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카메오 열전 5회] 양화는 왜 공자를 만나고 싶어했을까

진달래
2022-04-0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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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양화를 피했다

 

양화가 공자를 만나고자 했다. 그런데 공자는 매번 그를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양화는 공자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삶은 돼지고기를 선물로 보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선물을 한 사람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 예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양화를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난처해진 공자는 꾀를 내어 자기도 양화가 없는 틈을 타 그의 집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례를 하고 그의 집을 나서는데, 공교롭게도 막 집으로 돌아오던 양화와 마주치게 되었다. 공자를 본 양화가 그를 불렀다.

“이리 와 보십시오. 제가 당신과 할 말이 있습니다.”

공자가 다가가자 양화가 말했다.

“보배를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내버려 둔다면 인(仁)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나랏일 하기를 좋아하면서 때를 놓친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이 흘러가니,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도 장차 벼슬을 하겠습니다.”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謂孔子曰 來 予與爾言 曰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曰 不可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 曰 不可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曰 諾 吾將仕矣) 『논어』 「양화,1」

 

양화(陽貨)가 직접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논어』에 이 한 편뿐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서로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선물을 주고, 또 인사를 가는 장면이 한 편의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했다. 양화는 「자한」편에 공자가 광 땅에서 죽을 뻔 했던 일(子畏於匡)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광 땅 사람들이 공자를 양화로 잘못 보고 그를 감금하고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나쁜 짓을 했으면 비슷한 이만 보고도 죽이려고 달려들었을까. 계손씨의 가신이었던 양화가 반란을 일으키고 노나라에서 쫓겨났다는 걸 알고 나선, 뭐 이런 사람이니 공자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양화에게 공자가 벼슬을 하겠다고 대답한 것도 그저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양화는 누구인가

 

기원전 505년, 노나라 권력자였던 계평자가 죽었다. 가신이었던 양화는 난을 일으켜 그의 아들인 계환자를 감금하고 자기와 동맹을 맺게 하여 권력을 잡았다. 이 때 양화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계손씨와 맹손씨를 억지로 진(晉)나라의 사신으로 보내기도 하고, 노 정공(定公)과 삼환(三桓/노나라 환공의 후손으로 맹손, 숙손, 계손의 세 집안을 말한다.)이 함께 양화와 맹약을 맺기도 했다. 양화는 힘이 커지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계손씨의 집안사람들을 차츰 몰아냈다. 나중에는 아예 계환자를 비롯한 삼환의 적자(嫡子)들을 죽이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리를 채우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계환자가 도망을 가서, 맹손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양화는 정공과 숙손씨를 협박해서 대항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양관으로 쫓겨 간 양화는 그곳에서 삼환과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듬해 결국 제나라로 도망을 갔다. 이 때가 기원전 501년이다.

제나라로 도망을 간 양화는 제 경공(景公)을 만났다. 경공에게 자기와 함께 노나라를 치면 세 번 만에 정벌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솔깃한 제안에 마음이 동한 경공이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양화를 섣불리 받아들였다가 입을 화를 생각해야 한다며 말렸다. 이에 경공이 양화를 잡아서 변방에 가두어 버렸다. 양화는 짐수레에 숨어서 도망을 갔고, 송(宋)나라를 거쳐 진(晉)나라로 들어가 조간자(조앙)의 가신이 되었다.

이 후 조간자에게 위(衛)나라에서 쫓겨난 태자 괴외가 찾아왔다. 위 영공이 죽고, 괴외가 위나라 돌아가고자 하니, 조간자가 양화에게 호위를 맡겼다. 그러나 위나라 사람들은 괴외의 아들인 첩을 후계로 세웠고, 양화와 괴외는 국경 지역인 척 땅에 머물러야 했다. 14년 뒤, 괴외는 결국 난을 일으켜 아들 첩을 내쫓고 위나라 장공(莊公)이 된다. 그러나 이 난에 양화는 보이지 않는다. 『춘추좌전』에는 괴외와 척 땅으로 간 지 8년 뒤, 송나라를 치려는 조간자에게 양화가 주역 점을 쳐 송나라를 칠 수 없음을 간언하는 내용이 잠깐 보이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양화가 그 후 무슨 일을 했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마지막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조간자를 따라 다시 진나라로 돌아간 양화는 그의 가신으로 살다가 죽은 듯하다.

