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와 불교산책 7회] 존재하는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요요
2022-07-25 11:45
433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성냄 때문에, 또는 미움 때문에 서로의 고통을 바라서는 안 된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없이, 원한없이, 증오없이, 온 세상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숫타니파타』 『자애경』)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서서

영주 부석사를 좋아한다. 산 중턱에 세워진 부석사는 일주문에서 법당에 이르기까지 계단식 구조로 되어 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안양루를 통과하면 그때 무량수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만이 아니라 떠 있는 돌, 부석(浮石)이 있다. 그 돌과 함께 당나라 여인 선묘의 의상대사를 향한 절절한 사랑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부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천년의 사랑 때문도 아니고,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국보급 보물인 무량수전과 아미타 여래상 때문도 아니다. 부석사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무량수전 앞에서 몸을 돌리면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다. 서두르지 않고 그 풍경을 오래도록 음미하며 세속의 번뇌로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으면 이제 법당으로 들어가 아미타 부처님을 만나야 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인 아미타(amita)는 산스크리트어로 무량한 수명[無量壽], 무량한 빛[無量光]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미타 부처님은 지복의 세계인 극락의 부처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을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전, 극락전이라고 부른다. 아미타불은 부처가 되기 전 법장비구로 불리던 수행자 시절에 고통을 겪는 이가 단 하나도 없는 불국토를 건립하기를 서원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번뇌가 씻겨나가기를 바라는 서원을 세웠다. 무려 5겁 동안 용맹정진 수행하여 법장비구는 마침내 그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번뇌와 괴로움에서 해탈한 세계, 극락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미타불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아무 조건 없이 지복과 평화의 불국토로 초대하는 자비의 부처가 되었다. 하여 아미타불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뜻을 가진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 존재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만트라가 되었다. 그러나 나무(namo), 즉 귀의는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것일 수 없다. 귀의는 내 마음을 다하여 아미타불의 서원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귀의란 아미타불이 법장비구 시절에 세웠던 서원을 기억하고 지금 나의 삶에서 구현하겠다는 발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아미타불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은 내 마음에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행을 실천하는 수행자로 살겠다는 약속과 다르지 않다.

 

 

자비와 사무량심 수행

아미타불은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대승불교의 등장과 함께 출현한 부처이다. 자리(自利)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타(利他)는 타자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개인의 구원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타자의 구원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공동체적 관점을 강조한다. 자리이타는 자리와 이타를 떼어내어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독립적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기(緣起)적 관점이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 사이의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이라는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새롭게 출현한 아미타불과 아미타불이 수행자 시절에 세운 자비의 서원은 그런 통찰을 신화적·종교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와서 자리이타가 전면에 대두되었다고 해서 자비가 대승불교만의 전유물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비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설해지는 붓다의 가르침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기불교의 사무량심 수행을 통해 붓다가 자비를 어떻게 설했는지 그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사무량심 수행이란 자애[慈], 연민[悲], 기쁨[喜], 평정[捨]의 마음을 넓혀가는 수행이다. 이 중에서 자애와 연민을 합쳐 자비라고 하지만 실은 사무량심 전체가 자비를 구성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자애 수행은 모든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는 수행이다. 이 수행으로 남에 대한 미움과 적의를 지워나간다. 연민 수행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잔인함을 제거하고 다른 존재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아파하는 수행이다. 질투와 시기심이 일어나면 우리는 남의 기쁨을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다. 기쁨을 닦는 수행은 질투심을 지워 내면서 다른 이의 성공과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수행이다. 평정 수행은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수행이다. 우월하다·열등하다·동등하다는 프레임을 갖고 있으면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마음에 빠져 평화를 잃어버린다. 평정 수행은 분별심과 경쟁심을 지워 나가면서 만물을 고루 평등하게 대하는 수행이다.

