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여성들은 정말 불행했을까] 스파이가 된 두 공주

고은
2022-09-08 23:18
404

* 20대 여성 페미니스트 고은은 <열녀전>을 읽고, 여성들의 팝박 받는 삶이 고대부터 이어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2022 청년 책의 해' 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이 글은 고대 여성들의 사회적인 역할을 오늘날 시각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리즈물입니다.

 

 

 

1. 바리스타 혹은 스파이 듀오

 

   초등학생들과 <열녀전>으로 수업을 하던 첫날, 친구들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그림 한 장을 보여줬다. <열녀전>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삽화였다. 산 길에 두 여자가 찻주전자를 들고 한 남자가 잔을 기울인다.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 세 사람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떤 관계일까?”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아주 낯선 것에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먼저 대답한다. “나는 이 두 여자가 바리스타인 것 같아. 새로운 커피가 나와서 지나가는 손님에게 마셔보라고 한 잔 주는 거지.” 친구들이 꺄르륵 웃으며 되묻는다. “바리스타요?” “커피요?” 과거에 바리스타는 없었을 테지만, 음료를 판매하는 누군가는 있었을 테니까.

 
 
 
 

   친구들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그림을 지긋이 쳐다보다 한 마디씩 보탠다. 어떤 친구가 두 여자가 건네는 찻주전자에 독이 들어있을 것이라 말한다. 뒤이어 찻잔을 기울이는 남자는 왕자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붙는다. 한 나라의 왕자를 독살하기 위해 스파이 둘이 출동했을 거란 말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은비(가명)가 이야기를 한번 더 뒤집는다. 은비는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혼자 책을 읽다가 부모님을 깨우는, 동화작가가 꿈인 친구다. “여자 둘이 왕자를 죽이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막상 왕자를 보니 마음이 바뀌어서 죽이지 않고 거꾸로 이중 스파이가 되는 거예요.”

 

   친구들은 그림을 보고 얼추 이야기의 전모를 꿰뚫었다. 남자는 왕자가 아니지만, 훗날 중국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성군이 된다. 여자 둘이 남자에게 건네는 것은 독이 아니지만, 남자의 처신과 관련된 음료는 맞다. 또 여자 둘은 남자를 죽이기 위해 온 건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스파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친구들은 이 셋이 어떤 사이인지는 맞추지 못했다. 이 셋은 부부다. 왜 친구들은 이 그림 속 인물들이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만약 내가 이들이 부부 사이라고 말했다면, 그때도 친구들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생각해낼 수 있었을까?

 

 

 

 

 

2. 전설로 남은 아황과 여영

 

   두 여자는 요임금의 두 딸인 아황과 여영이고, 한 남자는 순이라는 시골 농부다. 시골 농부가 두 공주와 결혼하게 된 건 순전히 그의 부모덕(?)이었다. 순의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것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순의 새어머니는 둔하고 어리석었으며, 배다른 남동생은 인생을 제멋대로 사는 망나니였다. 그럼에도 순은 집안에서 온화하게 가족을 대하였고, 새어머니가 배다른 남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 또한 원망하지 않았다. 마침내 순의 성품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나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당시는 한반도에 단군이 나타나기 훨씬 전, 맏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던 시대였다. 왕은 직접 왕위를 이을 재목을 찾아야 한다. 성군이었던 당시의 임금 요 역시 직접 다음 왕을 찾아 나섰다. 순에 대한 소문을 들은 요임금은 두 딸 아황과 여영을 시집보내 그가 집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피게 했다.

 

   공주로 살다가 농부의 아내가 된 이 두 여자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농부의 아내가 된 공주들은 분명 시골 집안 생활이 낯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황과 여영은 단출한 순의 집에서 겸손하고 공경하게 맡은 일을 다했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순은 두 부인을 크게 신뢰했다. 순은 아버지와 배다른 남동생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마다 아황과 여영을 후다닥 찾아가 물었다. “아버지와 배다른 남동생이 저기 있는 곡식 창고에 올라가 수리하라는데, 가도 괜찮을까요?”, “우물을 깊게 파라고 하는데, 해도 괜찮을까요?”, “술을 마시자고 하는데, 가도 괜찮을까요?” 거절하자니 곤란 해질 테고, 그냥 하자니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다. 이런 순의 이야기를 들은 아황과 여영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가야죠!”

