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19회] 우연이라는 결과 / 영화 <제너럴>(1927)

청량리
2022-10-23 13:59
347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우연이라는 결과

제너럴 The General (1926) | 감독 버스터 키튼 | 주연 버스터 키튼, 마리온 맥 | 84분 |

 

 

 

 명절이 되면 으레 티브이에선 머털도사 아니면 성룡의 영화를 방영했었다. 특히 성룡영화는 집안의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한데 모이게 만드는 인기프로였다. ‘성룡영화’의 특이점은 엔딩크래딧과 함께 보여주는 ‘NG모음’이었다. 영화라는 게 원래 각본과 연출에 의해 원하는 장면을 반복해서 촬영하고 편집하는 영상물이다. 그러니 NG모음은 사실 성룡영화만의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너무나 위험해 보이고 아슬아슬한 명장면들이 대역도 없이 수많은 반복과 실패 뒤에 나왔다는 사실은 성룡영화에 리얼리티와 진정성을 부여했다. 같은 위치에서 같은 동작을 연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던지지만 이번에 오케이가 나올지는 성룡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영화에 삽입된 하나의 ‘오케이 컷’은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채 수없이 반복된 NG장면 뒤에 얻게 되는 것이다.

영화 <폴리스 스토리>의 NG모음. 카운터를 돌면서 의자를 피하는 장면인데, 머리가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었다.

 

요즘처럼 흔한 CG나 와이어 장치도 없이 맨몸으로 펼치는 성룡영화는 스턴트 액션영화에 있어서 말 그대로 ‘고전’의 위상을 갖는다. 그런데 그런 성룡영화가 다양한 액션기법을 모방하고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던 정신적 스승이 바로 ‘버스터 키튼(1895~1966)’이다. 이름이 다소 낯선 ‘버스터 키튼’은 무성영화의 전성기, 그러니까 1920~30년대 찰리 채플린과 쌍벽을 이뤘던 배우 겸 감독이다.

물론 흑백 무성영화의 아이콘은 ‘찰리 채플린’이었고, 그의 슬랩스틱(slapstick) 코미디는 흑백영화의 대표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무표정’이라 일컫는, 슬랩스틱 보다는 스턴트에 가까운 버스터 키튼의 연기는 코미디보다는 액션영화에 가까웠고, 그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장르를 만들어갔다. 한 컷, 한 컷 재미있고 또 대단한 키튼의 스턴트 장면들은 성룡영화로 짐작건대, 분명 수많은 NG장면들을 통해서 완성되었을 것이다.

 

위대한 무표정(The Great Stone Face)의 배우, 버스터 키튼(본명 : 조셉 프랭크 키튼 Joseph Frank Keaton, 1895 ~ 1966)

 

 찰리 채플린이 스토리나 메시지 전달에 중점을 두었다면, 버스터 키튼은 주로 뛰어난 영화적 기술과 화면 연출로 평가받는다. 반면 영화의 내용은 대개 비슷한 흐름을 갖는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갈등, 사건 해결로 해피엔딩. <제너럴>도 비슷하다. 때는 1861년, 미국의 남북전쟁시대. ‘제너럴’은 조니 그레이(버스터 키튼)가 운전하는 기차의 이름이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 애너벨이 있었다. 기관사인 조니는 군입대에서 제외되지만 애너벨은 비겁함으로 오해하고 그를 차갑게 대한다. 어느 날, ‘제너럴’이 북군에게 탈취 당하고 공교롭게도 애너벨도 함께 잡혀간다. 조니는 애너벨과 제너럴을 되찾기 위해 뒤를 쫓는다.

 몇 줄로 요약되는 단순한 스토리에 몰입하게 만드는 건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돌발상황을 해결하는 버스터 키튼의 놀라운 ‘몸’연기 때문이다. 무성영화 시대에 극중 상황과 영화의 스토리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슬랩스틱이었다. 판토마임과 같은 표정연기와 넘어지고 부딪히며 좌충우돌하는 몸짓으로 배우들은 모든 걸 표현했다.

 반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버스터 키튼의 연기는 스턴트에 가까웠다. 도망치던 북군은 철로 위에 침목을 던져 조니의 추격을 방해한다. 탈선의 위기에서 철로에 뛰어들었지만 무거운 침목은 혼자서 옮기기엔 만만치 않다. 어느 새 그가 타고 있던 기차가 등 뒤에 도달했고 기차의 맨 앞에 엉거주춤 침목을 든 채로 밀려간다. 그 순간, 저만치 철로 위로 또 다른 침목이 눈에 들어오자 당황하는 조니. 과연 그와 기차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대사를 잊어버려 다시 촬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스턴트 액션의 NG는 사고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스턴트의 달인 성룡도 이마가 찢어지고, 팔이 부러지기도 한다. 이 과정이 고스란히 NG모음에 들어가 있다.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뭘까? 침목을 들고 뛰던 키튼이 발이라도 헛디디면 그대로 기차와 충돌하게 된다. 실패할지도 모르면서 성공확률에 도박처럼 몸을 던지는 걸까? 그리고 수많은 NG와 한 번의 오케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걸까?