 

사무량심 수행은 ‘나’와 ‘내 것’에 고착되어 있는 자기애와 이기심 같은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 온 우주를 가득 채울 정도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넓혀가는 수행이다. 왜 사무량심 수행을 해야 할까? 남을 미워하고 남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질투하고 경쟁심에 사로잡히는 한 우리는 인색하고 쩨쩨하고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읽고 듣고 배운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번뇌에 빠뜨리는 삶으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남도 행복하기를 원하고 남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의 국량을 키울 때 비로소 우리 자신도 자애와 연민으로 충만해지고 탐·진·치가 없는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 『숫타니파타』의 『자애경』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어떤 살아있는 존재들이건,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조그맣거나 거대하거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태어난 것이나 태어날 것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 성냄 때문에, 또는 미움 때문에 서로의 고통을 바라서는 안 된다. 어머니가 자신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듯이, 그처럼 모든 존재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없이, 원한없이, 증오없이, 온 세상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서있거나 가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깨어 있는 한, 자애에 대한 마음집중을 닦아야 한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청정한 삶이라고 불린다.(『숫타니파타』 『자애경』 146~149)

 

온 세상에 대한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으라! 나의 행복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바로 이것이 중생구제에 온생을 바친 붓다의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 수행자였던 법장비구 시절에 세운 서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행복하라!’의 원형이 여기, 『자애경』에 있다.

 

                                                                       (부석사 아미타여래 좌상)

자비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말은 아름답지만 누구나 법장비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문제제기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 느끼며 사는 평범한 장삼이사들은 어떻게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 각자의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설하는 방편설법의 대가인 붓다는 탐·진·치에 젖어 사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자비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했다. 붓다가 활발히 전법 활동을 벌였던 곳인 북인도의 최강대국 코살라국의 빠세나디 왕과 말리까 왕비의 대화를 통해 붓다가 재가자에게는 어떻게 자비를 설했는지 알 수 있다. 빠세나디 왕은 끝없이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넓혀가려는 야망에 불타는 정복 군주였고, 말리까 왕비는 지혜와 신심으로 이름을 날린 붓다의 재가 제자였다.

 

[빠세나디]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

[말리까]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빠세나디]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소.”

대화를 마친 뒤 왕은 붓다를 만나러 갔다. 왕은 붓다에게 왕비와 나눈 대화를 말씀드렸다. 그때 붓다는 그 뜻을 알고 이와 같은 게송을 읊었다.

[붓다] 마음이 어느 곳으로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 되리.(『샹윳따니까야』 『말리까왕비경』)

 

말리까 왕비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빠세나디 왕을 위해 붓다는 그 대화의 의미를 게송으로 풀어주었다. 대개 우리는 아무리 다른 것을 찾으려 해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찾기 어렵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명, 그 생명을 지키려는 욕망과 감정이 가장 소중하다. 이로부터 누군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붓다는 똑같은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도착지가 달랐다. 나에게 내가 사랑스럽듯이 다른 존재에게도 그 자신이 사랑스럽다. 내가 나에게 소중하다면 상대방 역시 그러하다. 나는 남이 나를 해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마찬가지로 상대방 역시 누군가 자신을 해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 삶이 소중하면 남의 삶도 소중하다. 이로부터 붓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자비를 설했다. 붓다의 충실한 제자였던 말리까 왕비가 왕과의 대화에서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 역시 아힘사(ahimsa), 곧 비폭력과 자비였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 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삶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법구경』 130번 게송)

 

게송을 통해 알 수 있다시피 붓다는 우리의 살고자 하는 욕망,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감정을 부정하거나 죄악시하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내가 소중한 만큼 남에게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고자 했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남자든 여자든, 장애가 있든 없든, 많이 배운 자이든 아니든, 나이가 많든 적든, 동성애든 이성애든, 눈에 보이는 존재든 보이지 않는 존재든,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고 행복을 원한다. 적어도 그 점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거기에는 어떤 차별도 끼어들 틈이 없다. 누구나 모든 존재의 평등에 대해 성찰하고 존재의 평등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로부터 자비심을 키울 수 있다. 붓다에게 자비는 어떤 사람이 날 때부터 타고난 기질이나 품성이 아니었다. 자비는 자신에게 애착하는 정념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존재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성찰과 숙고를 통해 키울 수 있는 합리적이고 능동적인 감정이었던 것이다. 자비 수행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 자비의 영성가 달라이라마 역시 “자비심은 논리적 사유를 통해 개발되는 합리적인 감정”(『달라이라마의 지혜명상』 186쪽)이라고 말한다. 자비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자비는 숙고와 성찰의 결과로 자라나는 우리 마음의 역량이다.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나와 남이 같음을 먼저 힘써 수행해야 한다.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바라지 않는 것은 똑같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나와 같이 보호해야 한다.(『입보리행론』 8-90)

