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1회] ‘기다림’을 찾아서, 수우주식(需于酒食)

봄날
2021-07-26 03:44
480

** 주역공부 4년차. 여전히 해석도 어렵고 뜻을 알아내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나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추동하는 주역은 매력적인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 감동을 함께 나누려 용기내어 글을 쓴다. 봄날이 픽(pick)한 주역의 말들!

 

,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

수(需)가 믿음이 있으면 밝게 형통하고 곧으면 길하여,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

 

初九, 需于郊, 利用恒, 无咎

초구는 교외에서 기다린다. 일정함이 이로우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九二, 需于沙, 小有言, 終吉

구이는 모래사장에서 기다림이다. 약간 말이 있으나, 마침내 길할 것이다.

九三, 需于泥, 致寇至

구삼은 진흙에서 기다리니, 도적이 옴을 초래할 것이다.

六四, 需于血, 出自穴

육사는 피에서 기다리나 구덩이로부터 나올 것이다.

九五, 需于酒食, 貞吉

구오는 술과 음식으로 기다리니 바르면 길할 것이다.

上六, 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來, 敬之, 終吉

상육은 구덩이에 들어가는데, 불청객 세 사람이 오니, 공경하면 마침내 길할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나는 탁구를 좋아한다. 운동삼아 시작한 것이 십 년이 넘었으니 구력(球歷)으로 치자면 고전 공부보다도 오래된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인 것에 비해, 나의 탁구 실력은 지지부진하다. 나의 탁구가 신통찮은 가장 큰 원인은, 무게 2.7g, 지름 4cm에 불과한 그 작은 공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볍고 작은 공은 나의 기다림의 한계를 시험한다. 그리고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그 가볍고 작은 공에 늘 진다. 굳이 위로삼아 말하자면, 이것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같은 운동을 하는 친구들도 대개 빠르고 세게 치는 것보다 기다렸다 치는 것을 어려워한다. 생각과 몸의 조화로운 결합은 의외로 쉽지 않다. 마음은 계속해서 “기다려”를 외치지만, 공보다 먼저 라켓을 휘두르고 나면,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십 년이 넘도록 나는 제대로 그 공을 기다리지 못한다. 탁구라는 운동에서 나는 ‘기다리는 것의 어려움’을 지독하게 느낀다. 나는 왜 그 공을 기다리지 못할까?

 

내가 성질이 급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그저 성격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라는 생각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주위를 돌아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최신 기술은, 효율적, 경제적 차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순삭’해준다. 거대한 유통망이 구현하는 ‘새벽배송’은, 내가 잠든 사이에 집앞까지 재료를 배달해주고, 아침을 차릴 수 있게 한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석에 앉아 잡지책이나 뒤적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은행 풍경은 인터넷 뱅킹으로 대체됐다. 현대에 발맞추는 ‘스마트한 사람’은 병원이고 미용실이고 예약을 해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는 사람이다. 약속한 시각보다 훨씬 일찍 나타나는 것은 할 일 없는 노인이나 루저의 몫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최신 트렌드는 간주, 즉 노래와 노래 사이에 들어가는 연주가 아주 짧다고 한다. 왜냐하면 간주가 긴 노래는 인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 시간을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나도 노래방에서, 키오스크 단말기에 있는 ‘간주점프’라는 기능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이런 집단 조급증은 성장 위주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미덕이 돼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문화적인 코드조차 모두 경제성에 수렴된다.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는 몸으로 바뀌어 간다. 내가 공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사회가,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기다리다가 남에게 뒤처진다’는 경쟁의식을 나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인간을 말하는 수우주식

