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10회]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요요
2022-12-11 13:18
444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緣起를 본다

 

세존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맛지마니까야』 28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붓다(budha)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2,500년전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붓다(Budha)는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 그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중생의 한 사람에서 거룩한 존재로 변신하게 한 그 깨달음의 내용은 대체 무엇일까? 바로 연기(緣起)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치열하게 수행한 끝에 마침내 연기를 봄으로써 괴로움의 뿌리를 끊어냈다. 번뇌의 불이 완전히 꺼지는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비록 잠시지만 자신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널리 설하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탐·진·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이 연기를 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붓다는 넘치는 자비심으로 망설임을 떨쳐내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전하기 위해 길 위에 섰다.

 

붓다는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갔다. 그들에게 설한 법문이 초전법륜(初轉法輪)이다.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초전법륜에서는 괴로움,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실천에 대한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가 설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러 날에 걸친 대화와 문답 끝에 가장 먼저 꼰단냐에게 지혜의 눈이 열렸다. 꼰단냐는 환희에 차서 외쳤다. “생성한 것은 무엇이든 소멸하게 마련이다!” 꼰단냐를 포함해서 다섯비구가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된 존재가 되게 한 깨달음 역시 연기에 대한 통찰이었다!

 

 

연기란 무엇일까. 한자어인 연기는 연하여 일어난다, 즉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는 말이다. 연기란 빨리어 빠띳짜 싸무빠다(paticca samuppāda), 산스크리트어 프라티트야 싸무빠다(pratītya samutpāda)를 한자로 옮긴 말이다. 빠띳짜는 ‘의존한다’는 뜻이고, 싸무빠다는 ‘함께 생겨난다’는 뜻이다. 연기는 풀이하자면 의존적 상호 발생, 조건적 발생, 상호의존적 발생의 의미다. 연기적 관점으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저 홀로 독립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것들에 의존해서 발생하고,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알려준다. 이 모든 과정이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너무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연기를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 적용해 보려 하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나를 포함한 만물이 마치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습에 푹 젖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일까, 남이 만든 것일까

우리는 생각하는 나인 인식주체와 인식 대상을 구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물론 자기 자신을 대상화할 때도 있다. 그때조차도 우리는 대상화된 나를 인식하는 주체가 따로 있다고 가정한다. 그처럼 우리는 나와 대상을 구별하고, 대상을 인식하는 나를 이 세상 무엇과도 다른 특별한 능동적 주체의 위치에 놓는다.  나란 존재는 언제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상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설령 일상의 삶에서 내가 갈팡질팡하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그건 진짜 내가 아니라는 식으로 빠져나갈 출구를 만들어 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물음은 의문의 여지 없이 그런 진짜 나, 참 자아와 같은 신비화된 주체를 전제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무아론을 접할 때 당황하고 놀라는 것은, 무아론이 그런 신비화되고 초월적인 주체 혹은 자아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과연 진짜 나의 존재는 우리의 믿음만큼 그렇게 확실한 것일까?

 

붓다는 당대의 지식인과 수행자들과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그런 믿음의 근거를 무너뜨리면서 연기법을 설파했다. 어느 날 깟사빠라는 수행자가 붓다를 찾아와서 물었다. “괴로움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까?” 우리 역시 돈이 없어서, 남의 인정을 못 받아서, 몸이 아파서, 부모님이 늙고 병들어서 등등 수많은 이유로 괴로움을 겪고 있다. 이런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일까. 아니면 남이 만든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도 달라지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붓다의 답을 듣기 전에 먼저 ‘괴로움은 내가 만드는 것이냐’는 깟사빠의 질문이 감추고 있는 몇 가지 전제를 살펴보자. 어쩌면 우리 역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전제다. 첫째, 나를 나이게 하는 변치 않는 어떤 본질이 있다. 둘째, 나의 본질은 항상 존재한다. 셋째, 나의 본질은 내 행위의 근거이자 토대이다. 넷째, 괴로움을 겪는 나와 괴로움을 만든 나는 본질에서는 동일하다. 하여 ‘괴로움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까’는, 괴로움을 만드는 행위자이자 원인이면서 괴로움이라는 결과를 경험하는 동일한 주체의 연속성을 전제한다. 깟사빠는 붓다에게 자아가 연속한다는 상견(常見)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붓다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깟사빠의 두 번째 질문이다. 내가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고 다른 것이 원인이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남은 앞선 질문의 나가 실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은 첫번째의 질문의 실체론적 사유와 맥을 같이 한다. 앞선 질문과 다른 점은 원인과 결과가 연속적인 자기 동일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남이 괴로움을 만드는 행위자인데 내가 결과를 경험하는 자가 되니 말이다. 하여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동일성과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이 있게 된다. 그 점에서 이 질문은 단견(斷見)이 옳으냐고 묻는다.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괴로움은 원인 없이 우연히 생긴 것일까

