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 42길 1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존 포드의 <역마차>

띠우
2021-09-26 22:41
557

 

청·띠의 영화일기,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 서부영화의 거장, 존 포드의 <역마차(1939)>

 

 

  1. 서부영화의 목적은 분명했다

 

 

서부영화는 영화 탄생 초기부터 만들어졌던 장르로써, 신대륙의 황야를 다양한 양상으로 포착하여 미국의 건국신화 이미지를 구축해내는 역할을 했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는 서부영화의 황금기라고 불린다. 세계대공황의 여파와 함께 제 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될 무렵 아직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던 미국은 뒤늦게 전쟁에 참여했다. 화려하게 세계무대에 오르기 전에 국제적 위상과 관련해 내부 결속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부영화 속에서 주로 다루어진 역사 시기는 남북전쟁 이후부터 문명화되기 전까지였다. 왜냐하면 그 개척사야말로 신대륙이 누구에게나 기회의 땅이며, 평등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서부영화의 거장 존 포드가 최초의 유성 서부영화, <역마차(1939)>를 발표하였다.

 

이후 세계무대에서 강대국이 된 미국의 힘은 영화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더욱 확장되어간다. 헐리우드 영화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소음이 적고 이동이 간편한 카메라가 이용되었다. 또 정교한 녹음기술은 스크린 위에 광대한 서부의 자연환경을 재현시켜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다. 서부영화에 대한 나의 기억은 1980년대 주말 TV프로그램인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를 통해서다. 그 시기 ‘아메리칸 드림’이 열풍을 이루며 한국에도 상륙했고 성조기 티셔츠나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미국이민을 꿈꾸던 친구들이 주변에 흔했다.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1985)>이나 피터 위어 감독의 <그린카드(1991)>같은 영화들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 최근 개봉한 <미나리(2020)>의 시대적 배경과도 일치한다. 서부에 대한 팽창주의가 한풀 꺾인 시기에 다시 서부를 소환한 것, 이를 두고 사실적인 역사는 뒤로 하고 미국적 국가주의를 위해 영화가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훗날 미국영화협회에서는 서부영화, 일명 웨스턴을 ‘미국 서부 개척 정신과 이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개척의 종말을 담은 영화 장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보면 <역마차>도 그 형식을 반복하고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역마차를 타고 적대적인 인디언 지역을 통과해 로즈버그로 향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사회적 신분을 대표하는데, 몇 사람은 공동체의 가치 체계와 갈등을 겪으며 쫓겨나는 중이다. 이 갈등은 역마차 안에서도 계속되지만 외부의 적인 인디언이 등장하자 타협과 협력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생성해낸다. 이유는 간단하다. 역마차가 파괴되거나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탑승중인 사람들의 운명 역시 불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우선 내부 결속이 필요하다. 영화는 아직 불안정한 세계를 묘사하며, 그 속에서 문명과 야만이 부딪히는 순간의 투쟁을 보여준다. 미국은 자국의 무한한 가능성과 막힘없는 전망을 영화 속에서 극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그들의 팽창주의 전략을 공공연히 내세우고 있다. 여기까지는 서부영화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2. 존 포드, 질문을 던지다

 

“관객들은 인디언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들은 인디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디언들이 자신들만의 위대한 문화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존 포드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전통 서부영화는 항상 백인이 주인공이고 인디언이 악당이므로 무의식중에 인종주의를 퍼뜨린다. 인디언을 대놓고 차별하지 않아도 영화 이미지는 그런 효과를 낳는다.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역마차와 인디언들, 그리고 기병대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진다. 이후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온 전신은 오직 ‘제로니모’라는 한 마디 말을 전하고 끊긴다. 제로니모는 1848년 이후, 자신들의 땅에 침범한 멕시코 군과 미국 군대에 맞서 30년 동안 싸웠던 인디언 전사의 우두머리다. 감독은 관객에게 우선 특정 고정 관념을 심어준 후 자신이 바라보는 진실을 영화적 장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역마차>는 제로니모에 대한 공포로 시작하지만, 이후 전개는 인디언과의 대립보다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치열한 갈등 양상은 야만(인디언사회)과 문명(백인사회)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존 포드는 전통적인 초기 서부영화와는 다른 인물유형을 <역마차>에서 선보이고 있다. 초기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들은 선악의 구분이 명확했다. 정의롭게 법질서를 수호하는 백인 주인공은 선이고, 잔혹한 살인을 일삼는 인디언은 악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 구분이 불분명해진다. 우선 주인공 링고는 공동체의 법질서를 뒤흔든 탈옥수고, 달라스는 공동체에서 꺼리는 매춘부다. 동시에 정의로움을 가졌고 누구보다 선한 마음을 지녔다. 이들이 타게 된 역마차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았을 때, 그 안에 위기가 닥치자 링고는 영웅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무사히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다시 공동체의 위험요소가 된다.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이 불명확하게 돌아간다.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인물유형의 등장은 지금 시각으로는 자연스럽지만 당시에는 꽤나 새로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한편, 존 포드는 괴팍하고 반항적인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다음은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매커시즘은 영화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당시 미국감독협회 회장이었던 조셉 맨케비치는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십계>를 연출했던 세실 B. 드밀이다. 그는 협회에 속한 모든 감독들을 향해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자고 주장했다. 서슬퍼런 그 기세에 아무도 나서지 못했던 그 순간에 존 포드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나는 존 포드요. 웨스턴을 만듭니다.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드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드밀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싫소. 당신이 지지하는 것도 싫소. 오늘밤 여기서 당신이 말한 것도 싫소.”

