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짠글쓰기1] 선물이 아니라면......?

인디언
2021-12-0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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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잘 몰랐다. 집을 짓고 보니 풍광이 너무 좋다. 나지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숲속, 조금만 걸어 나가면 숲길이다. 해발 450미터 높이에서 바라보는 산자락들, 그 사이사이로 평창강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아침 일찍은 물안개가 가득하다가, 해가 올라오는 시간에 따라 산자락들이 조금씩 보였다 사라졌다 하면서 마침내 안개가 걷히면 산들이 만드는 겹겹의 선들이 오롯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저녁녘에는 붉은 색과 노란 색 계열이 제멋대로 섞인 해 그림자가 산을 긴 타원형으로 물들이며 마치 주황색 호수가 산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방은 고요하고 주변에 불빛이 없어 밤에는 여러 별자리들이 보이고, 가끔은 별똥별도 볼 수 있다. 그냥 집에만 있어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아, 참 좋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이 집은 평창집이다. 우리는 집을 두 번 지었다. 지금 사는 고기동집과 여기 평창집. 고기동집을 지을 무렵, 이전에 아이들 키우며 동네를 만들고 10여 년 간 함께 살았던 성산동 사람들 사이에서 귀촌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 애들도 독립했으니 시골에 가서 같이 살면 좋지 않겠냐는 것. 그들과 함께 산 세월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우리는 별 고민 없이 합류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어떤 마을을 만들면 좋을지, 각자가 하고 싶은 일도 적어보고 마을 배치도 그려보며 집터를 구하러 다녔다. 여기 저기 다녀보다가 거의 2년 만에 찾은 곳이 이곳 평창이었다. 처음 땅을 계약한 후 집을 짓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걸리면서 처음 같이 했던 사람들 몇 몇이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집이 완성되고 우리가 다니기 시작한 건 4년 넘어 5년째 되는 것 같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우리는 이십여 가구가 모여 살면서 공동 식당에서 같이 밥해 먹고, 대청마루에 모여 세미나를 하고, 공동작업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아랫동네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사업을 하면서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 이사와 사는 가구는 세집뿐 이고, 우리 포함 나머지는 아직도 수도권에 살며 이곳은 세컨드하우스로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이는 온갖 꽃들을 가꾸며 주중의 피로를 잊고, 아니 잊으려 하고(그녀가 정원을 가꾸는 걸 보면 사실은 더 피곤해질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좀 길게 머물며 그림을 그리는 작업장처럼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주말에 와서 쉬고 간다. 각자 살면서 기회가 되면 가볍게 음식을 주고받고, 꽃모종이나 채소 씨앗을 나누는 정도의 이웃으로 지내고 있다. 길고양이들만 함께 키우며... 공터로 남아있는 마을회관 자리에 과연 마을회관은 지을 수 있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처음 집터를 닦을 때 꿈꾸었던 노년의 마을살이에 대한 기대는 어느 정도 접고 있다. 사람들 구성도 많이 달라졌고 마을이나 공동체에 대한 생각의 폭도 많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을살이만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게 아니다. 남편이 은퇴한 올해 우리는 평창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우리가 평창에서 살게 되면 뭔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은퇴할 날만을 기다렸건만, 은퇴하고 나니 코로나가 찾아왔고, 엄마가 집으로 오셨고, 아들부부까지 들어오면서 계획은 틀어졌다. 우리는 여전히 고기동에서 살고 평창은 별장처럼 되었다. 평창에서 뭘 하고 살지 고민하던 남편은 요즘 생각이 바뀌고 있다. 꼭 평창에서 살아야 할까? 우리가 꿈꾸던 마을살이가 어렵다면 오히려 여기 문탁이나 파지사유를 중심으로 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은퇴하고 공부하러 다니면서 그동안 주변만 맴돌던 태도가 바뀌는 것 같아 반갑다. 하긴 평창에 살고 싶다고 해도 한동안 우리는 평창에 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평창집은 어떻게 쓰면 좋을까.

