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16회] 우리에게 ‘사과’가 필요할 때 / <시>(2010)

청량리
2022-04-30 21:09
350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과가 필요할 때

시 Poetry(2010) | 감독 이창동 | 주연 윤정희 | 135분 | 15세 이상

 

 

 

 

 

 

영화는 개천에서 떠내려 오는 주검을 한 아이가 우연히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미’ 우리는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럴 때 스토리는 ‘누가, 왜 죽였는지’ 밝혀나가는 방식으로 대부분 전개된다. 이는 어쩌면 우리의 관심 역시 대부분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범행 동기는 무엇인지, 어떻게, 어디서, 왜!!!

그러나 이 영화의 질문은 애초부터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서 중학생 손자와 함께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66세 미자(윤정희). 그녀가 '시'를 배우기 시작한 건 자신이 알츠하이머 초기임을 의심한 이후였다. 스스로 ‘시인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해보니 잘 안 써진다. 그러나 그건 사물의 이름이나 적절한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그녀의 증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자가 참가하는 문예교실에서 김용택 시인(극중 김용탁)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그럴 때 느껴지는 무언가를 적은 것이 바로 '시'란다. 집으로 돌아온 미자는 식탁에 앉아 사과를 바라보거나 혹은 나무 밑에서 앉아 시가 떠오르길 기다리지만, 여전히 ‘진짜’를 보지 못하고 그들을 어떤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것들은 아직 그녀의 시를 위한 사과이고, 나무일뿐이다.

 

 

이어서 영화는 앞서 죽은 아이가 미자의 손자와 같은 중학교 여학생이며, 손자가 성폭행 가해자 중 한 명임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등교 전 손자의 아침밥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했던 미자는 충격에 빠진다. 이번에는 죽은 여학생에 대한 애도의 시를 써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여학생의 사진을 훔치고 그 아이의 집을 찾아가 보지만, 김용택 시인의 관점을 빌리자면 그 아이는 미자에게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사과’에 가까웠다. 이 사건을 통해 감독이 말하려는 시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짜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 <시>(2010)는 이창동 감독의 전작인 <밀양>(2007)과 함께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연장선에 놓여있다. 정치가 영화를 선동적으로 다루는 방식과 유사하게 종교 역시 영화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종교영화’는 대부분 특정 종교의 복음과 전도를 목적으로 하며, 신에 대한 믿음이 곧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영화 <밀양>에서 원하는 돈을 못 받은 유괴범은 신애(전도연)의 아들을 죽이게 되고, 이미 교통사고로 남편마저 잃은 그녀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절망에 빠진다. 이때 그녀 앞에 교회의 문이 열리고 신애는 새 삶을 얻은 듯하다. 신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무엇으로 보장받을 수 있고, 그녀는 어떻게 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까?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는 것이 자신에게 보여준 신의 응답이라 생각한 신애는 감옥을 찾아간다.

그러나 철창 너머의 그 유괴범 역시 자신도 하나님을 만나 용서를 받았다는 신앙고백을 듣자 신애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를 용서하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그게 신이 자신에게 보여준 구원의 길이라 생각했다. 남편과 아들을 데려갔고 자신마저도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신애는 삐뚤어지기 시작한다. 집에서 ‘사과’를 깎아 먹던 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으며 위를 바라본다. “(하나님) 보고 있어요?” 당신의 구원 따위는 이제 필요 없어.