세 번째 질문이 이어진다. “괴로움은 내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에 있는 상견과 단견이 동시적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가당착적 질문이므로 답할 필요조차 없다. 만일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으려면 동일성과 비동일성이,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상견과 단견이 하나의 괴로움에 대해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네 번째 질문은 “괴로움은 내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닙니까?”다. 내가 만들지도 않고, 남이 만들지도 않았는데, 내가 괴로움을 느낀다면 그 괴로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온 바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어떤 원인도 인정하지 않는 무인론(無因論)을 가정하고 있다. 원인 없이 발생한 것을 우리는 우연히 발생했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한다면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인과관계란 없고 오직 혼돈과 무질서가 있을 뿐이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괴로움은 원인 없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깟사빠의 네 가지 질문은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때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포함한다. 붓다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상견도 단견도 무인론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붓다의 관점에서 보면 깟사빠의 질문은 모두 잘못 구성된 질문이다. 생각해 보자. 깟사빠의 ‘괴로움은 누가 만드는가?’라는 문제는 괴로움을 만드는 ‘누구’가 실체가 존재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가정하고 있다. 괴로움은 그런 ‘누군가’와 ‘무엇’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어떤 조건 속에서 발생할 뿐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깟사빠의 네 가지 질문 모두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깟사빠와 붓다의 대화를 보면서 나는 깟사빠에게 오히려 감정이입이 되었다. 나 역시 오래도록 그런 질문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괴로움을 만든다고 생각할 때는 반성하는 주체였고, 내 괴로움의 원인이 내 바깥에서 온 것이라 생각할 때는 남의 잘못을 심판하고 분노하는 주체였다. 나는 깟사빠의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을 무한 반복하며 괴로움을 실체시하고 나와 남을 실체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반복이 자아의식를 강화하는 순환적 회로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연기는 양극단을 떠난 중도의 가르침이다

붓다의 위대함은 사람들이 당연시하던 전제를 문제 삼고 물음 자체를 바꾼 데 있다. 그는 ‘누가 괴로움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실체적 관점에 선 질문이라는 것을 통찰했다. 붓다는 ‘괴로움을 누가 만드는가’에서 ‘괴로움은 어떻게 생겨나는가’로 질문을 바꾸었다. 이렇게 물음을 바꿈으로써 붓다는 조건적 상호발생의 원리인 연기를 발견했다. 상견도 단견도 무인론도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이고, 모든 발생과 소멸은 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상견과 단견을 떠나는 것이 중도이다. 중도란 연기에 다름 아니다.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상견과 단견]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죽음, 늙음,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납니다.(『쌍윳따니까야』 12:17 『아쩰라 깟사빠의 경』)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발생하고 갈애를 조건으로 괴로움이 발생된다는 연기의 원리를 듣고 붓다의 제자 몰리야 팍구나가 물었다. “누가 의식합니까?”, “누가 접촉합니까?”, “누가 느낍니까”, “누가 집착합니까?”라고. 이쯤되면 우리는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는 것과 연기를 알고 보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깟사빠와 팍구나가 멍충이여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질문은 그들이 이 세계를 실체적으로 보는지 연기적으로 보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나의 질문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어떤 조건 속에서 괴로움이 생겨나고 사라지는지 성찰하는 수행 없이 그저 연기의 개념을 아는 것으로는 나의 물음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 더 확실히 해 둘 것이 있다. 연기의 설법에 등장하는 무명無明, 형성, 의식, 명색名色, 여섯 감역六入, 접촉, 느낌, 갈애, 집착, 존재, 태어남, 죽음과 늙음, 비탄과 고통, 근심과 절망老死·憂悲惱苦 하나하나를 실체적 개념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오온도 마찬가지다. 오온도 괴로움도 무상한 변화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흐름으로 있을 뿐이다. 붓다는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무상한 것이라고, 거기에 변치 않는 자아 따위는 없다고 힘주어 가르친다.

