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 양생 7회> 함께 만드는 루틴!

둥글레
2021-09-06 23:58
366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집순이다. “둥글레가 집순이라니 믿어지지 않아!”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뽀시락 거리며 뭘 만드는 걸 좋아했다.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집안에서 걷지 않고 굴러다닌 적도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운동하기를 싫어했다. 그런데 형제들도 그렇고 운동신경은 발달한 편이어서 운동을 하면 곧 잘 배운다. 스노보드도 하루 만에 뒤로 내려오는 것까지 마스터했다. 이런 나의 성향들이 합해져 나오는 결과는 늘 정해졌다. 어떤 운동에 꽂히면 빨리 배워서 오버하다 금방 질리고 만다. 결국 운동이 루틴이 되질 못한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버티다가 작년에 문제가 생겼다. 작년이 운기적으로 폐나 기관지에 염증이 생기기 쉬운 해였다. 코로나 유행만큼이나 내 기관지 염증도 계속되었다. 기관지가 좁아져서 나오는 천명음에 잠을 깨다 보니 푹 잘 수가 없었다. 54일간 지속된 장마에 기관지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기침과 가래를 달고 살았다. 운동을 해서 습을 말리고 기운을 돌리지 않으면 천식은 더욱 심해질 거라는 판단이 섰다. 해서 큰맘 먹고 필라테스 PT를 시작했다. 인도 여행을 하겠다고 모아 둔 목돈이 들어갔다. 스스로 만들지 못한 운동 루틴을 남들처럼 돈의 힘을 빌어서 시도해본 거다. 

 

처음에 돈의 힘은 효과가 있었다. 운동을 하니 호흡을 깊게 하게 되었고 몸의 순환이 좋아졌다. 하지만 주 2회로 한정된 운동 횟수와 비싼 기구와 트레이너에 의존적인 상황은 내게 자율성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운동이 일상화가 되지 못하고 이벤트가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 상황에 따라 운동 센터가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자 그나마 이벤트로서의 기능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올해 초에 하루 10분 운동을 하자는 밴드 모임이 있어서 가입했다. 저렴하기도 했고 10분이라서 부담이 없었다. 그즈음 파지사유에서도 오후에 잠깐 운동을 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기왕에 하루 10분 하는 거 친구들이랑 같이 하는 편이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친구들과 함께 하는 운동은 정말 즐거웠다. 제각각인 친구들의 운동 자세를 보면 깔깔 웃음이 났다. 무엇보다 꾸준히 하게 되었다. 꾀가 날 때도 있었지만 안 할 수가 없다.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운동합시다!”하는 기린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고 친구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10분 운동 구성은 간단하다. 간단한 스트레칭, 서서 하는 복근 운동, 스쿼트, 런지 등 다양한 하체운동, 상하체를 함께 비틀거나 움직이는 온몸 운동 등이다. 구성은 간단하지만 운동을 하면 곡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굳어진 40~50대 몸들이 지르는 비명이다. 평소 몸을 잘 움직이지 않고 근육도 부족하니 10분이지만 운동의 강도가 크게 느껴지는 거다. 슬슬 운동 시간을 피하는 친구, 못하겠다며 손사래를 치는 친구가 생겼다.

 

이런 와중에 청년 우현이 운동에 합류했다. 우현은 살도 찌우고 몸 컨디션을 조절하고 싶어 했다. 얼마 가려나?라는 나의 우려가 무색하게 적극적으로 운동에 임했다. 이런저런 운동 자세를 연구(?)하더니 스쿼트는 이렇게 하면 운동 효과가 좋다거나, 새로운 운동이 추가되면 어떤 부분에 좋은 운동이라고 말해 준다. 워낙 움직이지 않아서 주변의 걱정을 샀던 그는 수영과 덤벨 운동까지 하더니 최근엔 살이 붙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고 왔다.

 

 

 

 

나의 경우, 운동을 6개월 이상 하고 나니 다른 운동을 할 체력이 생겼다. 숨이 차고 기침이 나서 회피했던 등산을 하게 되었고 아침에 일어나 플랭크와 푸시업도 하고 있다. 친구들도 다들 처음보다 수월하게 운동을 한다. 처음에 10분이 왜 이렇게 기냐며 힘겨워했던 겸목은 지금은 10분이 쑥 지나가서 놀랐다며 너스레를 떤다. 파지사유에 왔다가 시간이 맞으면 운동하고 가는 객원멤버들도 늘었다. 유, 모로, 지금, 노라, 곰곰, 코스모스, 자누리, 띠우, 뚜버기, 블랙, 고은, 명식 등 객원멤버들의 면면은 요일별로 다채롭다. 늘 함께 하는 기린, 달팽이, 우현은 든든하다. 

 

생각해 보면 10분 운동이 루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파지사유가, 생태공방이, 일리치약국이 ‘우리’에게 삶의 터전이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파지사유 매니저를 할 때 산책, 백팔배, 요가 등을 진행해 봤지만 이벤트성으로 끝났다. 어쩌면 그때 파지사유는 내게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이벤트에 가까운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 5일 출근하여 친구들과 일하고, 공부하고, 밥먹고, 운동하는 지금의 파지사유는 내게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곳이다. 이 터전에서 ‘함께 만든 루틴’을 통해 정미로운 일상을 길어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삶의 다른 부분도 담담한 루틴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댓글 5
  • 2021-09-07 10:06

    둥글레도 우현도 매일 10분 운동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군요. 아, 좋아보여요~~

    그동안 덥다는 핑계로 출퇴근 걷기 외에 몸을 움직이지 않은 저도 얼른 양생 루틴 만들어야겠어요!ㅎㅎ

  • 2021-09-10 12:55

    3시만 되면 어김없이 하는 그 운동이 이벤트가 아니란 점, 그래서 루틴이 될수 있었다는 말이 콕 들어오네요. 전 걷기가 좋더라구요. 날도 선선해지니 횟수를 늘여야겠어요

  • 2021-09-10 14:12

    10분 운동 객원맴버

    은근 자랑스럽군요 ㅋㅋ

     

    루틴을 만들어 가는 운동!

    참 좋습니다 

     

     

  • 2021-09-10 22:10

    10분 운동 정예멤버를 모집~~ 언제나 환영^^ 하다보면 재밌어요~~

  • 2021-09-12 18:18

    저 필라테스 운동기구... 얼핏 고문기구인줄 알았습니다ㅎㅎ 자발적으로 근육의 고통을 선택하고 즐기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다르겠지만요. 몸만들기는 7할이 음식이고, 2할이 운동, 나머지 1할은 의지라고 합니다. 오버하지 않는, 담담한 루틴 좋네요.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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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2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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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2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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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조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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