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 42길 8회]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롤랑 조페 <킬링필드>(1984)

청량리
2022-01-03 07:22
286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카메라로 드러나는 질문의 태도

|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 | 롤랑 조페 감독 | 1984

 

 

 

 

 

 

영화 <킬링필드>는 1973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합니다. 인접한 베트남에서 전쟁에 패한 미국이 막 철수할 무렵이었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캄보디아 ‘론 놀’정권의 세력도 약해지고, 론 놀 역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무정부 상태의 캄보디아를 장악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드니(샘 워터스톤)는 급박한 캄보디아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수도 프놈펜으로 날아갑니다.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는 현지통역인 겸 기자인 프란(행 S. 응고르)은 비행기가 연착되고, 지프차들이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뭔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합니다. 그의 예상대로 그날, 크메르 루즈군을 섬멸하기 위한 폭격이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수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왼쪽이 시드니, 오른쪽이 프란

 

다음 날 두 사람은 함께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려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사건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방해로 미군 헬기를 이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난 기자라고, 기자!!” 물론 소용없습니다.시드니는 미군 대령에게도, 프란에게도 있는 대로 짜증을 냅니다. 현장에 가는 일을 간곡히 부탁해도 모자랄 판에, 특종 때문인지 투철한 기자정신 때문인지 시드니는 시종일관 프란에게 날이 서 있습니다. 결국 프란이 사방팔방 뇌물까지 써가며 현장으로 갈 수 있는 루트를 겨우 알아내고, 두 사람은 처참한 현장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시드니의 돌발행동으로 두 사람은 크메르 루즈군에게 잡히고 목숨까지 위태로워집니다. 물론 프란이 또다시 사정사정한 덕분에 겨우 살아남게 되죠.

 

영화 <킬링필드>(1984)를 시작으로 <미션>(1986), <시티오브조이>(1992) 등 굵직한 걸작을 연출한 롤랑 조페 감독. 그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눈높이의 시점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구도로 이룹니다. 다소 단조롭게 보일 수도 있으나, 지루하지 않고 원만한 흐름을 유지하며 연출하는 게 롤랑 조페 감독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영화 초반 군인들과의 협상이 잘 안 된 프란과 그에게 윽박지르는 시드니가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감독은 다음 날 잔혹한 현장으로 어떻게든 떠나려는 두 사람을 아름다운 노을을 뒤로하고 실루엣처리 합니다. 자막과 소리만 없애면 생뚱맞게 어느 휴양지의 모습 같습니다. 어쩌면 18세기의 남미(미션)나 20세기의 인도(시티오브조이), 동남아(킬링필드)는 롤랑 조페 감독에게 있어서 영화의 배경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선구자 혹은 지식인, 구원자인 서구 백인과 그 대상이 되는 지역의 원주민들의 구도는 그의 세 편의 영화 속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 세 편의 영화 이후 그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스크린에서 사라집니다.

 

두 사람의 대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석양의 배경

 

영상의 구도는 화면 내 인물과 사물을 배열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그 구도에 따라 내용은 관객에게 다르게 전달되기 때문에 영상의 구도는 감독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과도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감독이 갖고 있는 질문의 태도는 카메라를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영화 <킬링필드>를 통해 롤랑 조페 감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제이슨 본> 시리즈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맷 데이먼이 다시 만나 화제가 된 영화 <그린 존>(2010)에 등장하는 ‘그린 존’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뒤 바그다드 궁을 개조한 미군의 특별 경계구역입니다. 그 안에는 미군 사령부 및 이라크 정부청사가 자리하며 고급 수영장과 호화 식당, 마사지 시설, 나이트클럽 등이 있으며, 이슬람 국가에서는 금지된 술까지 허용되는 안전지대를 말하죠. <킬링필드>의 프랑스대사관은 정도의 차이가 많으나, 분명 캄보디아 내 ‘그린 존’, 안전지대입니다. 그러나 안전지대라 하더라도 미국에 우호적인 캄보디아인이 크메르 루즈군의 압박 속에서 버티고 살아남기란 쉽지 않습니다. 담장을 사이로 천국과 지옥이 마주하게 되죠. 결국 프랑스대사관에 억류된 서구인들만 고국으로 돌아가고, 프란을 비롯한 캄보디아인들은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탈출과정에서 프란은 끔찍한 '킬링필드'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킬링필드>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면, 영화 <그린 존>의 이야기는 이라크 전쟁입니다. 둘의 공통점 중 하나는 미국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는 거죠. 미 육군 로이 밀러(맷 데이먼) 준위는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상부의 정보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이에 밀러는 미군의 정보에 의심을 품죠. 이때 이라크 지역주민인 프레디(칼리드 압달라)가 정보를 제보하고, 밀러는 후세인 정부 고위인사들의 모임을 급습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프레디는 자신이 미국을 돕는 게 아니라고 선을 긋습니다.

