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 양생 6회> 동의보감에서 찾아 본 여름의 양생법

기린
2021-08-24 07:19
372

  올 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자료에 의하면 37일간 폭염경보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트는 파지사유에서는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온 집안 기물들이 전부 열기를 뿜었다. 서향이라 오후 세시쯤부터 넘어가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풀가동해도 열이 식지 않았다. 저절로 냉커피를 찾게 되었다. 그래도 잠자리에 들면 열기 때문에 뒤척이기 일쑤였다. 이런 여름엔 어떻게 일상을 지내는 것이 몸을 잘 보살피는 양생일까 궁금해서 요즘 공부하고 있는 『동의보감』을 펼쳤다.

 

 

 

네 계절 중 여름철이 가장 조섭하게 힘드네

묵은 추위 몸 안에 숨어 있어 배가 차네

보신할 탕약이 없어서는 안 될 것

싸늘하게 식은 음식 입에 대지 말지어다

심장 기운 왕성함과 신장 기운 쇠약함을 금해야 하지만

특히 정(精)과 기(氣)의 유설을 꺼려야 할 것

자는 곳은 삼가 문을 꼭꼭 문을 닫고

생각을 가라앉혀 마음을 평화로이 하라

얼음물과 찬 과실도 몸에 좋지 않아

가을철 반드시 학질을 일으킨다네

『한 권으로 읽는 동의보감』 536쪽 「위생가(衛生歌)」

 

 위의 노래에서는 여름의 더위를 찬 기운으로 다스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몸 안이 차지면 오장육부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여름의 더위를 피하지 말고 땀을 내서 기운을 밖으로 보내는 것이 양생의 도라고 한다. 하지만 올 여름의 폭염은 여름의 양생의 도를 따르기에는 너무 심했다. 양산 없이 밖을 나가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잠깐만 나갔다와도 땀범벅이 되었다. 여름의 열기에 열린 땀구멍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에어컨 없는 실내를 상상할 수 없는 날씨였다.

 

 

 

 『동의보감』에서는 오장육부의 장기의 작용에 대해 음양오행과 짝지어 설명하고 있다. 여름의 화기(火氣)와 연결된 심장은 열을 담지한 혈을 전신으로 퍼뜨리면서 몸의 기본 대사를 책임지는데, 이런 심장을 ‘군주지관(君主之官)’으로 불렀다. 심장에서 퍼뜨리는 혈액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군주의 영향력에 비유한 것이다. 겨울의 수기(水氣)와 연결된 신장은 혈액, 눈물, 진액, 뇌, 골수, 오줌 등 물의 형태인 것들의 순환에 관여한다. 신장은 ‘작강지관(作强之官)’으로 불리는데, 태어날 때부터 간직한 정(精)을 저장하고 몸의 70프로를 차지하는 각종 물을 주관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장기라는 의미이다.

 

 심장의 화기는 온 몸의 맥을 따라 따뜻하게 흐르는 혈로써 신장의 수기와 지속적으로 교류를 해야 순환이 원활하다. 그런데 양기가 발산되는 여름은 심장의 화기도 밖으로 뻗으려고 더욱 왕성해질 수밖에 없다. 신장의 물을 끌어올려 그런 심장의 화기를 제어해야 한다. 그런데 신장의 물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될까? 심장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몸 안의 진액을 더욱 마르게 한 결과 병증이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나의 경우 오래된 변비가 있어서 유산균도 먹고 섭생도 신경 쓰면서 그럭저럭 다스렸다. 이번 여름 변비가 다시 심해졌다. 다른 변화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병증이 나타나는 까닭이 뭘까 싶어 책을 찾아보니 “화 기운이 너무 강해서 진액을 말리면 대변도 굳어서 변비가 된다.”(양생과 치유의 인문학 동의보감 331쪽)고 했다. 너무 더운 올 여름 땀도 많이 흘렸고 냉커피도 잦았으니 진액이 더 졸아 들었을 테다. 신장에 물이 부족하니 심장의 불을 끄러 올라 갈 여력도 없었던 셈이다.

 

  일단 저녁마다 마셨던 냉커피를 끊었다. 찬 음료로 잠깐의 열기는 식힐지 몰라도 몸 안에서는 카페인 성분으로 진액을 더 말리는 것 같아서였다. 마침 텃밭 꾸러미에서 채소들을 받아서 일삼아 쌈을 싸먹기도 했다. 그렇다고 단번에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일단 항문 주변의 통증이 차도가 있나 가늠하면서 계속 살펴보는 중이다.

