의 각 부분은 어떠한 '만남'으로 이뤄져 있다. 1막은 리틀과 후안, 두 사람이 창고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5번가 뒷골목의 흔한 마약거래상 후안. 그러나 리틀에게는 집과 학교의 틀을 벗어난 변곡점이다. "때가 되면 너 스스로 뭐가 될지 정해야 할 순간이 올 거야. 그 결정을 누구도 너 대신 해 줄 수는 없어." 어느 날 후안이 리틀에게 전해주는 말이다.

 

이제 수영해도 되겠는걸? 어때? 넌 세상의 중심에 있는 거야.

 

 후안에게 조금씩 문을 여는 리틀. 바다 위 리틀을 안고 수영을 가르쳐주는 후안. 누가 보면 따뜻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 그러나 끊임없이 출렁이는 수면 위를 따라가는 카메라와 음악(작곡 니콜라스 브리텔)은 그들의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것처럼 불안한 듯 흔들거린다.

     리틀 : 아저씨 마약 팔아요?

     후안 : ...

     리틀 : 우리엄마...마약 하죠?

     후안 : ...

엄마가 마약을 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약을 후안이 팔았다는 사실에 리틀은 말없이 집을 나간다.

 

붕괴(崩壞)점

 키가 훌쩍 커졌으나 샤이론(애쉬튼 샌더스)은 여전히 교내 왕따이며 비인간적인 폭력에 시달린다. 케빈(자럴 제롬)은 샤이론의 어릴 적 친구이자 유일하게 서로 정서적, 신체적 교감을 나눈 사이다. 푸른 달빛이 비치는 바닷가에서 샤이론과 케빈은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안아준다. 샤이론이 그때처럼 행복한 적이 있었을까. 그러나 2막에서 샤이론과 케빈의 만남은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

 

오랜 친구사이인 샤이론과 케빈. 우연히 마리화나를 나눠피고 서로를 들여다 보게 된다.

 

 어느 날 식사 중인 케빈에게 교내 양아치 터렐이 다가온다. 사고뭉치에 놀기 좋아하지만 케빈도 터렐이 두려워 그가 제안하는 게임을 거절 할 수 없었다. 기억나지? 내가 한 놈을 지목하면 네가 때리는 거야. 못 때리면 지는 거고. 이유 없이 샤이론을 지목하고, 케빈에게 폭력을 강요하는 터렐. 왜 하필 너냐. 케빈의 눈빛이 흔들리지만, 옆에서 터렐은 계속 윽박지른다. 뭘 꾸물대? 저 호모새끼 갈겨버려! 결국 케빈의 주먹이 샤이론의 얼굴로 날아가고 만다. 그냥 누워 있으라고! 피를 흘리며 샤이론은 케빈을 노려보지만 터렐 패거리들에 휩싸여 발길질 당한다. 터렐의 시킨 짓이라는 걸 알지만 케빈의 태도 역시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샤이론은 터렐의 등짝에 의자를 내리꽂는다.

 

     샤이론 : 왜 맨날 그렇게 불러?

     케빈 : 뭐, 블랙?

     샤이론 : 그래, 블랙.

     케빈 : 나만 부르는 별명이야. 맘에 안 들어?

     샤이론 : 아니, 그냥...

 

 지금까지 온갖 모욕과 폭력을 견뎌왔는데, 무엇이 샤이론의 내면을 붕괴시켰을까? 샤이론의 폭력은 무엇을 향한 분노였을까? 그 주먹이 만일 터렐의 것이라면, 바닷가에서 케빈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샤이론 곁에 후안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모든 일은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수 있을) 뿐이며, 그것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알 수도, 개입할 수도 없다. 때문에 우연이란, 나를 둘러싼 무수한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나의 선택이며 또한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연은 어떠한 ‘의미’로 작동하진 못한 채 그저 지나가 버린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샤이론은 교문 앞에서 케빈과 눈이 마주친다. 케빈은 수갑을 찬 샤이론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경찰차 안에서 샤이론의 시선은 케빈을 붙잡고 있다. 그에게도 화가 났지만, 그를 놓아버린다면 샤이론은 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후안처럼 마약거래상이 된 샤이론, 즉 블랙(트레반트 로즈)의 이야기가 3막으로 이어진다.  

 

시작(詩作)점

 시()는 분명 알고 있는 익숙한 단어들의 나열임에도 그것들의 만남은 전혀 다른, 낯선 의미로 다가온다. 시인이 고민했을 선택들, 단어 하나, 하나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여 얻게 되는 그 결과로써 시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일어났다 사라지는, 선택이자 또한 그것의 결과가 ‘우연’이라면, 그건 마치 시()와 같아서 달빛 속에서 어스름히 다가오는 사물들의 마주침일 것이다.