 

 

 

 

집을 선물하자

 

언제부턴가 집이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 되면서 부모 형제라도 마음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곳이 되었다. 나도 남의 집에 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우리집에 오지 않는다. 혹 남의 집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들어오세요.’라는 말은 듣기 쉽지 않다. 그냥 현관 앞에서 볼일 보고 돌아온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쉬는 공간이다. 집에서라도 편하게 쉴 수 없다면 너무나 사는 것이 힘들 것이다. 실제로 그런 공간이 없어서 힘든 사람들도 많다. 내 집, 나만의 방, 뭔가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내밀함을 가진 곳이 필요할 수도 있다. 집에 누군가를 들여놓지 않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평창집은 담도 없고 대문도 없이 열린 형태로 되어 있어 쉽게 남의 집을 들락거릴 수 있다. 마을 전체를 그렇게 설계했다. 가운데 길을 두고 양쪽으로 집을 지었는데, 각자의 집터에 앞뒤로 집을 두어서 마주보는 마당을 넓게 하였다. 우리집은 설계부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쓰는 걸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작은 공간이지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우리가 있어도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두고 화장실도 방마다 배치했다. 데크는 10명 이상이 와도 될 만큼 넓게 만들고, 보일러 말고 전기온수기도 설치해서 따뜻한 물이 모자라지 않게 하고...... 집을 짓고 나서도 창문마다 문 열리고 닫히는 표시를 붙여놓고, 황토방 불 때는 법, 분리수거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곳 등등 집 사용 매뉴얼 같은 것도 만들어두었다. 어쩌다 보니 전등을 좀 복잡한 시스템으로 설치하게 되었는데(직접 개발한 선배가 선물로 해주었다.) 사람들이 전등 켜고 끄는 걸 힘들어 해서 괜히 그걸로 했다고 몇 번이나 후회했다. 침구도 넉넉히 갖다 놓고 수건도 서랍에 가득 채워두었다.

 

사람들이 평창집에 오면 대부분 ‘와, 좋다!’라고 감탄한다. 풍경도 좋고 공기도 좋고 마냥 편안해진다고. ‘그럼 와서 쉬었다 가.’라고 하면 일단 놀란다. 우리가 있을 때는 괜찮지만 주인도 없는데 남의 집을 어떻게 쓰냐는 것이다. 괜찮다고, 원래 그렇게 쓰려고 생각하고 지은 집이라고, 비어있는 집이니 써도 된다고 열심히 설명을 하면, ‘그래도 되느냐’며 조심스럽게 ‘한번 와볼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평창집에서 쉬고 간 사람들은 다양하다. 알고 지내는 여행 작가가 폐암 말기인 엄마와 항암치료 대신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갔다. 그녀는 2년 전에도 책을 쓰느라 일주일간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글도 쓰고 산책도 하고 차도 마시며, 글을 써야하는 긴장 속에서도 마냥 행복해했고 그를 보는 나도 마음이 환했었다. 이번에는 추석연휴에 다녀갔는데 딸은 딸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 식구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려왔다. 무릎담요를 덮고 긴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먼 산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평안해 보이는 미소가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 사진은 아마 내 마음속에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지난 여름에는 식구가 6명인 남편친구네가 코로나 때문에 인원제한으로 예약한 호텔에 갈 수 없게 되어 평창집에서 휴가를 보냈다. 딸이 키우는 강아지를 데려가도 되느냐고 무척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처음으로 강아지 데리고 간 여행이 너무 행복했다고 그 집 딸이 직접 감사인사를 했다. 마음이 따뜻해져왔다. 언니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분은 남편, 아이들과 4식구가 왔었는데 집을 정말 깨끗하게 청소해놓고 휴지와 쓰레기봉투를 사놓고 갔다. 기분이 너무 상쾌했고,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친구가 일주일간 혼자 머물며 대관령음악제를 충분히 즐겼다고 좋아했고, 아이와의 갈등으로 너무 힘들다던 후배가 다녀 간 후 아이와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입은 웃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아, 나는 집에서 쉬고 가는 사람들의 그 마음들을 함께 느끼고 싶은 것일까? 그로 인해 내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을 즐기는 걸까? 돈을 받지 않고 선물했기 때문에 그런 즐거움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실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냥 빈 집을 쓰게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말 큰 선물을 받는 기쁨을 누린 것을 알겠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평창집을 쓰는 사람들은 비용을 지불하고 싶어 한다. 그냥 쓰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전기도, 물도 쓰고 불 때는 나무도 사야하고 집 관리도 해야 하니 비용을 내는 게 맞다고. 엄밀히 따지면 그럴 수도 있지만 난 집 사용료를 받는 것이 불편하다. 우리집은 펜션도 아니고 그냥 빈 집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와서 편하게 쉬다 가고 즐겁고 행복하면 그것만으로도 참 좋은데, 빈 공간을 선물하고 그런 좋은 마음을 선물 받으면 되는데... 그냥 기쁘게 선물로 받아주면 안되나?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쓰는 것은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되기는 힘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는 상품권을 두고 가기도 하고, 택배로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실제로 사용료를 내면 부담 없이 쓰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못 쓰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정 그러면 조금 내보라’고도 해보았다. 오히려 편하게 잘 쓰는 걸 보니 무작정 내 마음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선물이 아니라면 무엇이면 좋을까?

