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남은 이야기> 굿바이 길드다 (문탁)

문탁
2022-03-25 12:06
362

문탁

 

 

  길드다의 4년 실험이 막을 내렸다. 공식적으로 말한다면, 길드다는 각 구성원의 조건과 욕망에 따라 두 팀으로 분화한다. 한 팀은 길드다 아젠다 활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고, 다른 한 팀은 유튜브 활동에 집중할 것이다. 길드다의 현재 역량과 상황을 반영한 구조조정이고 전진적 개편이다. 

 

  그러나 이런 쿨한 공식적 멘트 이면에서 내 속은 좀 복잡하다. 단순하게 말하면 길드다 4년 중 처음 2년간은 재미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는데 이에 비해 후반부 2년은 힘은 힘대로 들고 마음은 고달팠다. 나는 대체로 답답했고 속이 터졌는데 그런데도 이 감정을 청년들에게 전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약간의 회고는 불가피하다. 4년 전 길드다는, 4인(5인)의 청년 + 1인의 사장으로 구성된 “인문학 스타트업”으로 출발하였다. 처음부터 정체성이 애매하긴 했다. 4(5) + 1의 구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건 5+2가 될 수도 있는 것일까? 혹은 10+1도 괜찮다는 것이었을까?  ‘인문학 스타트업’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지만, 그것이 인문학 프로그램을 주요 사업모델로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출발한 건, 내가 경험했던 인문학 공동체에서의 청년들의 위치 때문이었다.

 

  나는 청년들이 중, 장년 중심의 인문학 공동체에서 ‘치이는’ 사례를 계속 봐왔다. 다시 말하면 성인 중심의 인문학 공동체에서 청년은 시작에서뿐만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계속 ‘선생님(들)’께 배우고 혼나는 미숙한 학인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 같았다. 게다가 문탁네트워크의 경우엔 ‘선생님’에 더해 (감수성의 측면에서) ‘엄마’들도 많았다. 언젠가 지원이가 말했던 것처럼 “백 명의 엄마들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 같은 문화가 우리에겐 있었다. 계몽적 구도! 혹은 유사 가족주의! 이런 식으로는 청년들은 영원히 자립하기 힘들다. 나는 청년들을 어른들의 ‘감시’의 눈에서 떼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 밑천도 없는 청년들끼리만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게 가능할까? 어떤 연대의 형식이 요구되는 것일까? 나는 계몽적 배치보다는 차라리 도제적 관계를 맺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일정 기간 바싹 수련시키고 그리고 하산시키자. 그것이 내가 애매모호한 길드다를 만들게 된 맥락이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르게 흘렀다. 우선 “Out of Sight, Out of Mind”랄까, 일상의 공부와 활동에서 청년들과 부대끼는 일이 사라지자 어른들의 청년들에 관한 관심도 빠르게 사라졌다. 난 친구들에게 섭섭했지만, 공동체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다사다난한 곳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 다양한 어른들과의 접속이 사라지자 청년들은 약간 섬처럼 고립되었고 감정이든 인간관계든 순환이 정체되었다. 물론 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탁의 선생님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지역으로, 나아가 전국적으로 다른 청년들을 만나서 접속할 것. 그렇게 확장된 청년들의 새로운 집합적 목소리로 문탁선생님들과 다시 연대할 것! 첫 2년간은 우리가 작정한 길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코로나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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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비학술적 학술제. 마지막 기념사진. 꼰대는 나 하나다. 하하

 

 

  그런데 정말 코로나 때문이었을까? 뭔가 엇박자가 나고 재미가 없고 리듬이 안 생기고 결과적으로 활동도 위축되고 그에 따라 돈도 바닥이 나기 시작한 게 정말 코로나 때문이었을까? 후반기 2년 나를 괴롭힌 정념들 – 이 아이들은 공간을 유지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걸까? 이들 사이에 우정이 쌓여가고 있는 걸까? (문탁의 한 회원은 내가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자 일갈하여 “관심 없어요. 무엇보다 걔네는 자기들끼리 별로 안 친한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이 아이들은 길드다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정말 길드다를 하고 싶긴 한 걸까? -을, 코로나로 인한 정세의 변화 때문이라고, 고로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안이한 평가가 아닐까?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 했을까? 두 개의 길 중 선택해야 했다. 첫 번째 선택. 더 많이 개입할 것. 나라도 길드다 현장을 지킬 것. 새로운 활동을 구성할 것. 멤버를 바꾸거나 확대해서라도 길드다를 재활성화 할 것! 두 번째 선택. 망하든 흥하든 청년들 스스로 알아서 하게 더 발을 뺄 것. 결과적으로 나는 두 번째를 택했다. 그리고 청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난 나에게 “그 결정이 최선이었을까? 올바른 것이었을까? 혹시 힘들어서 그냥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을까?”라고 묻고 있다. 80년대식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내 안의 ‘청산주의!’ 내 속이 복잡한 첫 번째 이유이다.

 

  길드다 청년들은 길드다를 통해 꼬뮨적 주체로 성장하지 못했다. 나는 개개인의 성취(책을 내고 앨범을 내고 강의를 하고...)를 도왔지만, 첫 사장 칼럼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길드다를 콜드플레이 같은 ‘밴드’로 키우진 못했다. 

 

  “어쩌면 내가 브라이언 이노같은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길드다가 ‘콜드플레이’ 같은 밴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다고? 오해는 금물이다. 내가 그 밴드를 사랑하는 것은 그 밴드가 잘나가서가 아니라 그 밴드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장수하는 밴드이기 때문이다. 취향과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따로 또 함께’라는 관계의 기술을 함께 훈련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길드다는 무엇보다 청년들이 ‘함께 사는 곳’이다. 서로의 차이가 더 멋진 화음의 생산으로 나아가는 그런 밴드이다. 하여 그곳에서 나는 청년들과 솔직하게 대화하고, 청년들을 지적이고 감성적으로 자극하고, 그들과 함께 다양한 실험을 끊임없이 추가해가되, 그 자체만을 온전히 즐기는, 그런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런 프로듀서, 바로 그런 어른이다. 그것보다 지금 이 나이에 더 잘 사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하니까! ”(<아젠다>0호, 사장칼럼, “나는 사장이다” 중)

 

 

  청년들이 꼬뮨적 주체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가 코로나 때문인지 길드다라는 조직의 구조 때문인지 개개인의 역량 때문인지 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분명하게 말하긴 어렵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섞여 있겠지만 '전부 다'라고 퉁치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다. 나에겐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다만 이 마지막 글을 통해 나는 좋은 말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 길드다는 중요한 실험이었지만 결코 성공하진 못했다고. 어떤 점에서 우리는 실패했다고. 그리고 길드다 청년들이 이 점을 뼈아프게 생각하면 좋겠다고.  꼬뮨적 주체가 되지 않으면, 친구를 돌보고 관계를 가꾸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이 미친 세상에서 우린 살아남기가 정말 힘들다. 가진 것이 정말 없는 청년들에겐 더욱 그렇다.

 

  우현, 고은, 지원, 명식, 그리고 동은. 건투를 빈다.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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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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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35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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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3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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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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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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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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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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