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남은 이야기> 아젠다, 글쓰기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김지원)

문탁
2022-03-25 11:55
210
김지원

 

 

  4년간의 길드다, 2년간의 <아젠다>를 맺는 글이라고 생각하니 그럴싸한, 감동적인 말들을 남겨야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라거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라거나 ‘사랑을 하면 이별이…’하는 뻔한 이야기를 하며 스스로 눈가가 촉촉해지는 상황이 된다. 여러 번 글을 지웠다. 아직까지 충분히 정리가 되지 않은 마음이, 뻔하고 쉬운 답으로 가려는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무언가 맺는말보다는, 나에게 놓인 새로운 국면이 무엇인지에 대해 남기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명식과 함께 <아젠다>를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기로 했다. 

 

  길드다가 애초 <아젠다>를 기획한 계기는, 코로나-19의 유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집합 금지로 인해 계획했던 세미나와 강의가 줄줄이 취소되었고,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오프라인 기획들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세상이 멈췄어도 어떻든 돈을 벌어야 했고, 공부를 하고 글을 써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유료 회원제 메일링이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음에도 생각보다 회원이 모이지 않았다. 글도 문제였다. 돌아가며 메인 글을 썼지만, 늘 바빴다. 충분히 공부하고 생각하며 써낸 글이라기보다 마감을 맞추어 쳐낸 글들이 되었다. 발행 1년을 맞을 즈음 고민 속에 독자와의 인터뷰도 진행해 보았다. 글이 어렵다, 길다, 가벼웠으면 좋겠다, 코너를 줄여도 좋다…. 애정 어린 피드백들이었다. 이를 받아들여 대담이나 길드다의 일상적인 고민들을 전하는 방향으로 개편을 시도했으나, 결국 써왔던 방식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각기 다른 관심과 역량을 가진 네 명이 비슷한 분량과 무게의 메인 글을 써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과, 월 1만 원 후원에 합당한 메일링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형식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이 큰 벽으로 작용했다.

 

  이와는 별개로 2021년 초 외부 단체에서 길드다에 원고를 청탁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메일링을 포트폴리오로 사용하기 위해 그 목차를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한 달 한 달 급히 썼던 글들을 다시 훑게 되었다. 어쨌든 글이 쌓였고, 옅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것들, 명쾌하진 않지만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보였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크지만 적합한 관점이 제공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것들이 주로 우리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목차는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결합되어 꽤 즐거운 상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사회의 여러 사안들에 있어 자극적이고 이분화된 시점만을 제공하는 미디어와, 대안이 될 만한 적절한 스피커, 혹은 플랫폼의 부재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나는 우리가 만든 목차를 보며 <아젠다>가 이와 관련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충분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개편 이후 ‘공정’과 다가올 ‘대선’을 시리즈를 기획했던 것도 그러한 생각의 연장에서였다. 그간의 공부가 우리 자신의 무엇과 더 큰 관련이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과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장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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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식과 내가 물론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젠다>의 공동 발행인으로 지속하겠다는 것에 동의한 지점은 아마도 계속 써야 한다는 것,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으면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음 아젠다는 큰 틀에서는 메일링에서 블로그 연재로, 유료에서 무료 구독ㅡ자율 후원 형식으로 변화를 계획하게 되었다. 접근성과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그 밖에도 우리가 가졌던 한계를 넘고, 앞선 즐거운 상상을 현실화할 계획을 논의 중이다. 기존 메일링을 모두 공개로 아카이빙하고 이를 우리의 자기소개서 삼아 더 다양한 필진들과 접촉해 일종의 글쓰기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 블로그 운영에 있어 편집이나 브랜딩 관련 업무를 주변 관계들로 분산해 우리가 잘하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아젠다>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더 큰 장으로서 세미나와 강좌를 기획하는 것…. 그러니까 무엇보다 <아젠다>가 일방적인 발신의 매체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플랫폼’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공론장이 된다면 좋겠다. 다른 게 아니라, 쓰고 읽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더 많은 쓰고 읽는 사람들이 모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 일들은 아주 조금씩 천천히 진행될 예정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길드다에서 쓴 글들을 블로그에 아카이빙 하고, 명식과 내가 우리 스스로 즐겁고 의미 있는 글을 쓰는 것으로부터. 작지만 꾸준하게. 그래서 돈은? 음. 조금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문득 <아젠다> 2.0이 지금까지의 길드다와는 무엇이 다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길드다는 “인문학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4년이 지난 지금 그에 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능하다. 우리 4명, 그리고 동은이와 문탁샘, 우리 모두 그간 인문학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런데 4년이 지나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어떻게?’다. 인문학이라는 범주는 너무 크고, 먹고산다는 것은 너무 다양한 ‘어떻게’를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길드다, <아젠다> 2.0의 시작은 그 질문을 각자의 방식으로 변주하고, 더 구체화하는 것일 테다. 명식과 나는 글쓰기를 통해 그 질문을 돌파해 보려는 것이다. “글쓰기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은 아마 각자의 욕망을 따라 길을 걸을 우현과 고은, 문탁 선생님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여전히 우리의 가장 의미 있는 네트워크, 필진, 아니 친구들이다. 분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빠른 시일 내에 이들의 소식을 또 새로운 <아젠다>에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지금까지 글을 읽고, 피드백을 주고, 응원을 보내준 여러분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무턱대고 글을 써달라고 문자를 할 수도, 후원을 해달라고 전화를 할 수도 있다. 기쁘게 맞아주시라 부탁드린다. 안녕도, 헤어짐도, 이별도 없이 다음 달, 매번 발행되던 20일, 블로그를 통해 <아젠다> 2.0이 이어진다!

 

 

준비 중인 아젠다 블로그 구경하고 이웃신청하기! ☞http://blog.naver.com/agenda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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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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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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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1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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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 조회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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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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