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8회] 자아는 없다, 무아의 가르침

요요
2022-09-13 09:14
522

자아는 없다, 무아의 가르침

 

수행승들이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쌍윳따니까야』, 22:59 『무아의 특징경』)

 

이십여 년 전쯤 명상 수행에 입문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위기가 닥친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반항과 일탈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아이로 인해 마주하게 된 두 가지 사태 모두 내가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 앞에서 마음은 온통 원망, 자책, 분노, 부끄러움, 모욕감으로 가득찼다. 자의식 과잉은 몸과 마음을 다치게 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명상을 배우러 갔다. 명상을 지도하는 스님은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지켜 보라고 했다.

 

네 마음을 가져와라

달마는 멀리 인도에서 중국으로 법을 전하러 온 스님이었다. 눈이 온천지를 새하얗게 뒤덮은 겨울, 혜가(慧可, 487년~593년)가 찾아왔다. 혜가는 가르침을 청했으나 달마는 묵묵부답이었다. 혜가는 자신의 팔을 잘랐다. 그제서야 달마는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달마를 찾아오기 전부터 혜가가 외팔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혜가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그 정도로 결연했다는 메타포로 이해하고 싶다. 거기에 더하여 팔 하나쯤은 가볍게 여기는 선가(禪家)의 공부 가풍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자가 된 혜가가 달마에게 말했다.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달마와 혜가의 대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명상을 배우러 달려갈 때의 내 마음과 스승에게 불안을 토로하는 혜가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거라고. 우리는 누구나 불안과 괴로움을 겪고 거기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오늘날 교회나 절이, 수많은 심리치료 프로그램과 힐링 상품 등이 우리의 불안을 겨냥한다. 불안에 잠식될 때 우리는 매우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절대적인 힘에 의존하고 싶어진다. 다른 한편 방향을 바꾸어 불안을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문제로 성찰할 때 우리는 자기 삶의 탐구자로 변신할 수도 있다.

 

“네 마음을 가져와라. 내가 너를 편안하게 해 주겠다.”

 

달마의 대답이었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마음을 가져오라니? 일상에서 표상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접근하는 달마의 말! 그것은 상식적인 관념과 습관화된 인식패턴 밖으로 혜가를 끌어내는 말이었다. 달마의 한마디가 불안을 대하는 혜가의 관점과 태도를 바꾸었다. 혜가는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마음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러자 그토록 생생했던 불안의 감정도, 불안이 터 잡고 있다고 믿었던 마음의 존재도 생각만큼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혜가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명상을 배우면서 내가 알게 된 것도 다르지 않았다. 들숨 날숨을 관찰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신 차려 보면 마음은 엉뚱한 곳을 헤매곤 했다. 집중[止]도 관찰[觀]도 쉽지 않았다. 나는 명상을 하면서 비로소 마음이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음이란 온갖 감정과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흐름일 뿐이었다. 나의 자책과 불안과 두려움도 바람이 불면 일어나고 바람이 멈추면 사라지는 파도처럼 조건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고정된 ‘나’도 없고, ‘나의 불안’도 없었다. 명상은 내면의 마음과 외부의 세계 모두 무상한 변화 속에 있고, 고정된 실체라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지식이 아니라 체감의 영역으로 데려왔다. 직관적으로 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나의 경우 아직도 명상 방석에 앉아 있는 동안에만 잠시 잠깐 겨우 실감하는 그것을 혜가는 스승 달마와의 문답을 통해 단박에 깨우쳤다. “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는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말에 스승 달마는 이렇게 화답했다.

 

“내가 네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셋슈우 토오요오,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진정한 자아, 아트만은 없다

달마와 혜가의 대화는 선가의 주요한 화두 중 하나가 되었고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화두는 생각하지도 말고 머리를 굴리지도 말고 의심 덩어리를 직시하면서 단도직입으로 뚫어내야 하는 것이라지만, 나는 안심법문을 붓다가 설한 제법 무아(諸法無我)의 다른 버전이라고 이해한다. 제법무아, 풀어서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아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찾는 종교라고 생각해 온 사람들은 붓다가 무아를 설했다는 것을 알면 놀라고 당황한다. 바로 여기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내가 있는데, 어떻게 무아라고 할 수 있느냐, 무아야말로 궤변이 아닌가 의심한다.

