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드다-남은 이야기> 휴경을 앞두고 (차명식)

문탁
2022-03-25 11:51
219
차명식

 

 

2018년, 길드다가 ‘청년 인문학 스타트업’을 표방하며 첫 기치를 올렸다.

 

 2020년, 길드다의 목소리로서 ‘아젠다’의 첫 호가 발간됐다. 

 

 그리고 길드다 5년 차, 아젠다 3년 차인 올해 길드다와 아젠다는 함께 그 첫 장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작에 임한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자면 길드다는 ‘청년’, ‘인문학’, ‘자립’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행한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의 토양이었다. 이 표현은 꽤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길드다를 만들 당시의 소개 글을 살펴보면 “길드다는 대학도 회사도 아니지만 우정으로 맺어진 일과 지식의 네트워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제도 교육)과는 다른 형태로 함께 공부하는’ 네트워크이자 ‘회사와는 다른 형태로 함께 일하며 자립을 추구하는’ 네트워크라는 뜻이다. 즉 학문의 탐구와 물질적 삶의 조건들(물론 후자는 경제적 측면을 포함한다)을 한데 추구하되 이미 널리 알려지고 확립되어 있는 기존의 방식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길드다는 모든 면에서 실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문학으로 돈을 어떻게 벌 것인지, 번 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모자라는 수입은 어떻게 채울 것인지, 업무를 어떻게 분담하고 또 협업할 것인지……무엇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무엇을 할 것인지’도.

 

  ‘보통 다 그렇게 한다’가 근거가 될 수 없는 시도들이었기에 길드다의 활동은 항상 예상치 못했던 기쁨의 순간들과 그보다 좀 더 많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맞닥뜨렸다. 마지막으로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활동을 되새기면서 길드다-아젠다 1.0을 마무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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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 CUP-CASE

 

  2019년도 미학 세미나는 말 그대로 ‘미학’을 주제로 한 여러 텍스트들을 함께 읽고서 그 텍스트들을 바탕으로 공동의 전시를 기획해 올리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세미나는 아주 긴 호흡으로 진행하였는데 2월에 첫 번째 시즌 <모던, 포스트 모던>을 시작해 4월 말에 마무리하고, 다시 5월 말에 두 번째 시즌 <예술과 권력>을 시작해 7월 말에 마무리하고, 그로부터 다시 수개월 동안 호흡을 맞춰 전시를 기획하여 최종 결과물을 연말 ‘비학술적 학술제’ 때 발표함으로써 그야말로 한 해 전체를 다 쓰는 대장정이었다. 심지어 그 사이사이에 멤버들끼리 함께 다른 전시들에도 가보고 여름에는 합동 MT까지 다녀왔으니 문탁네트워크의 어지간한 하드코어 세미나보다도 더 빡빡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빡빡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미학 세미나는 길드다의 활동들 중 가장 긍정적인 의미로 내 기억에 남은 활동이다. 어떤 점에서 그랬는가 하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신선함’이라는 측면에서 그러했다. 미학이라는 분야 자체도 꽤 생소한 것이었지만 세미나에 참여한 다양한 면면들이 이전에 내가 문탁네트워크와 길드다에서 접하지 못했던 화학작용을 느끼도록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자리에 완전히 처음 만난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익숙한 길드다 멤버들은 물론 재영과 요선, 규혜처럼 틈틈이 길드다에 드나들던 친구들도 함께했다. 그러나 기존에 얼마나 익숙한 면면인가와 상관없이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멤버들과 접속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음을, 새로운 시각과 담론들을 공동으로 생산해 내고 모두 속에서 스스로의 능력이 증대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음을 이 세미나를 통해 느꼈던 것이다.  