 우연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명사]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그러나 인과 관계가 불확정적이거나 또는 불분명하거나, 우리의 인식 바깥에 있을지라도 어떤 일에는 반드시 인과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연이란 필연적 인과를 통해서(만) 발생한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세상은 ‘필연적 우연’으로 가득 찬, 무한히 넓은 그물망과도 같다.

 분명 액션이 들어가기 전 상황은 동일하다. 기차는 다가오고 있고 무거운 침목을 들고 엉거추춤 서 있는 키튼. 원하는 장면은 들고 있는 침목을 던져 철로에 끼인 또 다른 침목을 한 번에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침목은 빗나간다. 한 번, 두 번. 이번에는 기차와의 속도 조절에 실패해 침목을 놓치고 만다. 벌써 여덟 번째 테이크다. 인과 관계로만 봤을 때 조건은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NG는 계속 일어난다. 그걸 알면서도 키튼은 한 번 더 철로 위에서 스턴트를 준비한다. 다시 또 엉거주춤 침목을 들고 서 있는 키튼 뒤로 기차가 다가온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혼자 들기에 무거운 침목을 들고 기차에 엉거주춤 걸터 앉은 조니. 위기 앞에서도 그의 표정은 변한 적이 없다.  

 

 우연은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 인과 관계가 같아 보여도 결과는 또 달라질 수 있다. <매트릭스>를 설계한 아키텍트는 네오를 보고 여섯 번째 ‘변수’라고 했다. 0과 1로 계산된 매트릭스에서도 결과는 달라진다. 예측불가능성, 불확정성, 불분명한 속성에서 보자면 우연은 하나의 ‘변수’인 셈이다. 성룡이나 키튼의 스턴트는 그런 면에서 그 변수에, 우연에 기대고 있다.

 우연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들이 결과를 만들어낸다. 처음부터 인간에게 그 인과 관계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니 몸을 던져 ‘실패’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성룡과 키튼은 그 우연의 발생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될 거라고. 우연히, 뜻하지 않게 오케이가 날 거라고. 신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NG의 반복 속에서 우연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오케이 컷을 만들어낸다.

 버스터 키튼의 전성기는 찰리 채플린에 비해 너무도 짧았기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졌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됐으나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외면 받은 비운의 영화 <제너럴>(1927)은 그의 몰락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이후 키튼은 자신의 영화사를 접고 대형 제작사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와 겹쳐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뒤늦게 인정받아 1965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제너럴>은 재상영 되었고 20분 동안 기립박수를 받았다. 키튼의 재발견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상소감에서 ‘박수소리는 근사하지만 너무 늦었다’며 무표정 속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버스터 키튼은 그 다음해 폐암으로 눈을 감았다. 지금도 평론가들 사이에선 채플린과 키튼 중 누가 더 위대한지는 논쟁이 되곤 한다.

 복잡한 설정의 영화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어하는 건 주어진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영화다. 지금 현재의 이야기가 아닌 과거의 ‘카더라’와 미래에 ‘그럴 걸’이라는 설명은 군더더기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우리가 궁금한 건 신이나 알법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필연적 우연 속에 살고 있기에 누군가의 삶을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키튼이나 성룡의 고난도 스턴트 액션이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건 매일의 일상처럼 되풀이해야만 겨우 얻을 수 있는 무엇이다. 우연히 만난 골목길, 우연히 읽게 된 책, 우연히 알게 된 사람, 우연히 하게 된 공부. 삶과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은 그저 운이 좋아서 얻어 걸리는 게 아니다. 무수한 NG의 반복 속에서 얻게 되는 소중한 ‘오케이 컷’이다. 지금 당신 일상 옆으로 어떤 ‘우연’이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 3
  • 2022-10-24 15:13

    지나가는 우연을 붙잡으란 말씀!! 잘 읽었습니다~

  • 2022-10-25 15:48

    무수한 NG가 있는 일상을 살아갑시다~

  • 2022-10-25 17:03

    *몸을 던져 실패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저는 이말이 참 좋네요. 실패하지 않으려 꼼수 쓰다 인생 엉망으로 살았더라구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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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26
토용의 서경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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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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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85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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