 

평등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개 법률적 평등과 정치적 평등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법 앞의 평등은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난민이나 불법 이주민은 쉽게 감금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며 추방된다. 그는 법의 보호 바깥에 있다. 시민의 권리도 다르지 않다. 권리의 평등은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한 권리라고 인정된 것에만 해당된다. 장애인의 이동권이 누구나 동의하는 상식이나 통념이 되지 못할 때 소수자의 권리는 다수를 위해 희생되어 마땅한 것으로 간주된다. 권리 대 권리가 부딪칠 때는 이기느냐, 지느냐의 이분법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 혐오가 판치게 된다. 그곳에는 시혜를 베푸는 동정은 있을지언정 자비는 없다.

 

그렇다면 국적, 성별, 계급, 나이, 장애 여부, 동성애·이성애를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천부인권의 이념은 어떠한가. 법적 평등이나 정치적 평등에 비해 진일보한 주장이지만 여기에도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다. 천부인권은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될 뿐 인간이 아닌 종(種)들을 배제한다. 자본보다 생명이라는 슬로건도 단지 인간의 생명 앞에서 멈출 위험이 있다. 비인간 존재들은 오직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돼지와 닭과 소는 인간의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다. 숲은 농작물을 기르기 위해 베어져야 하며, 만일 숲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종의 보존을 위해서이다. 바다는 인간의 식량창고이므로 보호되어야 하며 이산화탄소의 저장고로 의미 있다고 여겨진다. 이와 달리 평등심 수행은 자비심의 근거를 모든 존재의 평등에서 찾는다. 평등하므로 모든 존재는 고유한 삶의 의미를 갖는다. 평등심은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생명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고통을 피하려 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서 전제한다. 존재의 평등이야말로 사무량심 수행에서 평등심 수행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비심의 진짜 바탕이 아닐까.

 

일상의 자비, 어떻게 시작할까

내가 자주 가는 뒷산 산책길에 어린 도롱뇽이 사는 웅덩이가 있다. 3월 말이면 동그랗게 말린 도롱뇽 알집이 보이고, 4월이 되면 올챙이처럼 생긴 도롱뇽 새끼가 웅덩이를 헤엄친다. 점차 자라서 뒷다리와 앞다리가 다 나오면 도롱뇽은 웅덩이 밑을 기어 다니면서 슬슬 웅덩이를 떠날 준비를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도롱뇽은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았고, 도롱뇽 새끼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재미로 나의 발걸음도 잦아졌다. 그런데 유난히 심한 봄가뭄 탓에 웅덩이 물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와 내 친구들은 뒷산에 갈 때마다 물병을 들고 가서 물을 부어주기 시작했지만 웅덩이 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처럼 도롱뇽을 염려하던 분이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근처의 물이 풍부한 웅덩이로 도롱뇽을 옮기는 이사를 단행했다. 이제 한시름 놓았나 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다시 도롱뇽의 안녕을 걱정하는 여름을 보내고 있다.

 

 

