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 42길 5회]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 마틴 스콜세지 <택시 드라이버(1976)>

띠우
2021-11-21 19:00
207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1976

 

- 영화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유럽에서 문을 연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거대한 스튜디오 중심의 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하며 황금기를 맞는다. 그것은 메이저 영화사들이 수직적인 분업화와 표준 원칙을 통해 제작과 배급, 그리고 상영을 일원화한 통합 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꿈의 공장들은 쉴 새 없이 가동되어갔고, 영화는 자연스레 대도시 대중들의 중요한 여가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48년 미국 대법원의 메이저 영화사들의 독과점행위금지가 판결되면서 미국영화계에는 다시 한 번 변화가 일어난다. 스튜디오 시스템을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영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공장에서 벗어난 영화는 사회에 대한 성찰과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표현을 시도했는데, 1960년대 청년 히피 문화와 저항 문화를 기반으로 한 뉴아메리칸 시네마 운동으로 이어졌다.

 

 

1968년 베트남전쟁 당시 사진기자 애디 애담스가 공개한 사진 한 장(일명 ‘사이공식 처형’)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불러온다. 사진 속에서 처형된 사람은 전쟁의 끔찍함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30여 명의 여성을 성폭행하고 무자비한 살인을 저질렀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그 이면이 드러났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 전 세계적인 비판 여론을 바꾸기 위해 이 사실을 은폐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베트남 안에서 벌어지는 잔혹성의 표면으로 돌렸던 것이다. 결국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계기가 된 사건(통킹만사건) 자체가 미국이 조작한 사건이라는 것이 미 국방부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고, 워터게이트 사건까지 터지면서 미국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시기를 겪는다.

 

우리는 <택시 드라이버(1976)>, <지옥의 묵시록(1979)>, <람보(1983)> <플래툰(1986)>, <포레스트 검프(1994)> 등 베트남 전쟁을 다룬 많은 영화를 만나왔다. 대중에게 강한 영향력을 주는 매체이니만큼 영화는 정치사회적 성격을 갖게 되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동일한 사건을 다루는데도 재현방식에 따라 진실에 대한 해석 양상은 조금씩 조작되고 변해가기도 한다. 전쟁 후 겪는 소외를 다루기도 하고, 무자비한 민간인 살해나 대량살상무기의 피해를 사실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폭력에 기댄 주인공의 심리를 통해 전쟁의 이면을 들추기도 한다. 또 사회적 용서를 유도하거나,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폭력에 대한 감정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든 베트남 전쟁이 미국인들에게 남긴 상처는 계속해서 영화적 소재로 재소환되어 미국의 도덕성을 회복하려고 했다.

 

- 잠들 수 없는 밤이 이어지다

 

 

마틴 스콜세지가 1976년에 연출한 <택시 드라이버>는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이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수상 소감에서 언급해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고, 영화 <조커>가 오마주한 작품이기도 하다. 전체 내용은 베트남 종전 직후의 미국을 배경으로, 뉴욕 맨해튼 뒷골목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퇴역 군인 트래비스 비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감독은 대도시 뉴욕의 삭막하고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인물의 고독과 혼란, 방황을 보여주면서 미국 사회의 총체적 암담함을 보여준다. 부정과 부패, 국제적 망신까지 당한 후 뉴욕에서는 온갖 종류의 범죄율이 사상 최대로 높아지고 있었는데, 낮에도 총칼을 소지한 인물들이 부지기수였다. 과거의 참전 용사들이 귀환 후 영웅대접을 받았다면,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무기를 익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사회의 잠재적 불안 요소로 취급받았고, 대부분이 극심한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갔다.

 

트래비스 역시 미국의 숭고한 가치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으나 남은 것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한 불면증뿐이다. 그가 밤에 택시를 모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화 초반, 트래비스는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지만 현실 속으로 편입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베키와의 만남을 통해 이는 구체적으로 시도되는데 밥을 먹고 선물을 하고 데이트를 한다. 그러나 그 편입과정은 만만치가 않다. 데이트 장소가 포르노 극장이라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대통령 후보인 상원의원 팔레스타인이 트래비스의 택시에 승객으로 오르자 계속해서 말을 걸지만 대꾸는 신통찮다. 이어서 12살의 어린 창녀 아이리스까지, 그와 의미있는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은 없다. 그의 존재는 사회 속에서 부정된다.

