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설이 아니라 욕망론이다

여울아
2022-10-0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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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줄 알았지만 몰랐던 이야기" 여.알.모. 세 번째 순자 이야기

 

 

성악설이 아니라 욕망론이다

 

 

1. 욕망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갖는다. (人生而有欲) 『순자』「예론」

 

유학자 최초로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 사람은 순자이다. 그에게 욕망이란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추우면 따뜻하길 바라고 배고프면 배부르기를 바란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 만한 일을 좋아하고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될 만한 일은 싫어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반응하는 이유는 욕망이야말로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산 사람은 욕망할 수밖에 없지만 죽은 사람은 욕망할 수조차 없다. 그는 욕망을 없애려는 시도를 하늘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겼다.

 

전국시대는 전쟁으로 점철된 혼란의 시기였다. 이런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제자백가의 학자들은 저마다의 사상을 펼쳤다. 이 가운데 송견(宋銒)은 “사람의 욕망은 적다(欲寡)”고 주장했다. 그의 과욕(寡欲)론은 사람이 살기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다. 다만 욕망을 부추기는 세태 때문에 세상이 혼탁해진다는 것이다. 순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욕망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보고, 귀로 좋은 소리를 듣고, 코로 좋은 향내를 맡으며, 입으로 맛 좋은 음식을 먹으려는 것은 누구나 갖는 욕망이다. 송견은 사람이 이 정도를 욕망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순자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기만이 아닌지를 묻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순자에게 욕망은 생존욕구부터 인정욕망까지 각양각색이다. 그는 하늘로부터 받은 욕망을 인위적으로 줄이거나 없앨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각자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분출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욕망이 적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기수련을 통해 욕망 그 자체를 줄이는데 관심을 두거나, 혹은 욕심 없이 순수하게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를 따라 살기를 바랐다. 이에 반해 욕망이 많아질 뿐 적어질 수 없다고 믿었던 순자는 의로운 병사(義兵), 부국강병(富國强兵), 왕도와 패도(王道覇道) 등 기존 유가들이 다루길 꺼려했던 주제들에 적극적으로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2. 욕망은 기르는 것이다

 

 

무릇 정치를 논의함에 있어 욕심 적게 갖기를 기대하는 자(寡欲者)는 욕심을 절제(節欲)시킬 줄 모르면서 욕심 많은 것만 곤혹스러워하는 자다. (凡語治而待寡欲者, 無以節欲而困於多欲者也) 『순자』「정명」

 

 

순자에게 정치란 욕망을 적극적으로 조절하는 것, 절욕(節欲)이다. 절욕은 욕망 그 자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양욕(養欲), 즉 욕망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의 양생(養生)이 생명에 방점을 둔 표현이라면, 순자의 양욕은 정치의 우선순위가 욕구충족임을 드러낸다. 무수한 전쟁을 치루면서 사람들은 생사존망을 신중히 살피지 않을 수 없었고, 철기의 발달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면서 잉여분에 대한 분배의 문제에 대해 촉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는 국가가 사람들의 이익 추구에 대한 욕망을 인정하고, 이것이 어디서 결핍되고 어떻게 충족되어야 할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자에게 양욕(욕구충족)은 국가의 이익 추구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예론」에서 “제한된 물자로 인해 욕망이 좌절되지 않도록 물자와 욕망, 둘 다 기르라(兩者相持而長)”고 말한다. 물자가 부족하면 남과의 다툼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국가가 혼란해지기 때문에 그에게 욕구충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오감을 즐기며 욕망을 기를 수 있도록 국가는 물자를 풍족하게 생산해야 한다. 이렇게 욕구가 충족될 때 사람은 더 이상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다. 순자는 양욕 이후에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물자의 생산뿐 아니라 분배의 문제까지 고려하면서 국가의 이익 추구라는 현실적 요청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맹자는 “왕도정치의 효과로서 이익은 따라올 뿐,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면 위험해진다”라는 입장이었다. 그에게 이익추구는 왕도정치의 방해요소일 뿐이었다.

