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여성들은 정말 불행했을까] ‘부모(傅母)’를 아시나요?

고은
2022-10-08 12:12
394

 

 

1. 엄마와 작은 이모

 

   외가는 강원도의 깊은 시골에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유학길에 올라야 했던 탓에 오 남매 모두가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었다. 두 삼촌은 대학교까지 마쳤지만, 이모들은 일찍 생활전선에 올랐다. 엄마는 자매 중 오직 자신만이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이을 수 있었다고 했다. 얼마 전 작은 이모와 밥을 먹다가 엄마가 어떻게 학업에 계속 할 수 있었는지 듣게 되었다. 작은이모는 당신의 동생인 나의 엄마가 학업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그 뜻을 피력하기 위해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 결국 할머니가 두 손 두 발을 드셨기에 엄마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찾아와 설득해도 꿈쩍하지 않던 할머니는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자신을 따라 생업에 동참한 작은 이모의 말을 쉽게 모르는 척할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작은이모는 종종 당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중 공부를 잘했다는 이야기는 단골 소재인데,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10살 때부터 작은이모와 가까이에서 살았던 나는 그녀의 포용력과 다정함이 총명함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다. 이모만큼 곤란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무슨 말을 듣든 그 요지를 곧바로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런 이모의 단식투쟁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모는 당신 앞에 있는 두 조카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엄마는 이모의 선견지명(?)에 따라 집안에서 가장 좋은 학벌을 갖게 되었는데, 그 첫째 조카딸인 나는 대학을 자퇴하고 둘째 조카딸인 내 동생은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2. 장강과 그의 선생, ‘부모(傅母)’

 

   엄마가 어렸을 때처럼 ‘교육'이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교육'을 하는 사람도, ‘교육'을 받는 사람도 남성이라고 여겨지던 시대 말이다. 대개 여성은 오래도록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해왔다고, 남녀 대부분이 대학교에 진학하는 지금에서야 남녀는 평등하게 ‘교육'을 받는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러나 <열녀전>에는 여자가 교육받지 못한 것이 뿌리 깊은 전통일 것이라는 통념과 어긋나는 내용이 담겨있다. 고대 귀족 여성은 자신의 방을 나설 때 반드시 다른 여성들과 함께 다녀야 했다. 그중 하나가 신체의 예절을 알려주는 유모였고, 다른 한 명이 덕과 의를 가르치는 ‘부모(傅母)’였다. 스승 부(傅)와 어미 모(母)가 결합한 ‘부모(傅母)’는 여자들의 여자 스승인 셈이다. 부모(傅母)는 <열녀전> 곳곳에 등장하는데, 그중 ‘제녀부모'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위나라 왕의 정실부인인 장강은 미인이었다. 장강은 처음 위나라에 시집왔을 때 제멋대로 굴고, 행색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꾸미고, 방만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장강의 부모(傅母)는 아마도 장강이 시집오기 전부터 함께 생활했던 선생이었을 것이다. 부모(傅母)는 그런 장강을 보고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설명하고, 시를 지어 한 번 더 설득한다. 장강은 마침내 부모(傅母)의 말을 듣고 감동하여 스스로를 바로잡는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처음 위나라에 왔을 때 못 말리는 철딱서니였던 장강은 부모(傅母)덕에 개과천선한 뒤, 훗날 <시경>, <사기세가>, <춘추좌전>에도 등장하는데, 역사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현명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다른 역사책에 따르면 장강의 현명함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그의 남편인 위나라 왕 때문이다. 장강의 남편은 난폭하고 무절제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군사놀이를 하는 등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것을 바로잡지 않고 용인하고 방치했다. 결국 후궁의 아들은 장강의 남편인 위나라 왕이 죽고 몇 년 뒤 그 자리를 찬탈했다. 물론 후궁의 아들은 얼마 못 가 쫓겨났지만, 그로 인해 위나라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이는 모두 장강의 남편이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장강은 자기 남편과 다르게 문제가 된 후궁의 아들을 일찌감치 싫어했다고 나온다. 훗날 문제를 일으킬 사람을 일찌감치 포착할 줄 아는 현명한 인물로 그려진 것이다.

 

 

 

 

 

3. 여성들의 공동체

 

   장강이 어렸을 때 제멋대로 굴었다는 캐릭터 설정은 그녀의 출신과 관련이 있다. 제나라의 제환공은 패자(霸者)가 되는데, 장강은 그보다 약 100년 전의 사람이다. 장강 생전에 제나라는 훗날 패자(霸者)를 배출할 수 있을만큼 국력을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힘 있는 공주인 장강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던 부모(傅母)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실 장강의 부모(傅母)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다. 장강과 부모(傅母)의 에피소드는 <열녀전>에만 등장하고, <열녀전>에도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부족한 정보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부모(傅母)가 주인공인 이 이야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열녀전>에서 장강의 부모(傅母)가 했던 말을 살펴보면서 부모(傅母)가 어떤 존재였을지 나름대로 상상해보았다.

