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짠글쓰기3]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김현지
2021-12-06 09:48
352

아버지와 나 사이에 가능성이 생겼다

 

“이 가을이 내 마지막 가을이겠네.”

엄마는 10월의 단풍을 보고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그 후 엄마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게 흘렀다. 엄마에게 건넨 말에 대한 응답이 한참 뒤에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엄마 혼자 가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엄마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매일 집안의 곳곳을 쓸고 닦았다. 가끔씩 우릴 만나러 오는 엄마를 조금이라도 깨끗한 공간에 머물게 하고 싶어서. 그게 막을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무렇게나 쌓인 그릇을 모두 꺼내 크기별로 종류별로 정리하고 있던 어느 날, 거실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태희 엄마, 우리 죽어서도 꼭 다시 만나세.”

 

애써 눌러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지 못해 아버지는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말에 꼭 그러자고 대답했다. 뼈만 남은 몸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력을 다해 약속했다. 저물어 가는 여자와 저물고 싶은 남자가 그렇게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 장면에 나는 딴지를 걸고 싶었다. 나는 잊지 못했다. 어릴 적 엄마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뱉던 아버지의 모습을. 엄마를 향해 고성과 욕설이 날아든 밤들을. 그리고 아주 가끔, 그런 밤이 지나고 나서 엄마의 팔뚝에 든 시퍼런 멍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존심 강한 엄마가 깜깜한 주방에서 남몰래 울던 모습을. 좋은 아빠였을진 몰라도 확실히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는 다 큰 딸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엄마의 표정을.

 

“엄마는 그렇게 욕하고 성질부리는 남편을 또 만나고 싶어?”

 

나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담긴 농담을 던졌다. 그런 내 공격을 막아 세운 건 엄마였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까불지 말라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또박또박 내뱉은 한 마디. 엄마의 날 선 목소리에 나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말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있다는 것. 모르는 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아버지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내 판단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아버지를 향해 들끓던 분노를 잠재웠다. 엄마는 죽기 직전 온 마음을 담아 아버지를 방어했고, 그 방어 덕에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가능성이 생겼다.

 

 

사랑은 방법까지 사랑이어야 했다

 

내게 아버지는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울적한 딸의 마음을 알아차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바닥까지 가라앉은 날이면 아버지는 내게 “업어줄까?” 하고 물었다. 아버지 등에 업혀 한참을 있으면 내 가슴으로 아버지의 온기가 전달됐다. 그 따뜻함에 의지해 별로였던 하루를 그럭저럭 괜찮은 날로 마무리하곤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예측을 벗어난 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떤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던 아니 할 수 없었던 23살의 어느 날, 휴학을 하고 싶다는 내 말에 아버지는 화를 참지 못했다. 힘들어서 쉰다는 건 아버지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거실에 꿇어앉히고 내가 누리고 있는 호사를 하나하나 나열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이 감당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아냐며 노기 어린 얼굴로 서운함을 표현했다.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자식이었던 나는 내 마음대로 쉴 수 없었다.

 

26살. ‘최종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는 문구를 보았고, 아버지는 교사가 된 나를 껴안고 울었다. 나는 아버지의 눈물이 거북했다. 그 눈물이 나를 위한 눈물일 리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스무 살쯤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의 폭력이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거라 해석했다. 아버지를 향한 양극단의 감정을 껴안고 사는 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설픈 해석술이라도 발휘해야 했다. 하지만 가장 이해받고 싶었던 순간에 외면당했던 기억은 묵혀놓았던 화를 터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사랑은 방법까지도 사랑이어야 했다. 돈을 벌고 나서부터 아버지를 더욱더 멀리했다. 앞으로는 아버지 때문에 어떤 것도 소모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게 내가 선택한 복수의 방식이었다. 엄마가 췌장암 판정을 받은 즈음 아버지를 향한 내 분노는 극에 달했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이 엄마를 병들게 했다고 확신했다.

 

엄마는 왜 삶의 끝에서 아버지와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을 한 걸까. 엄마는 어떻게 아버지를 향한 복잡한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을까. 나도 생의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어질까.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하는 순간이 올 때 당신이 내 아버지여서 좋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게 됐다

 

엄마가 죽고 나서 한 달 뒤 결혼을 앞둔 언니가 새 가정으로 터를 옮겼다. 언니가 집을 나가던 날 아버지는 언니를 배웅하며 꼭 안아주었다. 아버지와 언니 모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하지만 둘 다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부러 씩씩하게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짧은 시간에 애사와 경사를 치른 집은 더없이 고요했다. 평생을 들어왔던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소리로 사람의 빈자리를 느꼈고, 외로웠다. 겨울방학이라 일터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즈음 나는 아버지와 자주 시간을 보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탓일까.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누그러진 탓일까. 그와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전 아버지와 함께 엄마와 오르내리던 산에 갔다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함께 저녁을 먹는 일과가 한동안 지속됐다. 보내는 시간의 양에 비례해 나누는 대화의 밀도도 높아졌다.