 

   순은 걱정했던 것처럼 곡식 창고에 올라가자 화재를 만났고, 우물에 들어가자 빠져나올 길을 잃었고, 술자리에서 만취를 강요당했지만 매번 무사히 살아남았다. 곡식 창고에서 불이 나자 순은 지붕에서 두 개의 삿갓으로 몸을 가리고 뛰어내렸고, 깊게 판 우물에 흙이 쏟아져내려 파묻힐 뻔했을 때는 미리 파두었던 구멍으로 빠져나왔으며, 술을 마시러 가기 전엔 아황과 여영이 준 숙취해소제를 마시고 위험을 모면했다. 앞의 삽화는 숙취해소제를 건네주는 아황과 여영, 그것을 받아 마시는 순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순이 불리한 상황에서 현명하게 위기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아황과 여영의 조언 덕분이었다. 이에 순의 여동생이 순을 불쌍히 여겨 아황, 여영과 화합하였다. 죽다 살아난 순은 들판으로 달려 나가 울부짖었는데, 자신의 상황을 원통해하면서도 가족을 원망하진 않았다 하니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하다. 그런 순을 가까이에서 본 아황과 여영은 순의 성품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순은 천자의 재능이 있는지 확인받기 위해 국정을 총괄하는 중책에 임명되었다. 순은 이번에도 아황, 여영과 상의했다고 한다. 농부 출신이던 순이 나랏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쉽지 않았을 테니 아황과 여영의 도움이 유달리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황과 여영은 먼저 이뤄진 성품 테스트에서 심사위원 격으로 참여했다면, 그 뒤의 능력 테스트에서는 순과 한 팀으로 활동했다. 아황, 여영과 함께 까다로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순은 마침내 왕이 되어 고대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전설적인 왕이 되었다. 아황과 여영은 후와 비가 되어 <열녀전>을 비롯한 다양한 설화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3. 희생하지 않은 두 부인

 

   오늘날 결혼은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합,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일구어나갈 단위의 생성이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은 고대의 결혼은, 남자 집안으로 가야 했던 고대의 부인은 가정과 남편에 종속되어 희생하는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아황과 여영의 이야기도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불행한 결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공주가 아버지에 의해 시골 농부에게 시집보내지고, 심지어 농부의 아내로서 집안일을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만일 위 그림을 보여주며 이들이 부부 사이라고 먼저 말해줬다면 초등학생 친구들은 그림 속 여자들이 수동적으로 남편의 시중을 들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황과 여영의 결혼은 통념과 달랐다. 그녀들에게 한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왕 후보의 진면모를 그녀들이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온 나라가 파국을 맞이 할 수도 있었다. 좋은 평판으로 유명한 사람이 소문만 무성하다거나, 남들에게 보이는 행동만 꾸며낸다거나, 내실은 갖추지 못한 모지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요임금은 왜 그토록 중요한 일을 아황과 여영에게 맡겼을까? 고대 사람들은 사람의 능력과 됨됨이를 분별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성인만이 성인을 알아보는 법! 순임금은 두 딸을 크게 신뢰했던 것이 분명하다. 아황과 여영의 결혼은 중대한 업무를 위임받는 공식적인 행사에 가까웠을 것이다.

 

   초등학생 친구들이 말했던 것처럼 아황과 여영은 차라리 스파이에 가까우면 가까웠지 희생하는 부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들은 모진 시어머니에게 구박받지도 않았고, 남편 앞에 넙죽 엎드리지도 않았으며, 남편이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뒤치다꺼리를 하지도 않았다. 집안에서 괴롭힘 당한 것은 아황과 여영이 아니라 남편 순이었으며, 순을 죽이려던 사람은 계모가 아니라 순의 아버지와 배다른 남동생이었다. 이 이야기에는 ‘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을 만드는 악랄한 계모 캐릭터도 없고, 악랄한 새 부인의 손에 놀아나는 멍청한 아버지 캐릭터도 없으며, 모진 고난을 홀로 견뎌야 하는 며느리 캐릭터도 없다.