 

   ‘제녀부모’ 에피소드는 거의 장강 부모(傅母)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는 엄청난 달변가였다. 부모(傅母)는 숨 돌릴 틈 없이, 장강이 끼어들 틈 없이 촘촘하게 맥락을 짜서 자기 생각을 전달한다.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맥락이 상당히 세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모(傅母)는 먼저 장강의 친정인 제나라가 얼마나 존귀한 나라인지 칭송하며 장강의 귀를 연다. 그리고는 거기에 제나라가 그토록 존귀한 것은 힘이 세거나 재물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대대로 백성의 모범이 되어왔기 때문이라는 단서를 단다. 부모(傅母)가 이 말을 함으로써 장강은 순식간에 장강이 꾸민 화려함이 아닌 물려받은 덕으로 인하여 존귀한 사람이 된다. 이어서 부모(傅母)는 장강이 위나라에 온 것 역시 덕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말로 장강이 위나라에 온 본분을 짚고 시를 지어 정리하며 말을 마무리한다. 즉 부모(傅母)는 당시 국력을 키워가고 있었던 장강의 친정 제나라의 위세를 거론하며 장강을 띄워주지만, 그 위세는 힘이 아니라 덕으로부터 나왔다고 강조하며 장강이 무엇을 까먹고 있었는지 상기시킨 것이다.

 

   부모(傅母)의 말을 보면 그의 교육 수준과 교양수준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부모(傅母)가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절한 시기에 장강에게 꼭 필요한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이 있는 제나라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장강은 난폭하고 무절제한 남편에게 총애받지 못하고 적자도 낳지 못한 처지였다. 장강은 작은 실수를 하더라도 큰 문제로 불거지거나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지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니 장강과 일상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던 부모(傅母)의 역할은 오늘날 짧은 시간 동안 만나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의 역할보다는 더 큰 것이었다. 제나라에서부터 함께 와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그들은 일종의 공동체와 같아서 일상의 지혜를 나누고 앞날을 함께 헤쳐 나가는 관계였을 것이다.

 

 

 

 

 

 

4. 작은 이모, 어쩌면 부모(傅母)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묘하게 부모(傅母)에게 마음이 갔다. 물론 <열녀전>에 나오는 여자들은 대부분 현명하고 능력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장강 부모(傅母)의 총명함은 나의 작은 이모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장강의 부모(傅母)와 작은이모는 모두 귀가 밝아 말의 요점을 언제나 명확하게 이해하고 눈이 맑아 문제가 생겨도 어디로 가야 할지 제대로 캐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문제가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앞날을 생각하며 여성들을 도왔다. 적자를 낳지도 총애받지도 못했던 왕후였던 장강과 여성이기 때문에 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뻔했던 나의 엄마는 그녀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장강과 그 부모(傅母)처럼 엄마와 작은이모도 서로의 일상을 돕고, 지혜를 나누고, 그로부터 배우며 함께 삶을 일궈가는 여성 공동체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작은이모는 나와 동생에게 그런 존재이기도 하다. 작은이모는 내가 10살일 때부터 털털한 나의 엄마를 대신해서 우리 자매에게 머리를 손질하는 방법, 좋은 옷을 고르는 방법,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말과 표정이 풍부하지 않아 때때로 로봇 같다는 소리를 듣는 나는 사근사근하게 사람을 챙기는 방법, 곤란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방법,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을 작은이모에게서 배웠다. 고모나 이모가 부모(傅母)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작은이모를 나의 부모(傅母)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작은이모는 나와 동생의 진학 문제로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작은이모는 엄마처럼 공부를 잘하는 나를 보곤 미국의 유명한 대학교의 이름을 열거하며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작은 이모의 말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내가 일반적인 진로를 벗어난 뒤부터 작은이모는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 거라는 말을 아끼지만, 대신 밥을 사주시고 쇼핑에 데려가신다. 작은이모는 엄마가 학교에 진학했을 때처럼, 내가 대학을 자퇴하고 동생이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았을 때도 나름의 방식으로 응원하고 격려하고 계셨을 것이다.

 

 

 

댓글 1
  • 2022-10-12 11:51

    오호! 고은님 글 덕분에 부모(傅母)라는 새로운 말을 배웠습니다.^^

    서로에게 배우며 부모(傅母)가 되는 여성들의 관계를 즐겁게 떠올려 봅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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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66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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