『춘추좌전』 속의 양화는 『논어』 속 양화와 달랐다. 등장하는 부분도 꽤 많았고, 당시 노나라의 최고 권력자였던 계손씨 집안을 누르고, 제후인 정공도 좌지우지 할 만큼의 권력을 가진 자였다. 그것도 근 4~5년 간, 노나라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렇게 보니, 앞서 『논어』에서 보았던 그 문장이 새삼 달리 보였다. 양화는 왜 그렇게 공자를 만나려고 했을까? 아니 공자는 왜 그렇게 양화를 피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의도치 않게 만났던 두 사람의 대화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자네 능력이 있으니 이제 나를 도와서 벼슬을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내가 계속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공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양화가 집권하고 있을 때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알겠습니다. 나도 장차 벼슬을 하겠습니다.”라는 공자의 대답은 진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양화가 공자를 부른 이유

 

양화가 가신 출신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랐으나 도망자가 되어 떠돌다 다시 가신이 되는 것과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또 송나라, 진(晉)나라, 위나라를 돌아다니며 종횡무진 활동한 그의 행적은 춘추시대 말기 막 등장하기 시작한 사(士)계층의 모습을 한 눈에 보여 주는 듯하다.

춘추말기, 제후의 힘을 능가하는 대부의 등장은 이미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노나라의 삼환이나, 진(晉)나라의 조간자 등이 그러했다. 그런데 이때 양화의 난은 이제 대부(大夫)의 힘을 넘는 가신(家臣)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극상의 흐름은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양화뿐 아니라 이후 노나라의 공산불뉴, 그리고 진(晉)나라의 필힐 등이 일으킨 반란이 그러하다. 이들은 양화와 마찬가지로 각각 공자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양화가 만나고자 했을 때는 피했던 공자가 공산불뉴나 필힐이 불렀을 때는 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이 때 늘 자로가 막아서는 데, 예를 들면 필힐이 불렀을 때 가려고 하는 공자에게 예전에 선하지 않은 무리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더니 반란을 일으킨 자에게 왜 지금 가려고 하시냐고 묻는다. 이때 공자는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으나 이제 자기의 뜻이 견고하여 다른 사람에게 물들지 않을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찌 조롱박이겠느냐? 어찌 한 곳에 매달려 있어서 아무도 먹을 수 없겠느냐?”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양화,7」

 

공자는 늘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노나라에서 쫓겨난 14년 간, 공자는 자기를 등용해주는 군주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누구도 공자를 흔쾌히 써주지 않았다. 그런데 제후들이 등용하기를 꺼려했던 공자를 양화나 공산불뉴, 필힐 등은 왜 불러들이려고 했을까?

양화, 공산불뉴, 필힐, 공자는 모두 대부의 가신 출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귀족인 대부와 달리 대부분 평민출신이었다. 따라서 혈통이 아니라 실력으로 자기의 힘을 키워나갔던 사람들이다. 공자는 가신이 된 적이 없으나 그의 아버지가 맹손씨 집안의 하급 무사였다. 또 공자는 제자들을 받을 때 출신을 가리지 않았으며 이들은 실력으로 발탁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이때 많은 제자들이 대부의 가신이 되었는데, 아마도 이런 점에서 양화와 같은 이들이 공자를 자기와 같은 세력으로 여겼던 듯하다.