“왜 이라크의 문제를 당신들 미국이 해결하려고 하나? 난 당신에게 돈을 바라고 제보를 하는 게 아니다. 이라크의 독재정권이 물러나길 바란다. 난 이라크를 사랑한다.”

프레디를 만난 후로 밀러는 충격을 받습니다. 상부의 정보와는 달리 대량살상무기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으며, 자신이 이라크에서 하고 있는 일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질문합니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뛰어다니며 밀러의 뒤를, 이라크의 뒷골목을 쫓아다닙니다. 밀러의 혼란, 이라크의 불안한 상황, 프레디의 두려움 등이 흔들리는 카메라 구도 속에 잘 드러납니다. <킬링필드> 속의 시드니-프란과의 관계는 <그린 존>의 밀러-프레디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질문은 서로 다르죠.

 

너무나 어이없는 결말, <이매진>이라는 노래가 이렇게 부끄럽게 느껴지다니....

 

어쩌면 롤랑 조페 감독에게 필요한 건 시드니를 통한 변명과 자책이 아니라 밀러와 같은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의 연출은 더욱 더 실망입니다. 크메르 루즈군에게 잡혀간 프란은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탈출에 성공합니다. 시드니는 곧 바로 태국 국경으로 건너갑니다. 결국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 프란을 보자마자 시드니는 사과하지만, 프란은 뜬금없이 “용서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둘 사이로 존 레논의 <이매진>이 맥없이 흐르며 영화는 끝납니다.

시드니는 미국으로 돌아와 프란을 찾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용하죠. 수용소를 겨우 탈출해 태국 국경까지 오는 건 오로지 프란의 몫이었습니다. 시드니의 기자상 수상식에서 친구인 사진기자 알은 프란을 이용한 거라며 시드니를 비난하지만, 그는 울면서 항변합니다. 자신이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고 시드니는 자책하기도 하죠. 그러나 수많은 제3세계를 식민지로 만들고 침공했던 서구사회에게 필요한 건 ‘변명’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그에 비해 롤랑 조페 감독은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불편함을 서둘러 해결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이후 영화들 속에서 성직자와 원주민(미션), 의사와 농부(노동자)(시티 오브 조이) 등의 구도가 계속 유지되면서 롤랑 조페의 영화들은 ‘백인우월주의’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영화 <킬링필드> 역시 그러한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영화로 프란을 연기한 응고르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합니다. 극중 시드니가 기자상을 받으며 기사의 절반 이상은 프란의 도움으로 쓰였다는 수상소감을 전하죠. 이 영화 역시 프란을 연기한 응고르에 절반 이상을 기대고 있지만, 캄보디아 출신인 그는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지는 못합니다. 더욱 안타깝게도 그는 미국에서 1996년 크메르 루즈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총에 피살됩니다. 영화 <킬링필드>는 끝났고, 시드니와 프란은 상봉했지만, 캄보디아는 내전의 상처가 아직까지 아물지 않았습니다.

 

 

 

 

댓글 2
  • 2022-01-06 11:15

    고등학교 때 단체관람으로 본 영화.

    지금은,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대한극장에서 울리는 헬기 소리가 진짜인 줄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만 있습니다. 

    옆에서 애들이 자꾸 울어서 오히려 슬프지 않았던... 

    저 해골 무더기, 진짜 무서웠어요. 

  • 2022-01-19 22:24

    저두 이 영화 단체로 봤던 기억이 나네요

    엄청난 해골더미 속을 지나가던 장면도...

    줄거리는 생각이 잘 안 났는데.이 글을 읽으니 뜨문뜨문 떠오르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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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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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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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85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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