 

  거의 일 년에 걸쳐 진행된 활동이었으니만큼 힘든 순간이 없지는 않았다. 낯선 만남은 자연히 가치관의 충돌을 야기했고 때때로 그것이 길어질 때면 한없이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다만 그 끝에 결국 ‘컵’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했을 때, 각자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경계 위에 올라서는데 성공했을 때, 마지막까지 그 길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 CUP-CASE라는 도착점에 무사히 안착했을 때 느낀 기쁨은 그 힘들었던 시간들을 감수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연결망을 형성한다는 것, 그 연결망 속에서 함께 일한다는 것. 그 가능성을 알려준 기쁨의 만남이었기에 2019년의 미학 세미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내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2018 - 2021 : 공동 글쓰기

 

  2019년도 미학 세미나가 길드다에서 했던 활동들 중 가장 즐거운 기억이라면 2018년도부터 작년까지 꾸준히 진행해온 공동 글쓰기는 가장 힘겨웠던 (말해두지만 ‘나쁜’이 아니다) 기억 중 하나로 내게 남아있다. 

 

  길드다에서 글쓰기는 매우 주요한 활동 중 하나이며 멤버들은 이 아젠다 연재를 비롯해 길드다에서 수많은 글들을 썼다. 그중에서도 공동 글쓰기는 각자의 책을 내는 것을 목표로 저마다의 주제를 가지고 꾸준히 글을 쓰는, 그리고 그 결과물을 ‘북앤톡 팀’의 선생님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검토하여 완성시키는 활동이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당시에는 힘들긴 해도 그럭저럭 할 만은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북앤톡 선생님들의 뼈를 깎는 노고와 태산 같은 인내심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었지만 함께 쓴 글을 검토하는 날은 대체로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다. 글의 진도가 다들 좀처럼 나가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글을 써오는 사람 입장에서도, 글을 읽고 피드백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지난번과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할 때가 많았고 무언가 착착 쌓여나간다는 느낌보다는 계속해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떨 때에는 단순히 글에 들인 노력이 부족해서 그럴 때도 있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손을 댄 흔적이 보이는데도 답보 상태인 경우가 더 많았으며 또 그럴 때가 더 나쁜 결과를 불러왔다. 노력을 해도 좀처럼 나아가질 않기에 당사자도 옆에서 보는 사람도 지쳐서 작업의 강도가 떨어지는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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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앤톡 선생님들은 손을 놓지 않으셨고 그 고난의 시간을 기어이 뚫어내고서 나온 책들이 있었다. 힘든 과정이 있었던 만큼 더욱 귀중한 책들이었으나 언제까지고 이런 과정을 계속해서 밟을 수는 없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각자의 일단의 글들이 어느 정도 지점에 이르렀을 즈음 우리는 북앤톡 선생님들 없이 우리끼리 글을 보기로 했지만 추진력은 점점 더 떨어졌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글을 다 마무리하지 못한 채 올해를, 길드다-아젠다 1.0의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환기, 변주, 그리고 계절

 

  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 둘을 꼽긴 했으나 꼭 저 두 활동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있어 길드다에서의 기쁨과 슬픔의 순간을 돌아보면 항상 비슷한 지점들이 있었던 듯하다. 

 

  기쁨의 순간, 이 네트워크와 만남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능력이 함께 증대된다고 느꼈던 그러한 순간들에는 새로운 맥락들이 자아내는 신선함과 그 신선함을 가지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가기에 충분히 여유로운 조건들이 있었다. 설사 좌절을 겪어도 그것이 낯선 좌절이었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 문제에 도전할 수 있었고, 그 도전에서 또 미끄러지더라도 다시 또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볼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슬픔의 순간에는 그러지 못했다. 반복되는 좌절의 양상이 있었고, 그 좌절에 초조함을 느끼게 만드는 바꾸기 힘든 조건들이 있었다. 그것은 무력감을 불러일으켰고, 활동의 동력을 상실하게 했으며, 결국 길드다-아젠다가 1.0 활동을 마무리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물론,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최상의 조건만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큰 전환이 - 환기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낯선 좌절을 기대할 수 있는 좀 더 과감한 변주를 시작할 계기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러한 순간이 다가오는 것은 어떤 인위적 선택의 결과라기보다는 수명이나 계절의 흐름과 같이 한 관계, 집단, 연결망이 자연스레 맞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글의 서두에서 나는 길드다를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의 토양이라 불렀다. 지력이 다하면 흙은 쉬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그 땅이 실패한 땅이라서가 아니라, 다시 새 싹들을 틔워낼 힘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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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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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17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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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1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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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4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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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79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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