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양생에세이 ③] 공생 딜레마 - 현민

인문약방
2022-01-02 20:38
329

1.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숲은 생각한다’라는 이 짧은 문장은 내 안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나는 이 문장을 말할 때 꽤 희망적이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보다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을 더 많이 마주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 말이다. 정상성을 모방하며 종종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만날 때마다 세계가 협소하게 느껴졌다. ‘숲은 생각한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인 나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고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있는 유일한 자기들selves이 아니다.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자기self라는 개념이 나온다. ‘자기’는 우리가 흔히 주체라고 생각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기호작용을 하고 표상하는 모든 존재를 지칭한다. 비인간 존재도 ‘자기’로 명명되며, 숲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숲 속의 수많은 존재들은 살아있는 ‘자기’다. 그러면 이 세계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도덕성이 존재하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인류가 이 지구 위를 걷기 전에는 도덕성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성은 우리와 이 행성을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인간적인 것들이 비인간 자기들의 것을 무시한 채 이 세계의 오랜 생태계를 바꾸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 세상의 도덕으로 해석하고 답을 찾는건 너무 부족하다.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 잣대가 허상이기도 하거니와 비인간 자기들은, 어쩌면 인간도 그렇게 따져지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 에두아르도 콘은 숲으로 들어가 숲 속의 자기들을 밝혀내고자 했다면, 도시에서 자라고 살아가는 나는 새로운 고민에 맞닿게 됐다. 인간만이 가득해 보이는 이 도시의 비인간 자기들은 모두 안녕할까?

 

 

 

 

 

 

2. 피해자이며 구원받는 자와 가해자이며 구원자

 

유독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 길을 걷다가 차에 치인 고양이를 발견하거나, 길을 잃어 보이는 강아지를 만나는 일. 인도 한가운데서 죽은 비둘기를 보거나, 도로 한복판에서 멧꿩을 마주치는 일.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 다친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면서 병원비로 있는 돈을 몽땅 쓸 각오를 했고, 길 잃은 강아지는 제 발로 집을 찾아가기를 바랬다. 죽은 비둘기를 묻어주고 싶지만 만질 수가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어 꿩을 마주치고도 떠나버렸다. 이 도시에서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그들을 만날 때 나는 자주 당황스러워진다. 그들이 너무 살아있어서, 또는 너무 죽어있어서 나는 내가 한 선택들과 이 세상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도시에 살지 않았다면 그중 일부는 조금 더 수월하게 지나쳤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인간만이 가득해 보이는, 그러나 비인간 동물들과도 함께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그들은 금방 바스라질 것 같다.

 

 

 

어떤 동물들은 집 안에서, 인간 가족이 되어 살아간다.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상식이 된 만큼 비인간 동물과 함께 사는 일은 흔해졌다. 사람들은 동물을 ‘키운’다. 비인간 동물은 인간처럼 대해 지고 인간으로 키워진다. 인간은 본인을 엄마/아빠, 언니/오빠의 역할로 위치 짓고 동물들은 자연스레 동생, 아기로 부른다. 비인간들은 이성애 정상 가족의 역할을, 정상적인 인간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취약한 존재, 어리고 부족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아기가 되어, 오이디푸스화 되어 인간과 관계 맺는다.

 

또 어떤 동물들은 인간들의 집 밖에서, 매일 생사를 오간다. 집 밖의 동물들은 그야말로 피해자가 된다.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느 날 그 길에서(2006)>는 로드킬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세 명의 연구원의 자취를 따라간다.

 

"사람들은 다른데도 많은데 왜 하필 동물들이 도로로 올라와서 차에 치여 죽냐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어요. 행동반경이 1.5km으로 가장 적은 너구리조차도, 도로를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어요. 수많은 야생동물이 잠자고, 짝짓기하고, 숨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서식지 유형이 필요한데 야생동물도 도로가 싫음에도 살아가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도로를 오가는 거죠."

 

며칠 전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운전자로써 이동을 하기 위해 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미 차에 치여 죽은 시체들을 지나치면서, 도로의 쓰레기들을 보며 시체일까 움찔거리는 내가 방관자 같이 느껴졌다. 잠재적 범죄자 같기도 했다.

 

고속도로가 아닌 나의 동네에서 비인간 동물을 만날 때도 고민은 이어진다. 이 길 잃은 강아지를 유기견 센터에 신고하면 2주 안에 안락사를 당하겠지? 하지만 이 길 위에 있으면 차에 치이거나 보신탕 재료가 될 수도 있겠지? 이 동물들을 그곳에 그대로 두고 오는 것은 존중일까, 방치일까? 아니면 그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내 세계에 끌어들이는 것은 개입일까, 상생일까? 왜 도시에서 동물들은 언제나 피해자일 수밖에 없을까? 왜 나는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 구원자가 되나? 도로에 들어가면 위험한 걸 알지만 도로를 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차에 치인 동물들처럼, 인간의 것들은 그들의 삶에 너무 많이 개입되어 있다. 비인간 동물은 피해자이면서 구원받는 자가 되며 인간은 가해자이며 구원자가 된다. 정녕 비인간 동물은 도시에서 ‘자기’로써 대해질 수 없는 걸까?