 

 

공유 별장 사용설명서

 

평창집 다용도실에는 물건들이 많다. 쌀 봉투도 자잘하게 여러 개가 있고, 이런 저런 라면들, 햇반, 참치캔, 맥주와 소주, 안주와 과자들...... 냉장고에는 장아찌, 신 김치도 있고, 냉동고에는 아이스크림도 있다. 평창집에 다녀간 사람들이 가져와서 먹고 남은 것들, 또 누군가 와서 쓰겠지 생각하고 두고 간 것들이다. 그렇게 물건들은 순환되고 있고, 다용도실과 냉장고는 이미 나만의 것이 아닌, 공유 창고가 되고 있다.

우리가 가서 살지 않는다면 평창집은 계속 별장처럼 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만의 별장이 아닌 우리들의 별장, 공유 별장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집주인인 내가 선심 쓰듯 집을 내주는 일방적인 형태가 아닌 서로 공유하는 공간으로. 그러려면 집에 오는 사람이 함께 쓰는 공간이라 생각하고 부담 없이 편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공유한다면 쓰는 사람이 모두 책임과 의무를 나누어야겠지? 근데 아무래도 주로 쓰는 사람은 우리니까 많은 부분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기본적인 관리는 우리 몫이겠다. 비용을 생각해보자. 전기는 태양광이 있으니 기본요금 정도밖에 안 나온다. 물도 지하수를 쓰니 모터 전기요금 정도다. 상대적으로 많이 쓰는 비용은 난방비용이다. 기름보일러용 등유, 황토방 장작. 기름은 우리가 채워두고 장작은 함께 쓰는 사람들이 나눠 감당하는 것도 괜찮겠다. 누구는 비용을 내고 누구는 장작을 패고... 장작 패는 방법은 가마솥이 알려주겠지. 사실 이렇게 해도 그 비용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가 없다. 누가 얼마나 쓸지도 모르니까. 이런 접근 자체가 별 의미가 없기도 하다.

 

이렇게 해봐야겠다. 상자를 두 개 만들어둔다. 하나는 연대기금용, 하나는 길위기금용. 문탁네트워크에서 연대활동을 위해 쓰는 기금과 청년활동을 위해 쓰는 기금이다. 코로나 때문에 활동이 좀 뜸해지긴 했지만 요즘 길위기금 모금이 진행되는 걸 보면 뭔가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공유 별장을 사용한 후 기금을 내는 방식. 사용 비용도 공유하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다. 노트를 하나 만들어 어느 정도 기금이 전달되었는지 기록해두면 좋겠지. 황토방 장작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 힘이 되는 사람은 장작을 패고, 장작패기가 힘든 이들은 가까운 숲길 산책을 하면서 나뭇가지들을 한 자루씩 모아온다. 황토방 불쏘시개용으로. 내가 해봤는데 이건 누구라도 할만하다. 그리고 공유 별장에 필요한 소모품 채워 두기. 아마 지금은 세탁세제가 떨어져 갈 것이다. 다음에 가는 사람은 세탁세제를 채워두면 좋겠다. 물론 사용 후 청소나 정리는 기본이다. 함께 쓰려면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이다. 어떻게 들어오는지 모르지만 들어와 죽어있는 벌레 외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아, 흔적을 남겨야 하는 것도 있다. 사용 후기 같은 것 말이다. 세미나 후기를 쓰듯 여기서 보낸 시간 속에서 느끼고 생각한 무언가를 남겨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삶이 주는 기쁨, 슬픔, 외로움...... 무언가 깨달음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거나 풀거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어떤 이야기들을 남길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렇게 스토리를 쌓아가다 보면 공유 별장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을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하나 갖다 둘까? 사진 한 장 씩 찍어서 작은 메모와 함께 남겨두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 평창집 거실은 비어있는 높은 벽이 있으니 그곳에 사진들을 붙여 놓으면 재밌겠다. 일 년에 한 번 씩 콘테스트 같은 걸 해볼까?