 

  주중에는 에어컨 있는 실내에서 보냈지만 휴일 날 뜨끈뜨끈한 집안에서 지내는 일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다. 어느 일요일, 햇빛이 더 강렬해지기 전에 배낭에 이것저것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주말마다 여러 둘레길을 쏘다니며 봐 두었던 약수터로 가기 위해서였다. 집에서 출발해 두 시간 정도 걸어서 상현동 광교산 자락에 있는 매봉 약수터에 도착했다. 여름 숲 그늘이 제대로 드리워져 있었다. 약수터 주변에 마련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한 여름이라 그런지 약수터에 오르는 등산객도 뜸했고, 적당히 서늘한 그늘 밑에서 때때로 골짜기로 불어오는 바람 줄기가 한결 시원했다. 챙겨간 간식을 먹고 책도 읽었다. 점점 잡생각이 가라앉으니 집중도 잘 되고 책장이 착착 넘어갔다. 정수리 위에 꽂히던 햇빛이 등 뒤로 넘어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서향으로 지어진 집에서 보내는 여름은 양생에  확실히 불리했다.

 

                                                                  <               약수터 벤치뒤로 넘어가던 한 여름 오후의 햇살>

 

 한여름의 더위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잠을 잘 때는 문까지 꼭꼭 닫아야 한다는 양생법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에어컨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참에 에어컨을 장만하라는 주변의 걱정이 귀담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정도의 폭염은 어찌어찌 견딜 만한가 싶기도 하다. 그사이 입추가 지나고 처서도 지나면서 집안의 공기도 살만해졌다. 몸의 통증도 많이 호전되었다. 올 여름 폭염을 통과하면서 자연의 기운과 내 몸이 연결되어 있음을 톡톡히 느꼈다. 본격 가을이 다가오는 즈음 내 몸이 이 계절과는 또 어떻게 조응할지 궁금해진다.

 

댓글 5
  • 2021-08-24 13:14

    살다살다 이리 강렬한 여름은 또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앞으론 매년 기록을 갱신하겠지요.

    2001년 첫 애 낳던 해가 그렇게 가물었는데, 그 땐 연일 방송에서 이렇게 가다가는 앞으로 25년 안에 가뭄으로

    인해 지구가 어떻게 된다는 협박성 뉴스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애 낳고 병원에서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

    '아이고 이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지구 환경이 너무 걱정되었더랬습니다'  사실은 주변 환경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자식으로 하여금 주변을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환경정의 회원이 되었더랍니다 ㅋ)

    다행히 그 뉴스처럼 가뭄이 지속되진 않았지만, 요새 지구촌 저쪽에서 물이 부족하여 어쩌고 하는 뉴스를 접할 때면

    20년 전이 떠오릅니다. 

     

    그나저나, 올 여름 이리 더웠고 전염병까지 기승을 부리는 데  입추 ~ 처서까지 잘 넘어오셨어요..

    앞으로의 여름은 동의보감을 지혜를 얻어와서 또 한 해 넘겨보는 기술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요... ^^

    물론 동의보감 시절과 지금은 너무도 다른지라,  저렇게 범생이 스탈의 문구들에 혹하게 되진 않네욤. 쩝.

    그래도 찬 음식 피해라, 배는 늘 따뜻하게 해라... 이 정도만 적당히 잘 버무리고 습을 만들어가면 더위로 인한

    건 쪼매 피해갈 수 있지 않을지... (아아 안마시는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하죠..   ㅋㅋㅋ)

    그리고 땀 좀 흘리고 살 좀 뺐나 ? 하고 들여다보고... (땀을 잘 안흘리는 저는 땀 좀 뺐다는 분들 보면 부럽더라고요)

    내년엔 훠어씬 건강한 여름을 날 수 있을 거에요.  기술의 발달로 인해. (더위를 견디는 기술 !!)  

    기린 🦒 응원합니다 !!!

  • 2021-08-24 13:35

    에어컨 구입!!!!

    • 2021-08-25 10:42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 그 안에서 나온 동의보감...

      인디언샘 말씀처럼 사철내내 똑같은 환경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면역력은 어디로 갔는지...

      자연의 순환을 찾아보자고 공부하는 동의보감인데,

      그냥 답이 에어컨이면 너무 하자누~~  기교가 아니라 기본이라며 !!

      • 2021-08-25 12:30

        에어컨이 기본인 시대요.....나는 애어컨 켜고 여름 났으니 기린도 그러기를...

  • 2021-08-25 09:57

    요즘은 여름도 겨울도 없어요

    에어컨에 난방기에 다 같은 조건을 만들어버리니까요

    사철 내내 같은 과일들이 마트에 쏟아져 나오니 제철 과일이 뭔지도 모르고

    꽃들도 온실에서 사철내내 피어나지요

    과일, 꽃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은 점점 더 면역력을 잃어가고 있지요

    코로나 팬데믹은 괜히 오는게 아니고 앞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올지...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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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25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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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2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4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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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조회 18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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