그러므로 3천년 전의 세상에서 ‘기다림의 도(道)’를 말하는 수천수괘(水天需卦)는 어쩌면 주역의 그 어떤 괘보다 오늘날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괘일지 모른다. 수천수괘는 하늘에 물이 머물러 있으면서 아직 비가 되지 않고 비의 기운이 차있는 형상을 가진 괘이다. 하늘을 뜻하는 건(乾) 위에 물을 뜻하는 감(坎)이 있으니 구름이 하늘에 머물러 있는 형국이다. 비가 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 괘. 그 비를 기다리는 시간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먹구름이 얼마큼 끼어있으면 얼마 뒤에 비가 내릴지를 우리는 모른다. 혹 과학기술이 데이터를 모아 수치계산을 하면 얼마 뒤에 비가 얼마큼 내릴 것을 알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 뿐이지, 비가 내리는 시간을 당기거나, 양을 조절할 수는 없다. 자연의 일은 결국 자연 나름의 로직대로,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어야 변화하는 것이니, 비가 오기를 바란다면 비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인간세상에 비유하자면, 수괘의 때는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일 때이다. 새로운 일을 함께 할 ‘동지’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관계맺기’가 중요한 때이기도 하다. 이 관계맺기 기술 중 하나가 ‘기다림’이다. 수괘의 말들은 이런 다양한 사람들간의 관계에서 어떻게 기다려야 동지를 얻을지, 아주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가령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이 아주 멀리 있을 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어김없이 수행하면서 기다려야 허물이 없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동지가 있을 때는 그와 얽힌 이러저러한 구설수가 있을지 모르나, 자신이 도모할 일을 위해 꿋꿋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또한 정작 함께 일할 사람이 지척에 있을 때, 의심이나 의중을 떠보려는 일로 갈등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수괘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은 ‘수우주식(需于酒食) 정길(貞吉)’이었다.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동지를 기다리되, 바르면 길하다는 것.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숙제를 함께 풀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 대뜸 끌어들이지 말고, 상대가 찾아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말한다. ‘기다리는 인간’의 풍모는 이런 것이다. ‘수우주식(需于酒食) 정길(貞吉)’하는 태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기다리는 신체

내가 다니는 탁구장의 관장은 유니버시아드 대표 출신이다. 평소에는 탁구를 배우려는 수강생들을 가르치느라 공을 배급해주고 수강생의 공을 받아낸다. 그러다 가끔 제대로 된 시합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우리 모두 그 흥미진진한 시합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관장은 신통술이라도 부리는지 상대가 어디로 어떻게 공을 보낼지 미리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상대의 공을 되받아 반격하는데 그 모습은 예술에 가깝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움직이는데 공은 빠르고 힘은 그렇게 강력할 수가 없다. “공이 나한테 올 때 (어찌나 천천히 오는지) 밥을 먹고 나서도 아직 안 올 때가 많다. 그래서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그는 웃으며 말한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수우주식’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허구헌 날 기다리지 못하고 너무 빨리 라켓을 휘두르고 마는 나와, 공이 너무 늦게 와서 기다리기가 지루하다는 관장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직 하나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매번 자기 한계를 넘는 고된 훈련과 연습, 수없이 많은 경기의 경험이 수우주식하는 그를 만들어낸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나를 타인에 맞추는 것

그런데 수우주식은 단지 연습에 의해, 기다릴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기의 필요에 의해 자신의 일의 속도에 맞춰 다른 사람을 강제할 때, 일은 그르치게 된다. 실제로 수우주식은 기다리기는 기다리되 술과 음식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태도를 말한다. 온전히 기다림 자체를 즐겨야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타인의 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여유로운 모습이다.

 