 

 

모두에게 존중받지 못한 채 사회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트래비스는 정치인 팔렌타인을 저격하기로 마음먹고 총과 몸을 준비해 결전의 길을 나선다. 그러나 경호요원들의 눈빛 하나에 허둥대며 도망친다. 그 모습은 다시 봐도 어이가 없다. 뒤이어 분출하지 못한 분노를 안고 아이리스가 있는 사창가로 달려가 무시무시한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때 인상적인 장면은 그가 포주를 죽인 후 계단에서 보인 모습이다. 살해 후 갑자기 오는 현실감이라고 해야 할까. 멈칫 계단에 앉아서 고개를 숙인 그의 고뇌는 되돌릴 수 없는 절망을 마주한 상황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다. 결심하고 일어선 그 다음 장면에서 거침없는 총격씬이 이어진다.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모두 죽이고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날리는 트래비스의 미소는 클로즈업된다.

 

- 원치 않는 결말이라도, 결말은 온다

 

나는 오래도록 <택시 드라이버>의 결말을 주인공의 죽음으로 기억했다. 피칠갑이 되었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탓일 수도 있지만, 젊었던 시절의 나는 그가 이 비극적인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 모양이다. 그러다 다시 영화를 보면서 그가 멀쩡히 살아났고, 어린 아이리스를 구하며 갱단 소굴을 소탕한 영웅이 되었으며, 여전히 택시를 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영화 속 그의 일상은 조금 편해진 모습이었고, 이전에 거리를 두었던 동료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조금 기괴하게 여겨졌다. 그가 원한 삶이 이런 것이었을까. 차라리 죽었더라면...

 

 

마틴 스콜세지는 어느 인터뷰에서 ‘비록 영화의 결말에서 트래비스가 통제력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가 언제든 다시 폭발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이탈리아 이민 2세대 출신인 감독은 온갖 이민자들이 모여든 뉴욕의 추악한 뒷모습과 미국이 내세우는 가치관이 지닌 허구성을 일찌감치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은 트래비스가 마지막에 전쟁처럼 벌인 총격살인행위가 사회정의로 탈바꿈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경고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미국이 당시에는 베트남전을 반성하고 있지만 다시 그와 같은 행위를 반복될 수 있다고 말이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모순에 의해 발생한 불안이 근본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니 말이다.

 

<택시 드라이버>는 오프닝과 엔딩 장면이 거의 유사하다. 택시를 모는 트래비스와 그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인다. 중간을 보지 않는다면 두 장면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마치 우리의 어제 오늘의 아침과 저녁이 비슷하게 굴러가는 것처럼 말이다. 트래비스를 통해 감독이 보여준 모순되고 소외된 삶은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서 더 가속화되고 있다. 내일의 안정된 삶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거나 행복을 위해 경쟁에서 승리하라는 것과 같은 모순에서 발생하는 불안이 우리들의 삶에 많은 부분을 차지해간다. 우리 역시 아름답고 윤리적인 사회정의를 꿈꾸며 행복한 삶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정반대로 살면서 이상적인 결말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다시 생각해봐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댓글 4
  • 2021-11-22 20:44

    전 이 영화 처음 봤던 때는 베트남 전쟁 등등하고는 거의 연결 못하고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가 기억남았어요.

    거울보며 삭발하는 장면, 푸샵하면서 몸 만드는 장면 등등....

    얼마 전에 다시 보면서 아... <택시드라이버>가 이런 영화였구나~! 했답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모순되고 소외된 삶"을 사는 우리 모두의 불면과 분노와 우울은 어떤 스토리가 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으며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 2021-11-24 17:01

    더 나은 세상은 왠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드네요… ㅜ

  • 2021-11-27 18:23

    지난주까지도 토요일 오전이면 영화인문학을 했는데, 오늘 허전한 마음에 이 영화를 보고 띠우샘 글을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로버트 드니로가 멀쩡하게 택시를 다시 모는 걸 보고 우리 영화 '하녀'가 생각났어요. 파괴적인 결말이 예전엔 어디서나 부담스러웠던 걸까요. 영화가 어디까지 현실의 문제를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글 잘 읽었어요^^

  • 2021-11-30 07:11

    우습게도 제 기억에 남는 베트남전쟁씬 영화는.......한국영화 <클래식>입니다ㅎㅎ

    조승우(준하)가 베트남전에서 시력을 잃고 첫사랑앞에서 그걸 감추려고 했단 말이죠. ㅋ~

    전쟁은 트래비스에게도 준하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넹 ㅜ.ㅡ

     

     <택시 드라이버>,  띠우샘 글 읽고나니 다시보고싶어졌어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124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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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2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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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8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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