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15회] 고대하라, 연대의 힘/켄 로치 <미안해요, 리키(2019)>

띠우
2022-04-17 21:48
297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고대하라, 연대의 힘

켄 로치 감독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2019)>

 

일한 만큼 돈 버는 세상?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혁신과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시장경제는 전 세계를 뒤덮어가며 노동과 토지를 사회로부터 분리해냈고,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물론 산업혁명이 인류에게 커다란 이로움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지나치게 빠른 속도의 변화는 기존 사회질서를 붕괴하고 해체시키며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렸다. 그로 인해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일어나면서 변화 속도를 늦추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주목할 것은 기술진보를 둘러싸고 이중적 운동(시장자유화와 사회보호운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지나치게 빠른 성장속도를 경계하는 사회보호운동으로써 정치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주인공 리키는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전 세계에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인해 해고된 중년 남성이다. 사람들 속에서 지쳐버린 그는 자기 사업을 갖고 싶어 택배업에 뛰어든다.  그는 면접에서 자신의 장점으로 성실함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정된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더 이상 성실함이 무기가 되지 않는 시대다. 리키의 아내 애비는 간병노동자로 밤늦게까지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한다. 최저 근무 시간이 0시간인 ‘제로아워 계약’에 따라 근무시간이 따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원칙적으론 일하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애비는 법정노동시간보다 훨씬 많은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플랫폼 노동시장에 뛰어든 리키 역시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데 쓴다.

 

사춘기인 아들 세브는 부모의 뜻대로 살아주질 않는다. 세브가 벽에 그래피티를 위해 페인트를 훔치자, 리키는 공부하지 않으면 처참한 삶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브는 대학 학자금 갚느라 인생을 살아가야 하냐며 정작 노예처럼 사는 것은 리키라고 말한다. 이어 그 선택을 한 것은 리키 본인이라고 퍼붓는다. 딸 리사는 리키가 택배일을 하기 전의 따뜻했던 아버지로 돌아오길 바라며 애원한다. 시간이 돈인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못한 채 리키와 애비는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지쳐간다. 영화 초반, 플랫폼 관리자인 멀로니는 면접과정에서 리키에게 ‘자기사업자’를 강조했다. 리키는 고용기사가 아니기에 계약서 작성이나 출근카드가 필요없다. 본인의 성실함에 따라 벌이가 달라진다는 달콤한 말, 그렇기에 삶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버릴 수도 없다. 결국 리키는 자리를 2분만 비워도 울려대는 단말기에 매여 빈 물병에 소변을 볼 수밖에 없다.

 

희망보다 빠른 변화의 속도

 

켄 로치의 영화들은 이 땅에 존재하지만 소외되는 삶을 끊임없이 포착해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가난한 이들의 삶을 배제한 채 시행되는 신자유주의 복지시스템의 이면을 다루었다면, <미안해요, 리키>는 요즘 들어 심각한 상황을 보고 있는 ‘플랫폼 노동’의 이면을 비추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기대와 함께 공유경제라는 말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플랫품 노동은 임시직 위주의 긱 이코노미(gig economy)와 맞물려 돌아간다. 기존의 노동 시장이 정규직 중심이었다면, 긱 경제에서는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공급되는 프리랜서 혹은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다. 이런 구조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한 리키는 대체기사를 구하지 못하면 벌금과 벌점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리키가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이유다.

 

영화를 보다가, 시장경제하에서는 산업의 변화 속도가 빨라질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산업혁명 후 20세기 초에 빠르게 진행된 기술진보와 시장경제의 확대로 인한 사회혼란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게 되었고 이는 파시즘을 낳았다. 그리고 <런던 프라이드>나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이 되었던 1980년대는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니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이는 석탄중심에서 석유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변화하면서 일어난 사회구조의 개편이었다. <미안해요, 리키> 에도 애비가 간병하는 로지와 함께 1984년 광산파업 때 찍은 사진을 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와 함께 <미안해요, 리키>의 주된 내용은 4차 산업혁명의 기술발전과 관련된 경제구조와 사회문제를 다룬다.