 

영화 이야기와 묘하게 중첩된다. 세실 B. 드밀의 요구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이유는 공산주의를 적으로 규정한 공동체의 법질서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때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였기에 공산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감독이었기에 때문에 서부영화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게 된다.

 

3. 협력 자체가 목적인 공동체를 꿈꾸다

 

<역마차>는 두 주인공 링고와 달라스가 모뉴먼트 밸리를 향해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그들을 배웅하던 보안관은 ‘저들은 문명의 이기로부터 해방되겠군’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문명의 이기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모두 자연이나 사회 환경과 관계를 맺으면서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런데 문명화될수록, 법치화될수록, 자본주의화될수록 공동체는 자신의 근원인 (야만이라 폄하되는) 자연과의 접촉을 점차 잃어가는 것 같다. 이제 그 결과로 마주한 것이 코로나라는 생각이 든다. 눈앞에 닥친 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불편을 묻어두고 국가차원의 협력에 돌입하였다. 그렇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나 백신 접종이 근본적 문제해결이 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서부영화는 차츰 역사적 반성을 통해 인디언의 고난사와 백인의 잔인성을 고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분법의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인간 사회의 힘 구도에 따라서 주류 시각이 바뀔 뿐이지 위계적인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은 인디언의 자리에 흑인 혹은 여성 등이 자리한다. 이분법의 세계에서는 오늘의 적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적이 생긴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그 너머의 것이 보이지 않는다. 존 포드는 선악이 공존하고 문명과 야만이 복합적으로 엉켜있는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서부영화가 갖지 못했던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링고는 그 경계를 오가는 인물로서 두 세계 모두와 접촉이 가능했기에 그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찾아올 것이다.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 분명한 우리에게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법질서만을 들이미는 것은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우니 말이다. 리처드 세넷은 『투게더』에서 우리에게 협력 자체를 목표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기존 공동체의 유지가 목적이 아닌 현재의 삶을 생동감 있게 생성해내는 협력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현재의 질서체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도 비공식적인 협력관계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역마차> 안에서 순간 생성되었던 비공식적인 협력이 떠오른다. 이때 우리가 갖고 있는 경계를 허무는 것이 우선이다.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이 달랐던 역마차 안의 사람들이 이전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새로운 가능성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나와 너를 경계 짓기보다 그 사이의 ‘와’에 집중한다면 문제는 의외의 방법으로 풀릴지도 모른다.

 

 

댓글 5
  • 2021-09-27 09:28

    아, 시작되었군요.

    첫 연재가 존포드의 <역마차>라......

    제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 <젊은날의 링컨>과 같은 해인 1939년에 만들어진, 소위 '서부극' (서부극 자체가 논쟁적인 장르이죠)의 시원, 시초, 원형!
    "풍경의 시간"을 영화적으로 발명한 기념비적 저작!!!!!!!!!!!! (아, 상투적 표현...ㅋㅋㅋ)

    너무 할 말이 많아서 댓글로 다 못 달겠어요...ㅎㅎㅎ

  • 2021-09-27 11:02

    영화대로에서 영화사를 한 번 훑고 갈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기네요~

  • 2021-09-27 22:18

    영화로 내는 사이길~~ 두 분의 건필을 기원하며^^ 영화에 대한 찐한 이야기 기대할게요~~

  • 2021-09-28 10:46

    서부영화를 아무생각없이 봤는데 띠우님의 글을 읽어보니 새롭게 보이네요.

    <역마차>에서 읽어 낸 ‘이분법’적 삶의 방식!

    코로나 펜데믹의 원인이고 펜데믹을 극복 못하는 원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 2021-09-28 11:31

    저는 영화를 보고나면 금방 잊어버려요.(영화만 그런 건 아닙니다만..ㅋ)

    영상으로 뭐가 잘 입력이 안되는 장치를 갖고 있는지, 아니면 한 번만 봐서 그런건지..

    이렇게 글로 영화를 보면 좀 더 기억에 남을까요?

    청띠의 영화연재, 재미있게 잘 읽고.. 또 틈나는대로 영화도 찾아서 볼게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띠우
2024.04.28 | 조회 7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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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66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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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조회 13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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