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 42길 7회]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 / 리들리 스콧 <블레이드 러너(1982)

띠우
2021-12-19 20:20
407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 저주받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성과 각성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68혁명의 분위기는 영화계 안에도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학생들이었던 혁명주체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청년저항문화, 여성해방운동, 반전, 풀뿌리운동 등 차이와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마이너 영화들과 전위적인 작품들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7,80년대를 지나면서 관습에 대항하는 새로운 감수성을 장착한 세계 각국의 작품들이 영화계에 영향을 주게 되자 할리우드도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해졌다. 왜냐하면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국제적인 거짓말쟁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문명과 야만, 세대와 인종 등의 대립구도로는 미국이 원하는 영화적 설득력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세계최강을 목표로 미국은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할리우드가 새롭게 내세운 것은 비인간세계, 바로 SF의 세계다. 우주에 대해 무지했던 인간들에게 우주생명체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가져와 그들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갖고 싶은 욕망을 불러온다. 그 존재들에 대한 상상력을 마구 불러일으키는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미지와의 조우(1977)>, <스타트랙(1979)>등 연이어 SF영화들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제작비의 35배 이상의 수입을 기록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ET>가 개봉되었던 1982년, 또 한 편의 영화가 발표된다. 필립 K.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블레이드 러너>, 감독은 <에일리언(1979)>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이었다. 세간의 엄청난 기대를 모으며 개봉되었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외면당했을 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에게조차 냉혹한 악평을 뒤집어쓰며 빠르게 극장에서 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봉조차 되지 못했다.

 

당시 2200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ET는 1000만 달러)와 시기적으로 주목받았던 SF, 해리슨 포드(데커드역)가 주연이었음에도 영화가 쫄딱 망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어떻게 다시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나는 두 가지 정도의 해석을 해본다. 우선 감독이 미국 사회가 아직 요구하지 않는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 미국은 자신들의 힘을 강력하게 할 도구로써 영화를 이용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SF라는 가상세계와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안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말하자면, 형제끼리 싸우다가도 밖에서 맞고 오면 신발 벗고 함께 덤비는 상황이랄까. 미지의 존재는 지구 전체의 적이 되고 미국이 앞장선다.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의 질문은 다르다. 기계문명에 대한 인간중심적 사고를 질문하는 것이다. 예술이자 산업이기도 한 영화는 시대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그 당시에는 외면당할 수밖에.

 

다행히 이 작품이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홈비디오가 유행하면서 기존 영화문법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비디오플레이어가 가정마다 보급되면서 극장 영화에 대해 단지 수용자에 그쳤던 대중이 비디오샵에 묻혀있던 걸작들을 재발견한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본 사람들의 입소문은 대단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견고했던 창작자와 수용자의 정해진 역할을 무너뜨린 최초의 작품이 된다. 그럴만도 한 것이 영화 속 미래배경이었던 2019년은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영화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개봉 35년 만에 속편격인 <블레이드 러너 2049(드니 빌뇌브,2017)>가 발표된 것은 자본주의의 삭막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다움’이라는 존재론적 질문은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저주받은 걸작’이라 불리는 <블레이드 러너>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

 

마치 일본 신주쿠의 밤거리를 연상시키는 2019년 LA, 1982년에 감독이 상상한 미래도시는 어둡고 온종일 비가 내리며 높은 빌딩숲이다. 대기업 타이렐사는 불모지가 된 지구를 대신할 행성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인간노동을 대신할 복제인간(리플리컨트)을 만든다. 과학자들은 유전학적으로 우수하게 만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4년이라는 짧은 수명을 부여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복제인간들이 지구로 돌아와 자신들의 창조자에게 생명연장을 요구하는데, 이렇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복제인간을 폐기하는 존재가 블레이드 러너다. 복제인간을 질서파괴자로 보고 블레이드 러너가 그들을 물리치는 이야기로 본다면 액션히어로물의 전개와 유사하다. 인간에게 적이냐 친구냐에 따라 관객은 감정을 이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SF액션영화라고 소개되었다. 그런데 주인공 데커드를 지구를 지키는 영웅으로 보기에 뭔가 찌질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당시 관객들이 엄청 실망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다.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지구로 도망친 복제인간들을 잡아 폐기하라는 명령을 다시 받는다. 복제인간을 진짜 인간과 구별하는 방법은 질문을 통해 변화하는 눈의 초점을 통해서다. 복제인간의 눈동자는 기억을 저장하는 도구이며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인데, ‘기억과 감정’을 수용하는 인간과는 다른 눈동자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복제인간을 폐기할 때 데커드는 아무런 갈등없이 잔인하고 기계적으로 처리한다. 자신만만하던 그가 타이렐사에서 만든 고성능 복제인간 레이첼(숀 영)과 만나면서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검사 당시 레이첼은 자신이 복제인간임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추억이 이식되어 있어서 눈동자의 검사결과가 일정치 않았으며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경험을 통해 축적된 기억과 이식된 기억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또 감정이라는 것도 인간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게 된다.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만 생각했던 복제인간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당황스러운 데커드와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마주한 레이첼, 둘의 혼란은 줄곧 어둡고 비가 내려 질척거리는 도시에 우뚝 솟아있는 피라미드 모습의 타이렐사의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라는 모토아래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인간의 감정이나 기억은 미화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나의 10년 전의 기억도 시간 속에 수많은 이식이 덧입혀져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원본과 복제품의 구별이 불명확해진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만약 인공심장을 달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진짜 인간일까, 아니면 가짜? 과학기술의 수많은 도전은 원본을 대체할 수 있는 기능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며 대체물을 쏟아내고 있다.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등장하는 조이 역시 그러한 존재로서 기능하며, 주인공과의 관계 맺기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을 주고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생명연장의 꿈을 안고 지구로 돌아온 로이(룻거 하우어), 그는 넥서스 6단계의 고성능모델로 군용복제인간이다. 그는 자신을 창조한 타이렐사의 사장을 찾아가지만 결국 생명연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데커드는 로이를 뒤쫓아 그를 폐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추격 장면에서 보이는 데커드의 무능함이라니. 그것은 둘이 가진 신체적 능력뿐만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습에서 더 두드러진다. 로이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죽인 데커드를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 로이 역을 맡아 자신의 최고 연기를 선보였던 룻거 하우어는 자신의 마지막 대사를 직접 썼다고 한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결코 믿지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성운 언저리에서 불타 침몰하던 전함, 탄호이저 기지의 암흑 속에 번뜩이던 섬광. 그 모든 것이 곧,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빗속에 흐르는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인간이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 이제 복제인간 로이도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 2019년이 되었을 때, 나는 로이역을 맡았던 룻거 하우어의 부고 기사를 접했던 기억이 있다.