 

 

 

최근에 평창집에서 글쓰기클래스 멤버들과 일박이일 워크숍을 했다. 글은 거의 개요 수준이어서 심도 있는 합평을 할 수는 없었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참 좋았다. 일주일에 2-3시간 만나는 것과 하루 종일 함께 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일단 시간에 쫒기지 않고 몸이 편안해지니 마음도 더 열리는 것 같다. 여행지라기보다는 그냥 집이었기 때문에 맘 편히 술도 마시고, 그러다보니 그동안 보지 못한 다른 측면도 볼 수 있어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진 것도 같다. 문탁네트워크 워크숍도 했다. 2주에 한 번씩 살림회의를 하지만 두 시간 남짓으로는 깊이 있게 논의하기가 어렵다. 시간에 쫒기지 않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로의 상태도 더 잘 알게 되고 안 풀리던 것도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난 개인적으로 내년에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나갈지 좋은 팁도 얻었다. 글쓰기 클래스에서 얻은 힘으로 내년에는 글쓰기를 시작해 볼 생각이다. 공유 별장이 워크숍 명소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니 두 시간 정도의 멀지 않은 거리에 이런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운이 좋아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가능했던 일이다. 마을살이의 계획은 어긋났지만 공유 별장으로 또 다른 형태의 함께 살기가 가능하다면,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 더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것을 공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갇히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노년의 삶을 더 넓게 만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나는 참 좋다! 아, 집 이름을 공휴재(共休齋)로 해볼까?

 

댓글 3
  • 2021-12-06 22:25

    인디언샘과 알고 지낸 기간은 길지만, 올해처럼 1년 꼬박 같이 보내긴 처음이네요~그래서 새삼스러웠던 시간이에요^^

  • 2021-12-07 14:33

    인디언샘의 나이가 되었을 때 저도 샘처럼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생 선배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2021-12-17 10:38

    뒤늦게 인뎐샘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양생팀 평창 워크숍에서의 기억이 떠올라ᆢ

     

    아 ᆢ 샘은 드뎌 평창집을 이렇게 풀어내셨구나,  이런사연과 이런고민들이 있으셨구나ᆢ

    넘 잘 읽었어요 ~~~

     

    그리고 공휴재로의  초대!  멋지심 ㅎㅎ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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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182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작년에 『장자』의 내편 중 「양생주」편을 읽으면서 다섯 편의 글을 썼다. 양생에 대한 장자의 문장을 조목조목 읽어보며 양생의 지혜를 찾아보았다. 어느 하나 수월하지 않았지만, 번다해진 일상을 정돈하고 싶을 때 그 지혜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남은 편들까지 양생의 지혜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장자』는 내편⸱외편⸱잡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은 7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은 여섯 편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양생의 면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대종사」편을 읽어보기로 했다.     사서(四書)에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군자를 가리키는 문장들이 나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리(利)에 밝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사소한 리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군자의 풍모를 본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장자』에는 그보다 급이 더 높은 진인(眞人)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대종사」편에는 특히 많다. “깊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으며, 활활 타는 불속에서도 뜨거워지지 않는” 급이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다니는 범인으로서는 근접이 불가능한 경지이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과 괴리되어 터무니없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일상에서 볼 수 없다는 핑계로 그 이야기 너머가 가리키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1. 고요히 무심하게 일상을 사는 진인   옛날의 진인은, 그 모습이 우뚝 솟았으나 무너지는 일이 없었고, 뭔가 부족하지만 받는 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지만 완고하지 않았고, 크고 넓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밝고 당당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듯도 했습니다. 환하게 기쁨을 드러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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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10 | 조회 237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225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213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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