 

양욕은 욕망의 충족을 정치의 주요한 과제로 삼되, 다른 한편 사회전체를 바라보는 정치적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국(富國)의 방법으로 순자는 “국가는 비용을 절약하여(節用) 백성을 넉넉하게 하라(裕民).”고 제안한다. 순자의 절용은 묵자의 절용과 다르다. 생산을 독려하는 순자와 달리, 묵자는 물자가 부족하다고 전제하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예악(禮樂)을 멀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러한 금욕적인 태도가 오히려 국가의 존폐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순자는 경고한다. 그는 묵자의 절용이 비용은 절감할는지 모르지만 천하를 가난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생산과 소비를 양쪽 모두 위축시켜 경제 침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국가 운용이 어려워진다. 이에 비해 순자의 절용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절용은 천자, 제후, 대부 등 사(士) 이상이 자신의 지위에 알맞게 욕망을 충족한 연후에 이들의 사치와 낭비를 견제하는데 목적이 있다. 당시 사회지도층이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이들의 과소비가 경제 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국가의 비용은 절감하고 백성의 풍족한 삶을 돌보는 것, 이것은 공자(節用愛人)를 비롯한 기존 유가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절용의 관점에서 청와대 이전 비용, 부자 감세 논란, 영빈관 신축 논란까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3. 욕망은 선도 악도 아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그 선한 것은 위(僞)다.(人之性惡, 其善者僞也) 『순자』「성악」

 

사람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득을 좋아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순자는 이것을 욕망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욕망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 하늘(자연)은 어느 때는 선한 의도로 풍년을, 또 어느 때는 악한 의도로 홍수를 내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욕망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욕망을 따르다보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게 되고, 경쟁이 과열되면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나 양보심을 잃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악(惡)이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씀씀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욕망이 줄지 않고 점점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커지는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하다 보면 주변을 돌보지 않게 되고, 이로 인해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는 것, 이것이 악이다. 눈과 귀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지만, 이를 잘 조절하지 못해서 사치와 낭비를 일삼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 이것이 악이다.

 

“본성은 악하다”라는 순자의 말은 이득을 좋아하는 욕망 그 자체를 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좇다가 사리 판단의 능력(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악하다는 의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본성(性)은 타고난 것이기에 배울 수 없는 것이고, 인위(僞)는 배울 수 있고 후천적 노력으로 교정가능 한 것이다. 순자는 타고난 자질 그대로의 욕망은 본성으로, 후천적 노력으로 얻어진 선한 마음은 인위로 분류한다. 이에 비해 맹자는 마음을 알면 본성을 알 수 있다는 입장으로, 본성이 마음과 별개가 아니다. 따라서 순자의 마음은 맹자의 타고난 선한 마음이 아니라 배려와 양보, 신뢰와 같은 분별력을 의미한다.

 

욕망이 지나치더라도 행동이 미치지 못함은 마음이 이를 제약하기 때문이다.(欲過之而動不及, 心止之也) 『순자』「정명」

 

그렇다면 본성이 악한 사람은 어떻게 선해질 수 있을까? 순자는 욕망이 지나치더라도 욕망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제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욕망은 길러주고 마음은 단속했다. 굽은 나무는 도지개(기준틀)를 대고 불을 쬐면 다시 곧게 펼 수 있고 무딘 쇠붙이는 숫돌에 갈면 다시 날카로워질 수 있다. 여기서 도지개이자 숫돌은 사법(師法:스승의 가르침)과 예의(禮義), 즉 순자의 예법이라고 불린다. 그에게 예법은 인위(僞)적인 것이며, 마음을 다 잡아주는 사회적 장치였다. 맹자는 예법을 타고난 선한 본성으로부터 얻었다고 주장했던 반면, 순자는 욕망을 기르기 위해 예법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예법의 기원에 대해서 이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러나 예법이 악으로부터 선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는 맹자와 순자는 같았다.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선한 마음을 갖고 태어나지만 방심(放心)하다 잃어버린(악해진)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고, 순자는 욕망에 가려진 (악해진)마음을 분별력 있는 (선한)마음으로 바꾸고자 했다. 순자에게는 욕망충족을 무시한 채 마음 수양만 외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이와 달리 맹자는 「진심 하」에서 욕망을 줄이는 것이 가장 좋은 마음 수양이라고 제안했다. 순자는 욕망을 생존욕구와 같이 삶의 원동력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욕망을 억누르지 않는 대신 마음의 통제력를 키우는데 주력했다. 그에게 마음은 배울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인위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예의범절을 익히고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최고의 마음 수양법이었다.

