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 42길 4회] 미안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 비토리오 데 시카 <자전거 도둑>

청량리
2021-11-07 22:25
304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영화대로 42길, 4]

 

미안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자전거 도둑, Ladri di biciclette |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 1948

 

 

 

세트 없는 현실, 현실 같은 세트

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실업난에 허덕이고 있는 이탈리아. 빈둥거리던 안토니오에게 겨우 일거리가 생긴다. 어머, 이건 무조건 해야 해!! 고용의 필수조건은 ‘자전거’ 지참이었다. 순박하나 결단력이 부족한 안토니오를 대신해 그의 아내는 결혼 예물을 팔아 전당포에 저당 잡힌 자전거를 찾는다. 그러나 어느 날, 일하던 도중 그는 아내가 어렵사리 마련해 준 자전거를 눈앞에서 도둑맞는다.

 

전당포에서 찾은 자전거로 일자리를 얻은 안토니오와 그의 아내. 그러나 부푼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인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은 영화 <자전거 도둑>(1948)은 모든 장면을 ‘세트’ 없이 현장에서 찍었고, 조명도 없이 자연광을 이용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는 전후 이탈리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일이 없어 구걸하듯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모인 광장, 수도공급도 안 되고 변변한 도구도 없어 보이는 주방, 물건들을 맡기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줄을 선 전당포가 그대로 영화 속 배경이 된다.

어쩌면 당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부서진 삶의 터전과 먹고 살기 힘든 궁핍한 생활에서 영화를 찍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세트와 조명을 만들 수 없으니 자연광에 의지해 ‘올로케이션’으로 찍었고, 돈이 없으니 길거리배우들을 캐스팅했다. 그러나 네오리얼리즘은 피폐한 현실을 가리기 위한 국가적 ‘선전영화’나, 할리우드 영화의 물량공세에 저항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기택이 살고 있는 집 앞의 골목길 세트장.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된 봉준호 감독. 그의 대표작인 영화 <기생충>(2019)의 장소들은 어딘가에 있는 ‘현장’ 같지만, 대부분이 거대 자본이 투입된 세트장에서 촬영됐다. 박 사장의 대저택은 물론이고 기택이 살고 있는 반지하방,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허름한 골목길 모두가 영화를 찍기 위해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세트’다. 극적인 미장센의 구현과 내러티브 전달을 위해 더욱 ‘현실’처럼 보이는 무대를 만든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이 돋보인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과 <자전거 도둑>은 정반대 지점에 있는 영화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현실의 재현, 재현된 현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자신의 자전거를 훔친 도둑(이라 확신하게 된 사람)을 붙잡았지만, 그의 살림은 오히려 안토니오보다 열악하기만 하다. 도둑은 처음에는 안토니오를 알아본 듯 쭈뼛거리지만, 동네에 아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오히려 떳떳하게 소리친다.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안토니오는 그대로 동네에서 쫓겨나고 만다.

허탈하게 아들과 함께 길바닥에 주저앉는 안토니오. 그는 결국 무엇에 홀린 듯 남의 자전거에 손을 댄다. 그러나 첫 번째 절도사건(도둑)과는 다르게 그는 곧 붙잡히고 온갖 모욕을 당한다. 아버지가 도둑으로 붙잡혀서 눈물을 흘릴 때 아들은 슬며시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 준다. 영화는 그들이 사라진 이탈리아 길거리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응시하다 끝난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더 이상 주변사람들과 구별하기 어렵다. 전후 피폐해진 이탈리아인 모두가 안토니오이자 그의 아들인 셈이다.

 

자전거를 되찾는데 실패한 두 사람은 길바닥에 주저 앉는다. 이때 안토니오의 눈에 자전거 한 대가 들어온다.

 

당시 부유한 저택을 배경으로 한 현실도피적인 영화가 국가 정책적으로 장려됐었으나, 전후 이탈리아의 현실을 직시하려는 태도는 ‘네오리얼리즘’의 흐름을 만들었다. 만일 안토니오도 자전거를 훔치는 데 성공했다면, 그래서 직장에서 다시 일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이후 자전거 주인에게 돈도 갚았다고 한다면? 그러나 속편은 어디까지나 ‘영화’에서나 가능할 따름이다.

영화에서는 두 명의 도둑이 등장한다(원제는 ‘자전거 도둑들’이다). 안토니오의 자전거를 훔친 도둑과 또 다른 자전거를 훔치려 했던 안토니오 자신. 하지만 그들의 절도행위는 각기 ‘다른’ 사건으로 일어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반복된 절도사건에서 통해 드러나는 차이는 주인공의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라, 안토니오가 처한 현실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의 재현일 수밖에 없으나, 굳이 재현적인 영화일 필요는 없다. 영화 <자전거 도둑>에서 극 중 안토니오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황폐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삼지도 않고, 이탈리아의 전후 상황을 다큐처럼 전달하는 방식으로 안토니오를 내세우지 않는다.

물론 영화의 메시지나 진정성이 반드시 리얼리티를 담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속 리얼리티가 현실의 왜곡이나 미화로 이어진다면 재현의 도구에 벗어나긴 어렵다. ‘리얼리티’는 매우 주관적 개입을 통해 판단될 수밖에 없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계급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해석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택은 아직도 그 집에서 살고 있을까? 또 다시 누군가를 맞이할 것인가?

 

<기생충>에서 마지막 장면에 아직도 그 집 계단 밑에 숨어사는 기태의 모습은 원래 살고 있었던 죽기 전 근세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194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특징은 장르영화, 세트구조, 닫힌 결말이었다. 때문에 관객들이 극장을 나오는 순간, 허구의 스크린은 삶의 장소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생충>이 전하려는 메시지나 진정성은 완벽하게 그 ‘리얼리티’를 확보했음에도, 냄새나는 골목길은 기택가족의 우발적, 유희적 사기극을 위해 충실한 배경이 되어줬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엔딩크래딧과 함께 그것이 허구임을 재인식한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의 수상소감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시네마’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다”고. 그렇다면 지금도 유효한 네오리얼리즘의 질문은 이러하다. 우리가 깨뜨려야 할 것과 바라봐야 할 현실은 무엇인가? 그때 재현도구가 아닌 영화의 역할은 무엇인가?

 

 

 

댓글 1
  • 2021-11-09 00:49

    어쩌면 지금은 ‘리얼’이 불편해진 게 아닐까요? 

    <기생충>에서 더 나아가 <오징어 게임>은 아예 게임 세트임을 보여주잖아요.

    사람들이 현실을, 리얼을 직시할 힘이 없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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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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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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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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