 

   물론 순의 새어머니 역시 남모르게 순 살해 계획에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 위기 상황은 ‘영악한 새어머니가 바보 같은 아버지를 속여 음모를 꾸몄다’가 아니라, ‘아버지와 배 다른 남동생이 집안의 장남을 죽이고 싶어 했다’이다. 또, 물론 그녀들은 집안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시켰기 때문이 아니었고, 홀로 집안일을 독박 쓴 것도 아니었다. 그녀들은 집 깊숙이에서 순의 성품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집안일에 성실히 임함으로써 집 안에서 순의 평소 발걸음이 어떤지, 화가 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원망의 마음이 일 때 어떻게 다스리는지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아황과 여영의 시집살이에서는 일일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는 ‘악랄한 혹은 전통적인 시집살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4.  스파이, 인사 담당자, 비선 실세

 

   아황과 여영은 희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했다. 어떻게 생판 남이었던 아황과 여영이 적극적으로 순의 집안 일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그 비법은 그녀들이 공주였다고 거만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았던 데에 있다. 아황과 여영은 집안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특히 순에게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순이 위급한 상황에서 그녀들을 찾게 된 건, 아황과 여영이 군더더기 없는 단호한 어조(”가야죠!”)로 상황을 선두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 덕분이다. 더 나아가 아황과 여영은 순의 집안이 탐욕으로 몰락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만약 요임금이 점찍어두었던 순이 죽임을 당했다면, 순의 집안과 그의 남은 가족들은 온전히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에서는 순이 아황과 여영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자 느닷없이 순의 여동생이 등장하여 아황, 여영과 화합했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다양한 버전의 순 이야기 중 순의 여동생은 <열녀전>에만 등장한다. 이야기의 후반에 이를 때까지 여동생은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가족이 순을 싫어할 때도 여동생의 흔적은 없다. 여동생의 이름은 계繫, 매다 혹은 묶다는 뜻으로 ‘매어 기르다’라는 뜻을 가진 毄자와 ‘실’이라는 뜻을 가진 糸자가 결합된 한자다. 어디에 매어 묶여 있었는지,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거의 노예와 같은 신세는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순의 여동생이 마침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도 아황, 여영과 연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마침내 그녀들이 집안의 판도 자체를 움직였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아황과 여영은 어찌 보면 1급 임무에 파견된 스파이 같고, 또 어찌 보면 안목이 뛰어난 인사 담당자 같고, 또 달리 보면 중요한 순간에 개입해 일의 흐름을 주도하는 현명한 비선 실세 같기도 하다. 그녀들은 아버지인 왕에게 큰 신임을 받고 일을 훌륭하게 처리하였고, 순의 목숨을 구하고 맡은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순을 살림으로써 괜한 욕심을 부리던 순의 아버지와 배다른 남동생이 제 명에 살 수 있게 해 주었고, 순의 여동생이 집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아황과 여영은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며 상황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갔다. 이야기를 읽으며 그녀들의 성품과 능력에 감탄하다 보면, 결혼한 고대 여성이 자신을 희생하는 능동적인 처지였다고는 말하는 것이 그녀들에 대한 모욕인 것 같아 말을 조심하게 된다.

 

 

댓글 3
  • 2022-09-13 09:39

    음...

    아황과 여영은 순임금이 죽은 후에 따라 죽은(강에 자신의 몸을 던진) 중국 최초의 여성들 아닌가유?

    유향 <列女傳>의 첫번째 인물인 (상징적이죠^^) 아황과 여영이 결국 첫번째 女였다는 점은, 시사적이라고 생각하는디... (유향은 어떤 여성주체를 원했을까, 라는 차원에서)

    • 2022-09-13 10:32

      순과 두 부인 이야기가 옛날 이야기에 가까워서 그런가, 죽는 장면을 포함한 여러 장면이 다양한 버전으로 있더라구요. 두 부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다, 순의 아버지와 새엄마는 어떻게 했다... 워낙 다양해서 이 글에서는 <열녀전>에 나온 버전으로만 풀어봤어요. 만약 두 부인이 따라 죽었다고 유향이 봤다면, 쌤 말마따나 또 다른 재밌는 해석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ㅎㅎ

       

      <열녀전>에 나오는 두 부인의 죽음 묘사: "두 비가 강수와 상수 사이에서 세상을 떠나자, 속칭 그들을 상군이라 불렀다."

      <중국신화전설1>(위앤커, 전인초 지음/민음사)에 나온 두 부인의 죽음: "그녀들이 상수에 도착하여 그 강을 건너는데 파도가 크게 일어 배가 뒤집어져서 그녀들은 그만 한을 품은 채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 2022-09-13 10:35

        두 부인이 죽는 모습이 여러 버전이긴하지만, 전부 장소가 같고 '상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점을 주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상군'이 민간의 신앙-문화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문화적 작용이 있었을까? 그러나 제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 질문으로만 남기고 가봅니다 총총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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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7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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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65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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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 조회 13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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