 

4. 순자, 사람의 길을 가다

 

 

 

 

순자의 욕망론은 하늘로부터의 인간 독립선언이다. 그는 시체가 산처럼 쌓인 잔악무도한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은 본래 선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맹자의 도덕주의를 더 이상 되풀이할 수만은 없었다. 맹자에게 선한 마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이때 맹자의 하늘은 도덕적 원리를 담고 있다. 반면 순자의 하늘은 자연 현상일 뿐 어떠한 선악의 의도가 없다. 따라서 순자의 욕망에는 선도 악도 없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사람이 막을 수는 없지만 제방을 쌓고 물길을 내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순자의 욕망론은 하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간이 선한 마음을 창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잘못 인도된 욕망은 좋지 않은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잘 인도되고 길러진 욕망은 인간을 무한한 가능성의 길로 이끌지 않겠는가.

 

순자의 말이 맞았다! 오늘날 욕망은 결코 줄지 않았다! 자본주의라는 멈추지 않는 기차의 엔진이 욕망임을 누가 부인하랴. 성악설이냐 성선설이냐는 해묵은 논쟁에 대해 사람들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경악할 만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사이코패스는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순자의 말에 따르면 누구도 악마로 태어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악마화해서 우리가 얻을 것은 화풀이할 대상뿐이다. 우리는 이들의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좌절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 사건 밑에 우글거리는 욕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욕망이 결핍되거나 과잉될 때 마음은 선악의 갈림길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욕망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이끌어주고자 했던 순자의 해법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관건은 성악설이 아니라 욕망론이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순자에 관한 연재는 끝을 맺는다. 첫 번째 글에서 나는 순자의 청출어람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변형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짚으며, 그의 교육자로서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두 번째 글에서는 순자의 예법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의례임을 밝히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의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번 글에서는 성악설의 오해를 털어버리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선악을 따지기 전에 욕망부터 들여다보자는 순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2300년 전 순자가 욕망을 긍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는지 몰라도 어쨌든 요즘은 욕망과잉의 시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계속 허기질까?

 

 

*다음 편부터 『한비자』의 법/술/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댓글 5
  • 2022-10-05 02:14

    순자는 요즘 세상에 맞아들어가는 면이 많아보이네요

    욕망을 인정하고 길러라?  성장으로 그 욕망을 채워라?

    그래도 순자는 성악설이 맞는거 아닌가요? '인지성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니...ㅎㅎ

    잘 읽었어요~^^

  • 2022-10-05 13:23

    제가 잘은 모르지만, 여울아샘의 순자 해석이 몹시 참신합니다. 순자가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서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가 많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샘 글을 보니 진짜 좀 그런 것 같고, 나아가 성악/성선의 구도가 어쩌면 '해석'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자가 직접 분명하게 그리 말했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정통유학과는 다른 각도로 해석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 2022-10-07 09:37

    순자는 욕망을 생존욕구와 같이 삶의 원동력으로 여겼다. 

    : 먹어야 생명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는 생존욕구와 관련된 활동인데요 이것을 욕망의 틀에 포함 시킬 때 따져봐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싶어요. 예를 들어 주희는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은 천리이고 맛을 찾는 건 인욕이라고 명명했는데요, 양욕을 주장한 순자가 욕망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면, 전국시대 정치적으로 풀어야 했던 욕망의 종류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순자를 주마간산식으로 읽고 덮어두었는데  글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걸 보니 여울아님이 열씨미 글을 써준 덕분이겠지요~ 한비자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화이팅~~

  • 2022-10-07 17:22

    양욕의 욕망충족은 어디까지일까요? 지위에 알맞는 욕망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맹자가 말한 항산이면 될까요? 아니면 순자는 그보다 좀더 필요하다고 봤을까요? 인위로 그 욕망이 조절될까요? 그렇다고 맹자말대로 인간의 선한본성을 믿고 기대를 걸기에는 또...아! 그노무 욕망 어찌할까요  ㅋㅋ

    잘 읽었습니다~

  • 2022-12-02 00:06

    저는 욕망이 줄지 않았다는 부분보다,
    욕망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구절에 생각이 들어가네요.
    한 가지로만 단정지을 수는 없겠죠.
    잘 읽었습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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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8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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