얼마 전에 필립 로스의 소설 『미국의 목가』를 읽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주인공 스위드는 거대한 부와 명성, 미모의 아내와 사랑스런 딸을 모두 가진 성공한 유태인 이민 3세였다. 그런데 그 딸이 말을 더듬는다. 온갖 치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룬 꿈의 작은 흠집같은 딸의 말 더듬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다. 스위드와 그의 아내는 딸의 말더듬는 버릇을 고치라고 다그친다. 세상에 대한 앎에 눈을 뜬 딸은 그런 잘난 부모의 기대와는 반대로 극단적인 테러를 저지르고 사라진다. 스위드는 도저히 딸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꿈꾸던 목가는 산산조각이 났는데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틀 안에서 딸을 기다린다.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 나는 한동안 부모를 부정하려 애썼던 딸의 모습이 겹친다고 느꼈다. 딸을 위해 일찍 다니라는 말을 했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대학을 가라고 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딸은 내 말을 아예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진보정당에 들어갔고 운동권 친구들과 어울렸다. 나를 ‘맘충’으로 여겼고, 현실의 이익에 집착하는 천박한 부모로 몰아세웠다. 대화는 두 세 마디를 이어가지 못하고 충돌로 끝이 났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저 딸이 방긋거리며 다시 다가오기를 바랬다. 시간은 무르익었고 그때의 먹구름 낀 시간을 이제는 웃으며 안주거리 삼는 때가 됐다. 여전히 수상한 철학공부를 하고 있고, 불온해 보이는 친구들과 어울리지만, 딸은 활기있고, 자주 웃으며, 때려친다던 대학의 졸업반에 다니고 있다. 일단 해피앤딩이다. 무엇이, 어떤 기운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한 일은 별게 없다. 속상하고 눈물이 나도 ‘저 애도 나처럼 속상하고 눈물이 나는 시간을 보내겠거니’ 하며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의 일상을 보낸 것 뿐이다. 내가 강제로 관계를 끊으라고 다그쳤다면 깊어진 딸과의 감정의 골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았을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요체는 믿음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을 하고, 타인의 속도에 나를 맞춰 기다리는 것이 과연 수우주식일까? 수우주식의 태도가 기다리는 시간의 길이만을 의미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괘가 말하는 기다림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랜 노력의 시간, 괴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 기다림에는 ‘시간의 길이’ 즉, 양적인 것만을 생각했을 때는 발견하지 못하는 ‘계산불가능한’ 무엇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가치이다. 집단 조급증은, 기다리는 시간이 효율성에 입각해 순삭되어 가는 과정에서, 믿음을  잃어버려 생긴 부작용이다. 수우주식은 바로 시간의 양(量)을, 훨씬 차원높은 질(質)로 바꾸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결국 탁구장 관장이 게임에서 상대를 여유있게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훈련으로 얻어낸,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같은 자기확신은 때로 지나친 자기고집으로 넘어갈 수 있으므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올바르도록 늘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수우주식 정길(需于酒食 貞吉)'에서 말하는 '정길(貞吉)'은 바로 이런 뜻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은 물론, 다른 사물과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나와 다른 존재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절대 똑같은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 가운데에서 생기는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관계 맺기가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일종의 ‘타협’차원에서 이 차이를 받아 넘긴다. ‘믿음’은 이것보다 훨씬 세심하고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일상은 이 믿음을 키워내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밭의 역할을 한다. 매일매일 기다리는 삶 속에서 믿음을 쌓아올리는 실천이 필요하다.  ‘수우주식 정길’은 바로 ‘비를 기다리는 시간’, ‘믿음을 키워내는 시간’을 되찾으라는 메시지이다.

 

댓글 8
  • 2021-07-26 13:56

    드디어 봄날샘의 주역이야기가 시작되었네요

    시작이 기다림의 괘인 것도 의미심장한듯요^^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비가 올때까지 지낸다고 하죠 

    어쩌면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들이 함께 모여 그 시간과 과정을 공유하는게 기우제였던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기우제는 실패할수 없는 의식이죠

    기우제를 지내면 늘 비가온다!!!

    요즘 저도 기다리는거 잘못해서 괴로움을 스스로만들고 있는데 수우주식하면서 타인의 시간에 맞추기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봄날샘의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봅니다^^

     

  • 2021-07-26 14:19

    기다림이라...요즘 듣기 어려운 말이라 더 귀에 잘 들어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1-07-26 15:02

    수우주식! 멋진말이군요 기다림 그리고 믿음^^

  • 2021-07-26 15:43

    ‘일정함이 이로우니 허물이 없을 것이다’

    뭐든 후딱 성과를 내려는 저에겐 이 말도 와닿습니다! 꾸준하게 미미하게 해봐야겠다고 뭘 좀 마음먹은 차에 만난 괘네요!

  • 2021-07-26 18:07

    '타협'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훨씬 더 적극적인 실천이 저의 일상에서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생각해봅니다..

    시크하고 쿨하게 넘기는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곱씹으며 때론

    미움의 감정속으로 때론 복수의 감정속으로

    나를 가두지 않는것..

    음ᆢ나의 감정에 시간을 내어주고 기다려주는것 부터 시작해야 될것 같습니다

    봄날샘~잘 읽었습니다!

  • 2021-07-27 06:37

    요즘은 매우 액티브한 시대라 기다림은 수동적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처음 수괘를 읽을 때 그렇게 읽었었는데, 물론 그런 기다림도 좋았습니다.

    이번 시즌에서 다시 읽은 수괘의 기다림은 그 자체가 액티브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다린다'는 것은 밥을 먹는다와 같은 부류의 행위를 뜻한다면?

    기다림이 주역 최고의 철학을 함축하고 있는 이유가 되겠지요.

    기다림은 그 자체 액티브한 한 일이라는 것, 그 어려운 이야기를 봄날쌤이 잘풀어주셨네요.

    다음 글 기다리게 되네요 ㅎㅎ 

     

  • 2021-07-28 18:24

    최선을 다 하면서 기다리자!

  • 2021-08-05 10:59

    기다림의 괘! 성격습한 저에게 어려운 과제이지만 더 맘속에 넣고,.. 자꾸 뛰쳐나가고싶은저에게, 육아에서도 여러모로 필요한괘인듯싶습니다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다음글도 기대됩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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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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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71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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