 

수행승들이여, 늙음과 죽음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한 것이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며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며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남, 존재, 집착, 갈애, 느낌, 접촉, 여섯감역, 명색, 의식, 형성, 무명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발생한 것이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며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며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쌍윳따니까야』 12:20 『조건의 경』)

 

연기적 관점이 대결하는 것은 실체론에 근거한 사유이다. 생성과 소멸의 장 안에서는 그 무엇도 실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실체가 없다는 자각은 무아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요한다. 무아는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 역시 연기적 사태라는 말이다. 무상, 무아, 연기, 중도는 서로에게 의존해 있다. 연기는 마치 베어놓은 볏단이 서로에게 의지해서 서 있는 것처럼 사물이든 개념이든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가르침이다. 붓다가 설한 중도 역시  연기적 사유, 연기적 실천에 다름 아니다.

 

 

연기는 수행적 앎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쌍윳따니까야』 12:37 『네 것이 아님의 경』)

 

널리 알려진 연기의 정형구이다. 우리는 이제 이 정형구가 말하는 이것과 저것이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어떤 사태를 지칭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또 연기란 다른 여러 조건을 통제한 상태에서 독립된 두 항을 떼어내어 원인과 결과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단순하게 설명해내려는 시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연기를 인과법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단서가 필요하다. 원인과 결과를 분리된 두 항으로 실체시하지 않는다는 조건 말이다. 연기의 원리는 실재하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는 익숙한 고정관념과 습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만이 그것을 볼 수 있다.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맛지마니까야』 26 『성구경』)

 

연기법을 모른다는 것은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 윤회적 삶에 속박된 것이고, 연기법을 안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해방된 삶을 사는 것이다. 연기를 아는 것은 연기의 정의나 개념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연기법은 존재의 변형을 수반하는 앎이다. 연기를 보려면 탐·진·치를 지워내고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한 자기변형의 과정, 수행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연기는 그것을 보면 보기 전의 삶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수행적 앎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기를 보는지 보지 못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상에서 나를 앞세우는 탐욕과 분노가 줄고 내게 닥쳐오는 일들에 대해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딱 그만큼 나는 연기를 보고, 연기를 산다. 하루하루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통찰과 수행의 바로미터다.

 

댓글 6
  • 2022-12-12 10:33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22-12-13 06:40

    변화하고 있는 과정의 사태... 존재의 변형을 수반하는 앎...
    들뢰즈가 말하는 '배움'과 매우 유사해 보입니다... 현재 제가 알고 있는 만큼에서요 ㅎㅎ

    *비밀메모가 필터링되었습니다

  • 2022-12-14 16:01

    " 그들의 질문은 그들이 이 세계를 실체적으로 보는지 연기적으로 보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실체적으로 보는 질문과 연기적으로 보는 질문의 차이는 주체와 대상의 문제에서 발생하는걸까요? 주체와 대상이 있다 없다는 이분법에서출발?
    네 번의 질문으로 그걸 이해하기에는 역부족 ㅋ 샘이 세세히 좀 더 알려주세요~~
    여튼 내가 어떻게 질문하고 있는지 따져보기는 해야겠습니다~~

    • 2022-12-17 11:21

      우리가 어떻게 질문하느냐가 우리의 (비연기적이고 실체적인) 사유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렇게 보지 않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 오히려 내가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던지느냐를 잘 살펴보면 내가 세계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가 드러난다고 하는 편이 낫겠네요. 깟사빠의 질문을 가지고 와서 연기에 대해 풀어보려고 시도해본 것은 깟사빠의 질문이 사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던지는 질문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질문을 잘 탐구해 보는 것이 연기를 이해하는 하나의 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지요. 부처님의 답보다 오히려 깟사빠의 질문방식, 거기에서 시작해보자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번에는 연기에 대해 써보겠어, 라는 결심으로 이 글을 시도했지만 연기에 대해서 쓰는 것은 정말 어렵네요. 그리고 제가 잘 모른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고 질문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2022-12-16 09:54

    첫 번째 사진 속 한 비구님은 거북목...?

    몇 년 전에 요요쌤이랑 대중지성에서 불교 공부를 했을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 연기가 너무 어려워서 엄청 고민하다가 손톱만큼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 글을 다시 보니 고 사이에 전부 새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어요ㅋㅋ 연기를 아는 삶을 사는 건 어떤 걸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알게된 명상단체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카르마에 엄청 주목하더라고요. 마치 점수를 매기는 것처럼 +, -를 재고 있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연기를 제대로 깨우쳤다면 그렇게 이야기하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 2023-03-04 19:38

    연기에 대해서 어렵지만 나의 잘못으로 이런 일이 생겨났다는 자책 그리고 너의 잘못으로 이 일이 생겨났다는 비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7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64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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