 

함께 산길을 오르던 어느 하루, 과묵하기로 유명한 엄마가 자기 앞에서는 수다쟁이였다고 자랑처럼 말하는 아버지에게 나는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엄마는 바보라고. 아버지가 괴롭혔던 시간은 다 까먹었나보다고. 그 수모를 당하고도 아버지를 또 만나고 싶어 한다고. 죽기 전 나를 향해 쏘아붙이던 엄마의 모습은 아버지에게도 뜻밖이었는지 아버지는 그날의 기억을 여러 날에 걸쳐 곱씹어 말했다. 같은 말의 변주를 듣는 과정에서 나는 아버지가 꽤 오랜 시간 엄마에게 미안함을 표현했음을 알게 됐다.

 

아버지의 말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서로의 속내를 말하며 엄마와 아버지는 하루를 끝맺곤 했다. 어떤 날에는 각자의 서러웠던 세월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자기 성질을 못 이겨 엄마를 서글프게 한 날들이 후회스러워 아버지는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사랑이란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부부에겐 생겼다. 엄마가 죽고 나서 아버지는 여전히 침대의 한 옆을 비워둔다 했다. 엄마가 옆에 누워 있는 것 같아 침대 한가운데에선 잠이 오지 않는다 했다. 이제 아버지의 하루 끝은 잠들기 전 손으로 쓰윽 침대의 빈자리를 훑는 일이 됐다. 그해 겨울을 나는 그렇게 보냈다.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오고 갔을 수많은 이야기와 홀로 된 아버지의 마음결을 상상하며. 나는 예전처럼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게 됐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결혼을 했다. 감정 기복이 크지 않고, 함부로 화를 분출하지 않으며, 쉽게 자신의 삶을 연민하지 않는 남자와. 그는 아버지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공간에는 긴장과 불안이 없었다. 갈등이 발생해도 우리 사이에는 큰 목소리가 오고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 마음에 들었다. 반면 아버지는 더 외로워졌다. 종알종알 말동무해주던 딸의 부재는 아버지에게 커다란 상실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딸과 통화하기를 원했고, 외로움을 알아보는 딸에게 자신의 불쌍한 처지에 대해 하소연했다. 넓은 집의 적막이 얼마나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전화 너머 홀로 있을 아버지가 애잔했다. 독립을 해서도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나를 찾는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 우울에 빠진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드는 죄책감. 그렇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두 감정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통화 끝에 한결 개운해진 목소리로 막내딸이 최고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볼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가을이 되면 아버지의 슬픔은 더 깊어졌다. 엄마가 우리를 떠나기 시작한 계절의 기억은 아버지를 괴롭혔다. 전보다 더 애절해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약해져버린 아버지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어 짐짓 담담한 척했지만, 내게도 가을은 힘든 계절이었다. 엄마가 죽은 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내 몸은 자주 까라졌다. 직장에서 슬픔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다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 울음이 터져버릴 때가 허다했다. 그런 날들을 며칠 보내고 나면 꼭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몸이 힘들어도 나를 찾는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식과 부모의 이별보다 더 힘든 게 부부의 이별이라던데…. 나는 내 고통보다 아버지의 고통이 더 마음에 쓰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슬픔까지 감당할 만큼 그릇이 크지 못했다. 내 슬픔을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의 슬픔을 호소하기에 바쁜 아버지를 견디기 힘든 날에는 ‘당신이 내 아버지인 게 너무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뱉는 순간 진실이 아닐 말로 아버지에게 상처를 줄 만큼 나는 아버지가 싫지 않았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아버지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에 대한 연민의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나는 여느 날과 달랐다.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도저히 괜찮은 척하며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울며 말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슬퍼하면 나는 너무 슬퍼져서 하루를 잘 버틸 수가 없다고. 나는 아버지가 슬프다는 말을 듣는 게 정말 힘들다고. 평소와 다른 딸의 목소리를 듣고 전화 너머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크게 울었다. 아버지는 정말 몰랐다고 했다. 자신의 슬픔이 나를 얼마나 슬프게 하는지. 그날 이후 아버지는 조금 달라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 안부를 먼저 묻는 일이 늘어났고, 내가 먼저 전화를 걸기 전까지 나를 찾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내 한계를 표현하고 나서부터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겼다. 안전거리 안에서는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통에 마음 쓰는 착한 딸인 동시에 아버지의 고통까지 감당하려 했던 건방진 딸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안다. ‘아내를 잃은 나이 든 남자’의 자리에 아버지를 위치시켜 놓은 게 나를 힘들게 했다는 걸. 이번 생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려면 아버지를 나보다 약한 존재로 바라본 오만함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여전히 내 아버지는 아내 혹은 딸이 자신의 마음을 살펴주길 바라는 20세기의 남자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댓글 3
  • 2021-12-06 22:21

    저도 언젠가 일찍 돌아가신 아부지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어요. 갈등이고 화해고 뭐도 없었던 것 같아서요.

  • 2021-12-06 22:43

    이 글 읽으면서 작년 이맘때 정신줄을 놓은 어머니와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자 끈떨어진 연처럼 불안해하며 폭주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꺼내기 쉽지 않았을 이야기를 이렇게 담담하게 풀어놓을 수 있다니.. 글쓴이의 힘이 느껴집니다.

  • 2021-12-13 12:04

    얼마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새삼스럽게 나서 눈가에 눈물이 촉촉....격한 감정인데 글에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을 가라앉혀주는 힘이 있네요. 저도 그날 이후 매일(사실 잘 안되긴 하는데...) 남아있는 엄마에게 전화하고 있습니다. 현지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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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26
토용의 서경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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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32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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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5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85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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