 

- 당신은 왜 인간입니까

 

<사이보그가 되다(2021)>는 청각장애와 지체장애를 가진 두 사람(김초엽,김원영)이 만나 쓴 책이다. 그들은 보청기를 착용하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경험을 통해 미래의 인간상으로 ‘사이보그(Cyborg)’를 말한다. 사이보그는 인공두뇌학(Cybernetics)과 유기체(Organism)의 합성어로,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많은 유전자조작이나 인공장기의 도움을 받는 사이보그라고 볼 수 있다. 저자들은 미래 과학기술이 자신들의 장애를 완전히 고쳐줄 수 있다는 것에 기대지 않는 듯하다. ‘드디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되었네요’, 라는 말이 보청기를 빼거나 휠체어를 타지 않고 걸어야만 인간이라는 말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한 기대로 오늘을 살기 보다는 보청기를 낀 채로, 혹은 휠체어를 사용하며 일상의 삶을 영위해갈 수 있는 사회적 성숙함을 요구한다.

 

영화 속에서 복제인간들의 불행은 단지 4년이라는 짧은 수명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수단, 생물학적 개념의 인간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복제양 돌리의 탄생을 기뻐한 인간들이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순간 그 우월함에 극심한 불안감을 내보이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인간다움에 대한 모순은 인간답다는 말 속에 존재해야하는 윤리적 성숙함이 실제로는 보이지 않을 때 발생한다. 이제 인간이 사이보그가 되는 시대다. 그리고 앞으로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되면 인간은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인 현재의 몸을 버리고 수명이 무한한 기계의 몸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이보그란 존재는 기계와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해체하는 메타포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로이가 짧은 수명 동안 경험한 기억과 거기에서 비롯된 감정을 이야기하며 죽어가는 장면은 매우 시적인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다고 말할 때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영화는 어딘가 부족한 데커드가 복제인간 레이첼과 함께 도망치는 것을 암시하면서, 뭔가 분명하지 않게 끝나버린다. 나는 이 애매한 사랑의 도피가 기존의 이분법을 넘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이들의 한걸음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인간다움’이란 것은 인간이 지향하는 윤리의식과 대상에 대한 사랑이 더해져 드러나는 어떤 것이라고 이해한다. 삶이란 많은 것이 불분명하다. 서로의 차이를 긍정하면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면, 다른 상상은 가능해질 것이다.

 

댓글 5
  • 2021-12-20 08:56

    어쩌면 ‘인간다움’이란 말조차 버려야할지도 모르겠네요. 여긴 인간만의 세상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어려운것 같습니다. 새로운 윤리가 필요해요. 

  • 2021-12-20 09:03

    포스터를 보니 두 가지 느낌이 드는군요
    하나, 93년도 포스터인데 지금 와서 보니 60년대 포스터 같구나.
    다른 하나, 상영료는 다른 물가에 비해 거의 오르지 않았구나...

  • 2021-12-20 19:45

    인간다움이라 ㅡㅡㅡ

    난 이 영화를 못봤는디 글을 읽어보니 오늘 한번 봐야겠군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게하는 글이네요

  • 2021-12-20 20:08

    블레이드 러너. 심지어 나같은 사람도 비디오로 찾아서 본 영화. 

    띠우쌤의 글로 영화를 제대로 본 것 같은 느낌이네요.

    내년엔 진지하게! 영화를 좀 봐야겠어요. 

  • 2021-12-22 23:44

    참, 우리 어려운 시대를 사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도 잘 본것 같네요 ㅎㅎ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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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214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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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27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275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244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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