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 42길 3회] 선(善)이 독선(獨善)이 되는 순간/ 밀로스 포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띠우
2021-10-24 20:13
455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으며,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이 독선(獨善)이 되는 순간

밀로스 포만 감독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 1975

 

 

-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제시카 랭 주연의 <여배우 프랜시스(1982)>는 193,4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실제 활약했던 여배우, 프란시스 파머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영화다. 당시 혜성처럼 나타나 큰 인기를 얻어 그레타 가르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녀는 할리우드 스타시스템 안에서 철저하게 통제받던 여배우들과 달리 정치사회적 발언에 적극적이었다. 스타는 여론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쓴 소리를 하는 그녀는 주시대상이었는데, 결혼 6년 만에 이혼을 하면서 소동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었고 전두엽 절제술을 받게 된 후 삶이 망가져 갔다.

 

                                     

                                                                        배우 프란시스 파머의 모습

 

포르투갈의 신경학자 에가스 모니즈는 실험 중에 침팬지의 전두엽을 제거했다가 그들이 조용해진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를 정신이상자들의 발작과 공격성에 대한 치료에 도입해 1949년에는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한다. 세계대전 이후 급증한 외상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미국은 이 방법을 도입하였고 뇌신경학자 월터 프리맨은 얼음송곳을 이용한 전두엽 수술법을 개발했다. 이것이 프란시스의 뇌를 망가뜨렸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사회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미국에서만 4만여 건이 진행되었는데, 결국 환자들의 신체에 심각한 기능저하가 일어났다. 더구나 국가가 교묘하게 반사회적 인물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악용한 사례들이 늘어났다. 10여년에 걸쳐 계속해서 문제들이 발생하자, 1967년 이후 시행되지 않게 되었다.

 

작가 켄 키지는 프란시스 포먼의 사건을 중심으로 소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1962)>를 발표했다. 1975년에는 밀로스 포만 감독이 이것을 영화화해 아카데미 5관왕을 차지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 또 그룹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프란시스 파머는 시애틀에 복수할 거야(Frances Farmer Will Have Her Revenge on Seattle,1993)’라는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독단적인 권력의 힘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존재해지만,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그들의 소신있는 발언은 어둠속에 묻혀졌다. 개인들을 보호해야할 사회가 도리어 개인들을 통제하고 억압해왔던 것이다.

 

- 권위가 독선(獨善)이 되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권위적인 정신병원의 시스템에 맹목적인 순응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들을 그려내면서 당시 미국 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범죄자 맥머피(잭 니콜슨)는 교도소 공동작업을 피해 정신이상을 가장해 지내기 쉬울 것 같은 정신병원으로 수송되어 온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병원은 감옥보다 더 철저하게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병원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수간호사 렛체드(루이스 플렛처)는 저항하는 환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면 멸시와 혐오, 잔인한 학대도 서슴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루이스 플렛처가 연기한 렛체드

 

우리는 흔히 일상이 흘러온 대로 매일매일을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을 정상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전체 시스템 안에서 독특하게 튀는 말과 행동은 비난 대상이 되기 쉽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대신 틀렸다고 지적하며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짓는다. 그 목적은 모두가 안정된 사회 속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하는데 있다. 복잡한 세상의 거대한 톱니바퀴에서 효율적인 부품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탈한 삶을 보장한다는 믿음 하에 유지된다. 병원안의 모든 일상은 맥머피의 등장 전까지 수간호사의 권위 아래 꾸려지고 있었다.

 

사건은 맥머피가 이 병원으로 옮겨오면서 아주 우연하게 시작되었지만, 그는 정신병원의 실질적인 권력자에 맞서는 인물이 되어간다. 월드시리즈를 보고 싶은 맥머피는 렛체드에게 일과표를 변경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렛체드는 다수결을 제안하는데 대부분의 환자들은 손을 드는 일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맥머피는 다시 환자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얻는데 성공하지만, 월드시리즈는 끝내 렛체드에 의해 보지 못한다. 그러자 맥머피는 환자들을 선동하며 렛체드의 권위를 조롱한다. 이를 바라보는 렛체드의 심기는 점차 불편해진다. 맥머피는 교도소에서 이송되어 왔기에 퇴원여부가 순전히 수간호사 렛체드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때 시스템은 그녀가 독단으로 치닫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병원의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는 인물, 인디언 추장 브룸든은 벙어리인 척하면서 살고 있다. 그가 콤바인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종이나 신분의 한계로 인해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완벽하게 단절시켜야만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맥머피는 그를 자극하여 일상의 균열을 일으킨다. 농구를 하는 그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져 있다. 대책 없지만 끊임없이 저항하는 맥머피, 그의 행동들은 브롬든 뿐만 아니라 병원전체질서에 동요를 일으킨다. 차츰 수간호사 렛체드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맥머피는 탈출하기 전날에 전두엽 절제술을 받게 되면서 폐인이 되어버린다. 영화는 브룸든이 맥머피를 편안한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정신병원을 탈출하면서 끝이 난다.