 

붓다의 무아는 어떤 맥락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무아는 ‘자아가 없다’라는 말인 만큼 먼저 부정되는 대상인 자아의 정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2,500년전 붓다의 시대, 베다 경전 『우파니샤드』는 개아(個我)의 본질을 불생불멸의 아트만(atman)이라고 주장했다. 아트만은 마치 소금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의 핵심이다. 감각기관이나 의식으로 포착할 수는 없지만 실재하는, 우리 존재의 에센스인 영혼이자 진짜 자아인 바로 그것이었다. 아트만이야말로 변화하는 몸과 마음 너머에 있으면서 변화하는 몸과 마음을 주재하는 우리 자신, 영원하고, 변하지 않고, 나의 자기 동일성을 보증하는 무엇의 이름이었다. 붓다의 무아는 그런 본질이자 실체로서의 아트만, 나, 자아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고대 인도인과 우리의 사고방식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우리 역시 나를 나이게 하는 자아나 주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상정하곤 한다.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아트만의 개념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트만도 주체도 자아도 실체적인 것이다. 실체는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다. 실체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능동적이다, 실체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DNA든, 영혼이든, 타고난 성격이든, 마음이든 뭐든 변치 않는 실체를 찾으려 할 때 우리 역시 아트만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무아이므로 자기변형이 가능하다

이제 붓다의 인간관을 살펴보자. 붓다는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들의 집합체[오온]라고 보았다. 오온(五蘊)은 물질의 집합[色蘊], 느낌의 집합[受蘊], 표상의 집합[想蘊], 의지의 집합[行蘊], 의식의 집합[識蘊]을 말한다. 인간을 물질과 정신, 혹은 연장과 사유의 결합으로 이해하거나 정신을 감성, 지성, 이성과 같은 인식능력으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근대적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붓다의 특별함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에 있다. 붓다는 신체와 정신을 연결하고, 이러저러한 정신의 기능을 통합하는 자아의 존재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오온의 집합체라고 말한 뒤, 만일 자아라는 것이 있다면 오온에서 아트만을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

 

만약 물질이 자아라면 물질은 자신 이외의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자아인 몸은 병들지 않아야 한다. 물질만 그런 것이 아니다. 느낌이 아트만이라면 불만족한 느낌은 있을 수 없다. 표상이 아트만이라면 잘못된 개념은 있을 수 없고, 의지가 아트만이라면 자신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의식이 아트만이라면 의식불가능한 영역이란 있을 수 없다. 오온 각각을 ‘나’라고 할 수 없다면, 오온을 합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자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구상물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몸도 정신도 무상하게 변한다. 몸이 무상하기 때문에 몸은 변화로 인한 괴로움을 겪는다. 정신도 무상하다. 그래서 정신 역시 변화로 인한 괴로움을 겪는다. 우리는 무상하지 않은 것을 원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그렇게 집착하는 한, 무상한 변화는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붓다는 다시 묻는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에 대해 ‘나’라고,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거꾸로 만일 무상하고 변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통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고 집착으로 인해 생겨나는 괴로움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쌍윳따니까야』, 22:59, 『무아의 특징경』)

 

오온이 무아라는 주장이 오온의 집합체인 현실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오해다. 오히려 자아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 현실의 나를 부정하는 견해가 될 수도 있다. 만일 자아의 존재가 확실하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것은 바로 그 자아이다. 그럴 경우 현실의 나는 그저 그 자아의 그림자일 뿐이다. 우리 삶에는 진짜 자아라는 정답을 찾아 성공하거나 거짓 자아라는 오답으로 실패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무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음을 던질 수 있고, 실험할 수 있고, 정답도 오답도, 성공도 실패도 없는 삶을 기꺼이 살아낼 수 있다. 무아는 지금 여기의 내가 변화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라는 말과 같다.

 

무아를 살아내기 위하여

무아가 갖는 실천적·윤리적 함의는 무엇일까? 무아가 변화를 향한 열림이라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무아로 사는 것은 다르다. 무아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고 하여 곧바로 우리가 무아적인 삶을 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일상의 삶에서 무아를 살아낼 수 있을까?