급속히 진행되는 기후위기와 봄가뭄으로 도롱뇽이 사는 웅덩이의 물이 말라가는 동안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도롱뇽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수년전 천성산을 통과하는 터널을 막기 위해 지율스님은 40일이 넘는 단식을 마다하지 않았고, 도롱뇽의 친구들은 도롱뇽을 대신하여 터널공사를 멈추라는 소송을 벌였다. 나는 도롱뇽의 친구들을 응원하고 지지했지만 그때만 해도 도롱뇽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고, 도롱뇽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올해 봄 뒷산 도롱뇽의 안부를 걱정하면서부터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대부분의 도롱뇽이 멸종위기에 처한 보호종이라는 것과 인간의 무분별한 서식지 파괴로 도롱뇽이 속한 양서류 전체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나는 도롱뇽의 친구가 되고, 구조된 돼지 새벽이의 친구가 되고, 멸종위기의 종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자리이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롱뇽은 나로부터 아주 먼 거리에 있었던 비인간 존재였다. 그가 나의 삶에 들어온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뒷산 웅덩이에 살던 도롱뇽과의 그 우연한 마주침이 도롱뇽을 넘어 양서류로, 더 나아가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지구 역사상 여섯 번째 멸종위기에 대해서까지, 내 삶이 뭇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더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뒷산 웅덩이에 도롱뇽이 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내가 도롱뇽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 도롱뇽이 내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도롱뇽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내가 도롱뇽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기 이전에 도롱뇽의 존재 그 자체에 깊은 감사를 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없었다면 나의 우주는 지금보다 더 협소하고 더 황폐했을 테니 말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도롱뇽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뭇 삶들이 나를 살리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하며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점에서도 뭇삶들은 평등하다.

 

어쩌면 존재의 평등과 관련하여 내가 서야 하는 출발점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비심을 일으키려 애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무엇을 하려 하기보다 나를 위한 자비가 이미 내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가만히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쓰는 동안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닫고 나니 그동안 내가 번번이 제대로 자비의 마음에 가닿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자애경』을 떠올리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를 마음에 떠올리는 명상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서두르기만 할 뿐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타자를 향한 자비로 나를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했던 것은 자비로 나를 채우려 하기보다 이미 넘치도록 베풀어지고 있는 자비에 대해 명상하며 나를 비우는 것으로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에 대한 귀의 역시 그래야 할 것 같다.

댓글 5
  • 2022-07-25 16:34

    이미 베풀어지고 있는 자비 알아차리기!! 이것도 어렵겠다는 선입견이 있지만.......기억해볼랍니다^^

     

  • 2022-07-26 08:26

    부석사, 가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질문이 생겨요. 나에게 내가 가장 소중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는 명제로부터 자비심을 끌어내면.... 이게 공리주의와 어떻게 달라지는 건가요? (너무 뜬금 없어서 죄송해요^^)

    • 2022-07-26 09:42

      아, 저도 늘 생각하는 문제에요. 사성제로부터 출발하는 붓다의 가르침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는 어떻게 다르지? 그리고  피터싱어의 <동물해방>에서도 동물권의 근거를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제시하잖아요. 그래서 동물권을 생각할 때마다 불교의 자비와 피터싱어의 동물해방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죠. 이 글에서 '존재의 평등'과 자비를 연결시키면서도 계속 그 생각을 했어요. 다른 철학들과 불교적 사유가 어떻게 다른지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안다면 잘 설명할 수 있는지, 그런 부담을 늘 느끼니까요.

      일단 문탁님 질문에 대해서만 다른 점을 이야기하면 공리주의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가고, 비용과 이익의 비교나, 효율성의 계산으로 가는 것과 달리 붓다의 자비는 절대적 평등, 조건 없는 호혜성의 방향으로 간다고 대답하고 싶네요. 거기에는 어떤 계산도 끼어들 틈이 없다고 해야겠지요.

      피터싱어의 <동물해방>을 정독한 다음, 이 문제에 대해 언젠가 쓰고 싶네요.^^

      • 2022-07-31 22:41

        앗 피터싱어의 <동물해방> 정독과 공리주의에 대한 논의,, 저도 같이 하고 싶어요!

  • 2022-07-31 22:43

    나무아미타불이 그렇게 멋진 말인지 몰랐어요! 가끔 자비에 대해 생각하거나 자비명상을 할 때가 있는데, 때때로 '내가 감히 자비를..?'하면서 부끄러워지더라고요..ㅎㅎ

    저도 자비로 저를 채우고 싶어서 앞지르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며, 세상에 이미 베풀어지고 있는 자비에 '나무아미타불' 해야겠어요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기린
2024.05.10 | 조회 3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4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14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6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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