 

- 어쨌든 난 시도는 했어, 최소한 노력은 했단 말이야

 

1960년대 미국은 경제적으로 물질만능주의와 성장발전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정치적으로는 인종차별이나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해 엄격한 보수주의의 잣대를 들어 혐오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압적이고 지배적인 사회체제에 저항하여 인간의 자유에 대한 질문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사실 맥머피의 말과 행동은 거칠고 즉흥적이고 선동적이기에 반사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렛체드의 행동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가 가진 근본적인 폭력성을 보여주는데 있다. 어느 틈에 올바른 사회질서유지를 위해 기능해야할 것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까지 이르렀음에도 모두가 무감각하다. 혐오와 폭력을 이용해 체제 자체, 권력 자체를 목표로 행동하는 그녀야말로 어떤 것보다도 더 위험해 보인다.

 

                                                                   동료가 되어가는 병동 사람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주위에 기대며 살아가야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 안에서 서로에게 발생하는 권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권력은 우리를 제한하는 한편,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들은 영화 속 배경인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가정과 학교, 직장 혹은 몸담고 있는 모든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다. 순응과 저항이 수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상호작용을 통해 힘은 드러난다. 또 그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회 시스템의 유지라는 가치의 줄다리기도 계속된다. 맥머피는 끝내 월드시리즈를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하고 나서 이런 말을 남긴다. “어쨌든 난 시도는 했어, 최소한 노력은 했단 말이야”. 그 노력은 우리에게 억압적이기만 했던 지배권력이 최소한 생산적인 형태로 변화할 가능성을 발견하게 만든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정신병원 안의 고요한 일상에 돌을 던진 그의 말이 오래도록 남는다.

 

 

* ‘뻐꾸기(Cuckoo)’는 미국 사회에서 정신병자, ‘뻐꾸기 둥지’는 정신병원을 의미한다.

 

 

 

 

 

 

 

 

 

댓글 7
  • 2021-10-25 08:04

    아.........추억 돋네요.

    이 영화는 헐리웃키드 시절 봤던 것 같아요. 그때는 당연히 푸코도 모르고 가타리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직관적으로 '훈육권력'에 대해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아.... 다시 보고 싶다. 지금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이려나....ㅋ

  • 2021-10-25 21:55

    얼마전,

    넷플릭스시리즈 래치드의 앞부분을 보다가,

    영화를 검색해본적이 있었어요.

    책을 봐야하나 고민하고 말았는데,☺️

    띠우님의 글을 읽으니,

    너무너무 궁금해집니다.

    감사히 잘 읽었어요.

  • 2021-10-29 00:34

    빌 브라이슨의 <바디>>에도 송곳으로 전두엽 절제술을 행하는 게 나오더만요.

    최소한의 위생수칙도 지켜지지 않고 행해진 시술이 너무 끔찍해서 보러 왔던 다른 의사가 기절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나와요.

    의료가 권력에 이용되던 시절입니다.

    유전공학이 발전하기 시작했을 땐 부랑자들을 중성화 수술해서 희생당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요.

    영화 속 간호사는 지금의 의료 권력을 예견하고 있는 것 같네요.

  • 2021-11-01 07:58

    저 간호사 디게 무서웠었는데... 정신과 병동이 어떤 곳이라는 그림이(그렇던 그렇지 않던) 그려지는데 한몫했던 영화라고 기억됩니다.

    제친구중에도 일부러 뻐꾸기 둥지로 날아갔던 친구가 있었어요.  

    어떻게 처우받고 어떤 치료과정을 거치는지 몹시 궁금해 하면서 한달정도 입원했었죠.

    저는 그친구에게 넌 참 돈도 많다 하면서 쿠사리 줬어요.

    저런 절제술은 없어졌지만 전기자극치료에 대해서는 그효과가 입증이 된다고 함에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논란은 계속 되는듯 합니다.

  • 2022-08-10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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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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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91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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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84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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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 조회 13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5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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