 

 

케마까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무아를 통찰하고 많은 집착을 제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아직 ‘나는 있다’라는 교만, ‘나는 있다’라는 욕망, ‘나는 있다’라는 경향이 미세하게 남아있다고 말한다.(사실 이 정도면 굉장한 경지다!^^) 동료 수행자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자아가 있다’는 경향을 없애는 수행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벗들이여, 예를 들어 더러워져 때가 묻은 옷이 있는데, 주인은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겼고,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뒤섞어, 맑은 물에 세탁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옷이 청정하고 깨끗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남아있는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가 가신 것은 아닙니다. 세탁업자가 그것을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거기에 배어 있는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를 없애 버립니다.(『쌍윳따니까야』 22:89 『케마까의 경』)

 

비록 오염이 제거되었지만 남아있는 쇠똥냄새는, 무아를 이해한다 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자만과 갈애의 습기를 비유한다. 좋은 향기가 밴 상자에 세탁물을 보관하여 그 향으로 쇠똥 냄새를 지워내듯이 케마까는 자아의식의 남은 여습을 지워내기 위해 일상에서 무아의 향기를 입히는 수행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뒤이어 케마까가 말하는 수행은 무상과 무아에 대한 관찰 명상에 다름 아니었다. 왜 명상수행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일까. 특별한 능력자가 아닌 이상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무아의 지혜를 통찰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십여년 전 명상수행 입문은 아주 멋진 경험이었다. 명상을 통해 내가 만든 잣대를 들이대며 분별과 집착을 강화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었다. 덕분에 남편에 대해서도 아이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한결 편해졌다. 그렇게 무아에 대한 체험적 이해가 조금씩 깊어지자 불교공부에도 제법 힘이 붙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니까야』를 읽으며 발심하여 명상의 루틴을 이어 오고 있다.

 

명상을 하다 보면 종종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내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조직된 몸과 오랜 진화의 역사가 만들어 낸 지구의 대기가 한데 어울려 나의 호흡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오늘 먹은 음식과 대지와 중력이 나를 걷게 한다. 변하지 않는 주체인 ‘나’가 단독자로서 의지적으로 호흡하거나 걷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인연들과 함께 호흡하고 걸으며 변화에 열려 있는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의 ‘나’다. 아직 몸이 사라지는 것 같은 신비체험도 해본 적 없고, 혜가처럼 단박에 존재를 변형하는 회심을 경험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다가 멈추기도 하고 또 뒤로 물러나기도 하는 지지부진한 나의 명상도 삶에 서서히 무아의 향기를 입히는 수행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댓글 7
  • 2022-09-13 10:27

    멋진 글이네요.

     

    그런데...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요즘 제 화두? 고민? 중의 하나가 호흡이에요.

    제가 자꾸 입으로 숨을 쉬고 (이건 코로나와 마스크 때문일가요?)  날숨이 너무 짧더라구요.

    한마디로 숨을 잘 못 쉬는것 같아요.

    요요님한테 명상-호흡법좀 배워야 할 듯^^

  • 2022-09-13 10:30

    요요 샘.. 잘 읽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어요. ^^ 보통의 불교 관련 글들은 어려워서 읽기 힘들었는데…  

  • 2022-09-13 18:23

    제가 일산에 와서 하타요가를 배우고 있어요~
    명상의 즐거움을 조금씩 터득하고있지만 몸이 기분 나쁘게 아파서 매일 아침 게으름을 ㅠ

    근데요~
    어떤 동작을 10분정도 유지하면 죽을 것 처럼 아픈데 천천히 돌아와 몸을 살피면 이게 너무 시원하고 좋아요^^ 무아!! 이런 느낌이예요^^ ㅋㅋ

  • 2022-09-13 23:41

    명상이 무아의 향기를 입히는 수행이라니! 

    삼천포로 빠지더라도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 2022-09-26 21:31

      샘 삼천포로 빠지라고 명상을 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 삼천포로 빠지는 걸 지켜 볼 수 있게 되면 딱 고만큼 경지에 이른건 아닐지…

  • 2022-09-16 21:38

    무아라는 너무 어려운 개념이 너무 이해가 잘 되었어요.

    호흡과 걷기가 '진화의 역사' 함께 진동하고 있다는 말씀이 너무 감동적이네요. 

    저도 명상을 통해 자연과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무아를 경험해보고 싶네요.

  • 2022-09-17 11:33

    쌤의 글을 읽고 있자니 왠지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천천히 숨쉬며 나무가 아주 많이 우거진 숲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상상이 들어요. 천천히 천천히 걷자..하며 말이죠.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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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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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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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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