 

 

사회혼란을 막기 위해 자기조정시장에 맡기든, 국가차원의 보호가 일어나든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결과는 동일하다. 성장 속도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빨라지면 문제가 발생한다. 남편의 사고로 절망하는 애비가 분노를 표출할 대상마저 없다. 새벽에 몰래 운전대를 잡는 리키를 향해 돌아오라며 절규하는 가족들, 사회의 보호막이 사라져버린 현실에서 삶을 지속하기 위한 개인의 안녕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이 시장경제에 순응하며 시장의 부속물로 살아가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거대한 전환>의 저자 칼 폴라니는 묻는다. “삶의 터전이냐 경제 개발이냐”고. 그는 이어 말한다.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 때 만약 그것이 방향도 통제할 수 없고 속도도 지나치게 빠르다면 가능한 한 그 속도를 늦추어서 공동체의 안녕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함께 행동하라

 

장 뤽 고다르는 현대 사회를 반영하는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로서 “모든 영화가 정치적”이라고 말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는 이미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일뿐 정치를 움직이는 힘을 즉각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매체라는 영화의 특성상 소비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편의 영화로 우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는 것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물결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켄 로치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좋은 질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많은 사람들이 토론을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면 정권의 정책과 어떤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보수 정권은 여전히 (노동자의) 배고픔을 무기로 사용한다. 단 1인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나 책, 음악 등 문화로 토론을 시작할 수 있지만 변화를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정권의 생각을 영화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에 반대하는 의견은 커지고 있다."

 

이 말을 통해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던 켄 로치가 다시 카메라를 든 이유를 알 수 있다. 그의 영화는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에 ‘정치적’이다. 켄 로치 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리키 같은 긱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려면 당장 무료급식소로 달려가 보라”고 한다. “자원봉사자, 여러 기관들의 연대를 볼 수 있다”며 그는 개인 중심으로 고립된 삶의 방식은 큰 문제이며, 그게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고 함께 활동하기 어렵게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그는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 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다”라는 말로써 사회가 자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다. 1984년, 비록 실패했지만 광산파업을 둘러싼 사람들의 연대가 보여주는 의미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플랫폼 시장은 놀랄 만큼 성장하였다. 반나절 만에 택배가 집에 도착한다. 혼밥이 자연스럽고 집에서 개봉영화를 본다. 온라인 수업이 가능해 학교에 가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화는 점점 가속화된다. 거기에는 돈만 있으면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정말 아무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사람이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기 마련 아닌가. 명예든 과시든 누군가는 있어야 한다. 라면도 혼자보다 여럿이 먹을 때 맛있어지는 경험, 그것은 물질적 풍요로 가질 수 없는 정서적 만족감을 동반한다. 경제적 이익이 아닌 사회 속에 실재하는 관계를 통해 우리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영화 원제 <쏘리 위 미스드 유(Sorry We Missed You)>는 택배기사들이 주문자를 만나지 못했을 때 남기는 메모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에게 서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지 말라는 감독의 메시지일 것이다. 그는 ‘연대’의 힘을 믿고 있으며 나 역시 그러하다.

 

댓글 5
  • 2022-04-18 07:17

    사회속에 실재하는 관계를 실감하기위한 우리 모두의 실행들, 그 안에서 들끓고 있는 다종다양한 분투들도 함께라면 감당해볼만 하겠죠^^~

  • 2022-04-18 15:47

    이 영화 아직 못 봤는데 남편과 같이 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어요^^

  • 2022-04-19 15:48

    가능한한 그 속도를 늦추어서 공동체의 안녕을 보호해야한다.

     

    이 영화 급 호감이 가는군요

    이번주에 봐야겠어요

  • 2022-04-21 08:13

    넘 마음 아플까봐 못보고 있는 영화..

    언제쯤 보게될지 …

  • 2022-04-21 18:45

    전 이 영화 보고 우리나라 택배노동자들이 생각나서 소심하게(?) 문에 간식거리 걸어뒀어요.
    그것도 연대의 한 방법이라는 띠우샘의 얘기에  에이 뭔가 더 거창해야 하지 않나 라고 했지만, 돌아와 생각해보니 연대가 맞네요.
    지금 다시 그 마음이 옅어져서 그렇긴 하지만...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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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35
토용의 서경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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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37
봄날의 주역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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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88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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