한편으로 당대 권력가에게 저항했다는 점도 공통점으로 볼 수 있다. 기존에 있던 삼환의 세력을 통째로 바꾸고자 한 양화의 반란이나 공자가 대사구가 되었을 때 삼환이 가지고 있던 성을 헐어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은 겉으로 보기에 ‘삼환을 친다’는 측면에서는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이들이 세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때 노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양화가 쫓겨나 다시 진(晉)나라의 대부인 조간자의 가신이 되는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양화가 불렀을 때는 가지 않았던 공자가 공산불뉴나 필힐이 불렀을 때는 가려고 했던 것을 보면 세상의 흐름이 이미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공자 역시 바꿀 수 없는 흐름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등용되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한 번 펼쳐 보고자 한 듯하다. 하지만 공자는 그 누구에게도 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이익을 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이들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자로는 혹여 가고자 하는 마음을 비치는 공자를 막았을까? 앞서 제 경공이 양화를 받아들이고자 할 때 제나라 대부였던 포문자가 양화에 대해서 말한 부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나라는 아직 차지할 수 없습니다. 위아래 사이가 좋고 백성과 서민들이 화목하며 큰 나라인 진나라를 잘 섬기고 있으며 천재지변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나라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양화는 지금 우리 제나라 군사를 움직여서 지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나라가 피폐해지면 대신들은 틀림없이 많이 죽게 될 것인데 양화는 그 틈에 자신의 거짓 모략을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양화는 노나라의 계손씨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계손씨를 죽이려 하였고, 노나라를 불리하게 하여 우리 환심을 사려 합니다. 그는 부유한 자는 친히 여기고 어진 사람은 친히 여기지 않는 자인데 임금께서는 그런 자를 어디에 쓰겠다는 것입니까? 임금께서 계손씨보다 부유하고 노나라보다 큰 나라를 가지고 계시니 양화가 우리나라를 뒤엎고자 하는 것입니다. 노나라는 이제 그의 해를 면하게 되었는데 임금께서 그를 받아들이시면 그 해롭지 않겠습니까?” 『춘추좌전』「정공,9년」

 

공자와 양화가 삼환을 치려고 한 것은 겉으로 같아 보이지만 내용은 다르다. 공자는 그들의 힘을 약화 시켜서 제후와 대부 사이의 질서를 다시 세우려고 한 것이라면, 양화는 단지 그들의 자리를 빼앗아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포문자의 양화에 대해 평도 얼핏 그의 제안이 제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고, 노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듯이 또 제나라에서도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춘추좌전』에 나오는 양화에 대한 평들은 대체로 일관되게 그가 이익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가 진나라의 조간자가 양화를 받아들였을 때 “진나라 조씨의 집안은 대대로 시끄러울 것이다.”라고 한 말 역시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논어』에 공자의 제자인 자장이 공자에게 ‘선비(士)’에 대해서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선비가 어떻게 하면 통달(達)했다고 할 수 있냐고 묻자, 공자가 네가 생각하는 통달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자장이 나라 안에서나 집 안에서 명성(聞)이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공자가 너의 대답은 명성이 관한 것이지 통달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통달한다는 것은 본바탕이 곧고 의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헤아리고 얼굴빛을 잘 살피며, 신중하게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니,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통달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통달하게 된다. 명성이 있다는 것은 얼굴빛은 인을 취하나 행실은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도 의심조차 없으니,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명성이 있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명성이 있게 된다.”(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 「안연,20」

 

『춘추좌전』을 보면 양화가 등장하는 기간이 20여년이 넘는다. 나름 그가 당대에 명성을 떨친 자로 기억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공자가 말한 문(聞)과 달(達), 즉 명성만을 얻은 것과 통달한 것의 차이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삼환을 치려고 했던 것도 제나라에 가서 노나라를 칠 수 있다고 했던 말도, 명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기의 이익만을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노나라와 제나라에서 쫓겨난 양화가 다시 진나라 조간자의 가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매우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달(達)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자는 제대로 등용된 적이 없고 문(聞)이라고 할 수 있는 양화는 계속 누군가에게 등용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명성만 있는 것과 통달한 것을 구별하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진다.  

 

댓글 3
  • 2022-04-04 16:41

    진달래님은 왜 양회일화에 꽂혔는지 궁금해지네요^^

  • 2022-04-04 17:35

    아~ 베란다에 앉아 진달래선생님처럼

    단정히 차분히 읽어보았어요. 너무 어렵습니다.

    나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을 

    헤아릴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의 이익을 비껴갈수 있을지…

     

     

  • 2022-04-18 07:08

    사대부가 부상하는 시대의 변화, 양화와 공자가  그 변화에 어떻게 응전했는가의 문제, 그 차이는 사욕과 더불어 더 많은 것들이 얽혀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의 내용을 앞으로 더 채워봅시다~

영화대로 42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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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4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9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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