 

 

3.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키니까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초반에는 이런 독백이 나온다.

 

‘다카가 숲 싸워라. 스즈가 숲 싸워라. 홍군이든 청군이든 어디든 져라. 패배한 너구리는 죽어버려라. 다카가 숲은 오늘 없어졌다. 스즈가 숲은 내일 없어진다. 남은 너구리는 살 곳이 없다. 남은 너구리는 어디로 가나? … 패배한 너구리는 죽여 버려라. 모두를 위해서 죽여야 해! 살아남아 봤자 소용이 없다. 남은 너구리는 신중히 행동하여 새끼를 안 낳도록 해야 한다. 새끼를 낳아봤자 소용이 없어. 너희가 살 숲이 없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도쿄 인근 산에 살던 너구리들이 도시화 개발로 인해 터전이 없어져 인간들에게 대항하여 생존 대작전을 펼치는 이야기이다. 영화 초반 도시화 개발이 시작되면서, 다카가 숲과 스즈가 숲에 살던 너구리들이 영역싸움을 벌일 때 나이 많은 너구리 할머니가 나타나 북을 치며 독백을 읊는다. 할머니의 호통을 듣고 단결한 숲의 너구리들은 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그들은 인간연구 5개년 계획에 돌입하고, 수년간 금지되어 있던 변신술을 배워 인간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변신술을 익힌 너구리들은 공사현장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겁주고, 나무를 자를 수 없게 몸으로 버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결말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시도에도 인간들은 숲을 없애고 도시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끝에서 변신술이 불가능한 너구리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다 차에 치여 목숨을 잃고, 변신술이 가능한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위장하여 인간으로 살아간다.

 

결국은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걸까? 너구리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살아남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 그러나 너구리들이 죽어야만 하는 세상이 인간에게 좋을 리 없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적에는 어떤 동물들이 살았을까? 그것이 인간이더라도, 인간이 아닌 동물이더라도 분명 한 종의 동물만이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무서워했을 테고, 절대로 침범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었을 테고, 또 가끔은 서로를 벗 삼아 살았을 것이다. 분명 그 시절의 동물들은 귀여운 존재도, 불쌍한 존재도 아니었을 것이다.

 

언젠가 sf소설에서 얼룩말들이 집단 자살하는 부분을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이 아니라면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만으로도 너무 슬펐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먼저 겪고 있을 고난에 대해 생각해본다. 또 인간 중에서도 재난을 가장 먼저 겪을 이들을 생각해본다. 가난한 내 친구들이, 앞으로도 가난할 나와 내 친구들이 이 땅에 살았을 비인간 동물들처럼 쫓겨나지 않을 리 없다. 살아있는 것들은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을 바꿔내는데, 책 속 몇 사람들은 지구에 사는 짐승들이 자살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세상에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있다면 사는 것이 좀 더 쉽겠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아서 이 글은 답도 없이 질문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딜레마를 겪는 것이 삶을 살아내는 과정이 될 테다. 그럴 때, 삶이 자주 흔들릴 때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킨다’는 문장을 기억하며 지구에 사는 나와 내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댓글 2
  • 2022-01-03 14:04

    저는 잘 모르기도 하고 확신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어서 인간 아닌 self 들이 집단자살 하기 전에 방향이 틀어질지도 모르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현민님처럼 치열하게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어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봄부터 날마다 산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갈 때마다 얼마나 다른지, 숲은 정말 살아있구나.. 하는 걸 매일 느껴요. 자연과 멀었던 저희 남편도 그 말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한사람씩 저마다의 계기로 지구 위에 인간이라는 개체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self 들에 관해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다면 달라지겠죠. 그랬으면 좋겠고요.

  • 2022-01-03 16:54

    집에 길냥이 가족이 왔는데 모두 네명이어요

    엄마는 매일 밥을 주고 차갑지 않는 물을 챙겨주고 살피십니다

    현민씨 에세이를 들은 후 그 아이들을 보며 나는 구원자일까?  생각하다가 과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하며 한동안 그들을 쳐다봅니다

    그들도 유리창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요

    남편은 집도 지어주고 추울까봐 담요도 넣어주고 문앞에 비닐막도 쳐주었는데 이제는 마당에서 쥐를 사냥하기도 하면서 거의 제집처럼 지내고 있네요

    그래도 우리가 나가면 경계하며 저만큼 떨어져서 우리를 살피긴 하지만요

    이들과 우리는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하여간 귀엽고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현민씨를 통한 배움이 있었네요 ^^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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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79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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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70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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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3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3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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