 

     케빈 : 바람이 진짜 기분 좋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세상이 잠깐 멈춘 기분이야.

               그저 바람을 느끼고 싶어지거든. 세상이 다 고요해져.

     샤이론 : 그러면 내 심장소리가 귀에 들리지. 그치?

     케빈 : 허...그래, 기분 진짜 좋지. 울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다니까.

     샤이론 : ...너도 울어?

 

 우연의 만남, 즉 관계는 삶의 전제조건이지만, 선택이라는 변수로 인해 달라지며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어떤 결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우연과 필연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니라 우연은 필연의 한 과정이다. 그 모든 과정, 만남-선택-결과 속에 녹아들어 있는 우연은, 삶의 원리인 셈이다.

 나는 지금 어쩌자고 이 영화에 대한 글을 문탁에서 쓰고 있는 것일까? 아내는 우연히 사주명리를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의 소개로 10년 전 첫째를 안고 2층 공부방에 우연히 니체를 공부하러 왔다. 그렇다고 영화인문학에서 이 영화를 상영될 줄 알았을까? 우연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것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비슷한 일상을 반복한다. 그 속에서 우연히 얻게 되는 오케이 컷 하나. 한 편의 에세이, 한 끼의 밥상, 한 번의 시즌. 이를 통해 지나온 우연의 점들이 하나의 필연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기쁨의 정서가 온몸을 감싸면서,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변곡점이 생성된다.

 

 

연결(連結)점

 어린 리틀은 어찌할 수 없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후안의 죽음 이후 케빈과의 만남도 샤이론의 폭력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 했다. "선택은 너 스스로가 하는 거야" 후안이 했던 이 말의 의미를 리틀-샤이론은 깨닫지 못 했다. 그러나 케빈의 식당으로 들어서면서, 자신을 관통해 왔던 즉 리틀-샤이론-블랙을 둘러싼 수많은 삶의 지점들이 서로 연결되는 시간을 블랙은 경험한다.

 10년 만에 블랙은 케빈이 요리사로 일하는 식당을 찾아간다. 어정쩡 자리 잡은 블랙과 분주하게 서빙을 하는 케빈의 엇갈림을 롱테이크로 길게 잡는다. 이후 블랙, 즉 샤이론을 발견하고 놀란 케빈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데, 그가 '샤이론’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화면과 목소리의 싱크가 일부러 어긋나며 울린다. 약간의 환상, 두 사람을 위한 공간. 중요한 건 블랙이 케빈을 '다시'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다.

 

왜 전화했어? 하지만 블랙은 케빈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블랙은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케빈에게 묻는다. 왜 전화했어? / 뭐? / 나한테 왜 전화했냐고. / 말했잖아. 어떤 손님이... 이 노래를 틀었다고. ‘다시 보니 아주 좋은 것 같아요. 이게 얼마만인가요? 무지 오래된 것 같아요. 당신이 마침내 여기 왔군요.’ 계속 마음속에 있던 상대를 오랜만에 재회하니 기쁘다는 내용의 노래, 바바라 루이스의 ‘Hello Stranger’가 두 사람 사이로 흐른다. 하지만 왜 전화했냐는 블랙의 질문은 잘못됐다. 케빈이 전화해서 블랙이 온 건 아니니까. 찾아온 건 본인인데 정작 케빈에게 그 이유를 묻고 있는 셈이다.

 후안이 말했던 ‘나의 선택’, 그 안에는 알 수도 없고, 개입할 수도 없는 어떤 결과까지 받아들이는 것 또한 포함한다. 엄마, 후안, 케빈, 터렐, 그리고 다시 케빈. 수많은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우연이 스며들어있다. 그러나 우연은 스쳐지나가고, 그 의미는 휘발되어 사라지며, 선택의 순간은 잊히기 쉽다. 하지만 다가오는, 알 수 없는 결과들에 대해서는? 우연은 순간이고 삶의 시간은 무한해서 그 의미는 우연의 만남 이후의 시간을 통해 드러난다. 때문에 우연은 ‘발생’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10년 전 해변에서 케빈과의 만남 이후 자신을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며, 마초 같은 근육질의 마약거래상 블랙은 숨겨 온 속내를 털어놓는다. 샤이론, 넌 누구니? 전혀 다른 사람 같잖아? 케빈이 묻는다. 나? 난, 나야. 몸은 바뀌었지만 네가 날 만진 이후 난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어. 블랙의 대답에 케빈은 돌아서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달빛이 비치는 바닷가의 마지막 장면, 푸르게 빛나는 어린 리틀이 다시 우리 앞에 서 있다.

 

 

 

 

댓글 1
  • 2022-12-19 22:00

    영화 인문학에 발을 들인 우연이 어떤 필연으로 이어질까 급 궁금해지네요 ㅎㅎ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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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68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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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59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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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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