두 영화에는 유사한 실패가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유괴범(밀양)과 여학생(시)을 ‘진짜로’ 보지 못하고, 구원과 시의 ‘대상’으로 마주했기 때문에 신애는 구원받지 못했고, 미자도 아직 시를 쓰지 못한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어려운 난제다. 종교는 인간들에게 평온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듯하다. 종교영화는 그러한 신앙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거대한 핵무기나 아주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요점을 놓치고 있다. 누군가 신에게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에게 인내심을 줄까, 아니면 인내심을 발휘할 기회를 줄까? 사랑을 주세요, 라고 한다면 묘한 사랑의 감정을 줄까,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줄까?”(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중에서) 신애와 미자의 실패를 돌이켜보면, 결국 풀리지 않는 난제의 ‘해법’이 아닌, 그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태도와 마주하려 할 때 성찰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밀양>과는 달리 <시>에서는 기독교나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배경도 없지만,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짙은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시>에서 종교적 성찰의 문제를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시가 죽어가는 이 시대에, 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시일 수도 있고, 영화일 수도 있고, 우리의 눈에 미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란 아름다운 것이다. 작지만 가치 있는 것,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자는 죽은 소녀를 떠올리기 위해 몸을 던진 다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애꿎은 모자만 강물에 빠진다. 노트를 꺼내보지만 비까지 쏟아지자 미자는 온몸이 젖은 채 허망하게 휘둥거린다. 도대체 이게 뭐람. 비에 젖은 노트를 들고 바위에 걸터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말없이 바라보는 미자. 그때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날 미자는 자신이 간병하고 있는 김노인을 찾아가 노골적으로 원하던 그의 성적욕구를 해결해 준다.

 

 

이 부분은 <밀양>에서 신애가 유괴범을 만나러 감옥으로 찾아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세한탄과 김노인에 대한 약간의 연민 그리고 성폭행당한 소녀를 이해하고픈 다소의 절박함이 버무려져 있다. 난 김노인보다는 나은 인간이니까. 그러나 그 껍데기를 벗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죽은 소녀의 사진을 외면하는 손자의 태도를 마주했을 때, 죽은 소녀의 엄마 앞에서 치매증상으로 시답지 않은 꽃타령이나 늘어놓았을 때, 합의하겠다고 찾아온 그 소녀의 엄마를 정신 차리고 마주했을 때, 그러나 돈이 없다는 핑계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을 때, 미자는 다시 김노인을 찾아가 돈 5백만원을 요구한다. 지난 번 대가로 날 협박하는 거냐는 김노인의 말에 그러든가 말든가, 미자는 어떻게든 소녀의 엄마에게 합의금을 줘야했다. 소녀의 죽음으로 마주한 건 아름다운 시 한 편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었다. 미자는 이제 소녀에게 시 한 편을 건넨다. ‘아네스의 노래’

“아니에요.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겠다고 마음을 갖는 게 어려워요.”

<밀양>에서 신애는 결국 정신병원에 가지만, <시>에서 미자는 시 한편을 완성한다. 아무래도 이창동 감독은 존재론적 문제를 종교적(외부적) 구원이 아니라 내면적(종교적) 성찰을 통해 찾으려 하는 듯하다.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서 드러내는 것인데, 시야말로 그런 예술의 의미를 담고 있죠. 예술을 한다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고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미자가 시를 쓰느냐, 소설을 쓰느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당연히 시를 써야 하죠.”

여기에 예술과 종교의 공통분모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응시하며, 그러한 태도로 현실과 마주한다. 종교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채 개인의 구원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예술도 현실에 발을 딛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다. 어쩌면 영화가 종교든 정치든 그 수단으로 포섭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그러한 현실에 바탕을 둔 예술성이 아닐까? 그렇기에 예술이 그리는 세계가 더욱 절망적일수록 희망 없는 세계와는 정반대의 꿈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 양미자 ‘아네스의 노래’ 중에서 -

 

 

 

댓글 3
  • 2022-05-01 10:45

    <밀양>도 대단한 영화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시>가 더 좋았어요.

    저도 영화 <시>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늘 가득해요. 늘 실패하지만^^

    청량리 글 잘 읽었어요. 고마와요

     

    피에쑤: 근데 문단별로 한 줄씩 띄는 게 더 가독성이 있을듯^^

  • 2022-05-02 09:46

    전 영화 <시>를 보고나서 한동안을 미자에 감정이입되서....

    전 영화도 다큐처럼 보나봐요..🍎

  • 2022-05-03 07:3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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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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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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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70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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