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이 남긴 숙제 (아젠다 17호 / 20211020)

문탁
2021-10-20 13:05
302

 

  *영화 <노회찬 6411>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회찬 6411>이 개봉되었다. 볼까 말까 망설였다. 봐야 하는 이유는 많았다. 한때 몸담았던 진영과 옛 동지들에 대한 의리, 그와의 개인적 인연, 노회찬 재단에서 애쓰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 그러나 걱정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성격과 관련된 것. 이것은 어떤 영화일까? 회고? 애도? 질문? 회고라고 하기에는 그를, 그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다룰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공적 애도와 관련해서도 그의 죽음 직후의 거대한 애도 행렬, 신문과 방송에서의 각종 특집이 이미 있었다. 혹시 이 영화가 <노회찬에게 작별을 고합니다>라는 손석희의 그 유명한 앵커 브리핑 4분53초를 127분으로 늘려놓은 것이면 어쩌지? 이런 것들과 연결된 것이지만 노회찬 지지자들에 의한 노회찬의 재현이 노무현 지지자들에 의한 노무현의 재현, 혹은 박정희 지지자들에 의한 박정희 재현과 정말 다른 것일 수 있을까, 라는 영화적 질문도 있었다. 나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나는 그 영화의 수많은 인터뷰이처럼 그와 일정 기간 사적으로, 공적으로 깊이 연루된 관객이다. 회고와 애도 없이 그를 이야기하는 게 애당초 불가능하다. 울지 않고 그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추억과 감성을 소비하지 않는 영화 보기가 가능할까? 그런데 울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간다는 건, 또 얼마나 웃기는 일일까?  그러나 그 모든 사려(思慮)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봉 당일 영화를 보러 갔다. 그리움이 모든 걸 압도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려한 만큼 나쁘진 않았다. 영웅서사나 신파를 배제하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뚜렷했고 그에 따라 영화도 그의 ‘공적인 삶’, 특히 2000년 이후의 진보정당 정치인으로서의 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이 영화는 이미 알려진 사실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와 내가 2000년 이후 소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에서 내가 모르는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손석희의 그 앵커 브리핑을 엔딩으로 배치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을 다루면서 “정치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었고, 또한 정치인 노회찬은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연인 노회찬과도 같은 사람이었다”라는 손석희의 회고, 나아가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손석희의 규정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일까? 애도가 아닌 질문은 불가능한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뭔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상시 가졌던 단편적인 생각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더 분명해진 어떤 질문들. 설익고 개인적이지만 그래도 시작은 해봐야 하는 질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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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에서 그의 평생 동지였던 윤영상은 “진보정당운동은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노회찬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전히 진보 정치를 바라는 대중들의 열망은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아마도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소위 ‘노심조’의 탈당, 진보신당의 창당 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이후 알다시피 진보정당 운동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노회찬과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나와 통합진보당을 만들 때, 그와 다시는 안 보겠다고 생각한 동지들이 무척 많았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민중당 해산 이후 그 진영을 떠났지만 그래도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할 때 정말 기쁘고 설레고 벅찬 마음으로 그 창당대회장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분열하던 그 어떤 시점에 나 역시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나는 여전히 노회찬을 사랑하는 팬이었지만 진보 정치에 대해 미련은 점점 사라졌다. 나와 함께 문탁네트워크의 다른 많은 친구도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만약 영화가 그의 공적 삶, 정치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나는 6411번 버스를 타고 있는 노회찬뿐만 아니라 정파 투쟁을 하는 노회찬도 다루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진보신당 분열에 대한 동지들의 비판을 노회찬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정파 출신이면서 정파를 뛰어넘는 정치를 꿈꾸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 아닐까? 선한 정치인이며 동시에 강력한 권력의지를 가진 정치인이라는 감독의 규정은, 긴장과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가 받았다는 4,000만 원은, 도덕적 이슈가 아니라 이념과 현실의 긴장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진보 정치의 이슈가 아닐까? 하여, 1987년 ‘인민노련’이 선언했던 대중적인 진보정당, 대의제 진보정치는, 2021년 현재도 여전히 유의미한 아젠다인가? 이런 질문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략된 ‘정치인 노회찬’에 대한 재현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 그는 왜 그의 6411 버스 안의 노동자를 애틋해 하는 만큼이나 아내를 배려하지 못했을까? 사실 이건 나의 꽤 오래 묵은 질문이다. 김지선, 노회찬의 아내 이전에 이미 인천 노동운동의 대모로 유명했던 인물. 강단 있으나 배려심 넘치고 공식 학력이 낮았지만 지성이 빛나던 사람! 나는 수십 년 전 그녀를 만났던 첫 순간에 단박에 그녀를 알아봤고 그 이후 쭉, 그녀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그런 그녀가 영화 속에 인상적인 모습으로 두 번 등장한다. 한번은 영화 초반 남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내용은, 이런 식이면 더 이상 당신과 살지 않겠다는 이야기이다. 하루 24시간이 공적인 삶으로 꽉 차 있어 사생활이 없었던 남자. 너무 고단하여 자기 부인에게는 대화 한번, 미소 한번이 버거웠던 남자의 아내로 사는 인간의 진솔한 심정. 그런데 이후 노회찬은 바뀌었을까? 김지선 선배의 심정은 영화에서 한 번 더 재현된다. 2004년의 <아침마당>. 아나운서가 묻는다. 이제는 유명해진 노회찬.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시겠습니까? 그녀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러나 노회찬은 “처음에도 거절했지만 결혼했듯이 지금도 거절하지만 결국 또 이생에서 결혼할 것”이라며 유려하고 유머러스하게 응수하고 모두의 박장대소로 그 장면은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나는 묻게 된다. 김지선과 노회찬조차 어떤 성별분업 속에서 살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젠더 배치를. 김지선이 남편에게 갖는, 공적 의리와 사적 불만 사이의 갈등을 과감히 삭제해버리는 모든 재현물들의 폭력성을. 그리고 이제 영원한 기념비로 남은 노회찬 옆에서 영원히 그의 아내로 박제화될 김지선 선배의 어떤 삶을. 

 

  마지막으로 그의 죽음.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이고 누군가에는 놀라움이고 누군가에게는 조롱의 대상이었던 그의 죽음. 영화에서 그의 오랜 동지였던 최봉근은 이렇게 말한다. “아는 것과 하는 것, 겉과 속이 일치하는 드문 사람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불일치가 생긴 거예요. 그 불일치를… 목숨으로 바꿨죠.” 그러나 아이를 보살필 사람이 없어서 진보정당에서 칼퇴근을 해야 했고, 칼퇴근을 해야 해서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자세로 일할 수밖에 없었고,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오욕과 오해를 밥 먹듯이 먹으면서 살아왔던 나는, 그의 마지막 선택이 남성적이고 운동권적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은 늘 지리멸렬하고 치욕은 삶의 불가피한 조건이고 생은 명분과 이념을 초과한다. 하여, 나는 ‘그의 죽음을 존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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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길게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은 어둑어둑해졌고 나는 남겨진 울음을 목 안에서 삼키고 있었다.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우리는 아마 슬픔을 넘어 각자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가 주문한 방식은 아니겠지만 내 방식대로 걸어갈 것이다. 질문을 품고 그것을 숙성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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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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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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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2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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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조회 160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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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조회 208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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