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양생에세이⑥] 백신과 포스트휴먼 정치학

둥글레
2021-07-2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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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과 포스트휴먼 정치학

둥글레

 

 

  에세이 개요에 대해 조원들끼리 서로 코멘트를 해주는 자리에서 지원이는 백신에 대해 써보라며 자기 관심사를 내게 토스했다. 난 흔쾌히 그 주제를 받을 수가 없었다.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내 속에 여러 입장이 혼돈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신이라는 주제가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백신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있고 그런 와중에 ‘약사’라는 내 직업은 나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고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의무이기도 했다. 더는 회피할 수는 없었다. 이 기회에 과학적으로도 좀 더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아스트라제네카에도 화이자에도 문의를 했는데 상당히 모호한 답변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문의 과정에서 나의 의문은 증폭되었다. 이 의문에 이어 이 사태가 단지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문제로 환원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국이 시행하고 있는 범세계적 백신 정책은 전체주의마냥 한결같고 백신의 개발과 도입과정도 이례적이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윤리와 절차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브라이도티의 논의를 통해서 이 상황을 포스트휴먼적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려 한다.

 

 

  유전자 백신이 연 세상

  사실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작년에 팬데믹이 시작되고 나서 넷플릭스에서 본 <팬데믹>이라는 다큐에서는 조류독감의 유행을 염려하고 있었고,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라는 책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 가능성도 함께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약사연수교육을 받던 중에 WHO 보고서와 질병 X(1)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보고서는 코비드-19 유행 몇 달 전인 2019년 9월에 발표되었는데, 첫 번째 질병 X는 인수공통 감염병이면서 RNA 바이러스이고 호흡기를 타깃으로 한 바이러스일 거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의료가 이토록 발달한 시대에 이렇게 자세한 예측을 하고도 우리는 왜 이 팬데믹을 막지 못했을까?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아니면 속수무책이었을까?

 

  <팬데믹>이라는 다큐에서는 백신 개발에 대한 리포팅을 길게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바이러스가 유행할지 모르고, 바이러스의 높은 변이력에 대항할 수 있는 백신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질 리가 없다. 다큐 속의 젊은 개발자는 ‘빌 게이츠 재단’에서 돈을 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오랜 시도 끝에 펀딩을 받았지만 그 성공이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연수교육에 나온 바이러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동물용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치료제는 바이러스 발견 이후 80년 동안 성공하지 못했고(2), 백신은 개발되었지만 자꾸 변이 하는 바이러스 때문에 그 효과가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19 백신은 세계 최초의 유전자 백신이다. 일반 백신처럼 약독화한 균주나 감염원의 단백질이 주 성분이 아니라 유전물질(3)이 주성분이다. 또 이번 유전자 백신들은 급하다는 이유로 최소 10년이 걸리는 개발 기간과 혹독한 안전성 및 유효성 검증 과정을 가볍게 뛰어넘었다.(4) 게다가 백신 개발에 각국 정부는 엄청난 돈을 투입하고 있다.(5) 

 

 

  그럼에도 이 백신들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저명한 의학저널인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의하면, 가장 먼저 개발되어 상업화된 세 가지 코로나19 백신(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화이자 백신, 모더나 백신)은 “바이러스 전파를 막아주는가?”와 “얼마나 효과가 유지되는가?”라는 항목에서 모두 “모른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즉 백신을 맞았더라도 바이러스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고 거리두기 등의 방역지침을 철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백신 접종률이 높은 영국과 이스라엘에서 변이종이 다시 유행하여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효능과 안전성만이 문제는 아니다. 최근 제약 기업의 신약 개발 방향은 백신과 유전자치료제를 비롯한 바이오 의약품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법정 전염병은 아니지만 대상포진이나 자궁경부암 백신 등 여러 백신들이 개발되고 있고, 유전자 분야는 검진과 치료제 부분에서 약진하고 있다. 이러한 백신들과 유전자 검진은 실제 질병이 걸린 게 아닌데도 그 질병에 대한 공포를 증가시키면서 소비를 유도한다. 유전자 백신의 긴급 승인과 광범위한 적용은 향후 유전자 치료제 허가에 있어 높았던 허들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단백질 백신(노바백스 백신)이 임상 3상을 마치고 곧 시판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유전자 백신이 그렇게 급하게 적용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혹이 든다. 그런 의혹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와 일본이 저지른 인체 실험이 떠올랐다. 심하게 말해, 제약회사들은 부작용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 아래 대규모 임상 실험을 하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 아닐까?(6)

 

 

  생명정치와 죽음정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표면적으로는 코비드-19 팬데믹과 각국의 백신 정책은 살아있는 인구에 대한 통치(관리)로서 다분히 ‘생명정치’적이다. 하지만 팬데믹 자체가 불러온 수많은 죽음-6월 말 기준으로 누적 395만-은 관리되지 못한 죽음으로서 생명정치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죽음들은 또 어떤가? 원인이나 통계조차 잘 파악되지 않고 있다. 유전자 백신의 긴급 승인 자체가 부작용으로 인한 죽음들을 용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정치에 있어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합작은 이 팬데믹 상황에서 더 긴밀하게 돌아간다. 

 

  브라이도티는 아실 음벰베의 말을 빌어 생명정치의 이면은 죽음정치라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죽음의 모습으로부터 생명정치를 너머 죽음정치를 사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 죽음의 모습들은 다양하다. 종교적 근본주의들의 성장으로 여성들과 GLBT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증가, 지구적 금융망 등 새로운 기술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성이 일으킨 빈곤, 새로운 전염병(사스, 에볼라, 조류독감, 코비드19 등)과 오래된 전염병(결핵, 말라리아)의 세계적 유행, 환경 재난이나 자연적 재난(기후 위기 등), 정신적 죽음(중독, 식이장애, 탈진, 무관심, 우울 등), 대리전쟁과 난민 등이다. 이 죽음의 모습은 중의적으로 포스트휴먼적이다. 인간중심주의(휴머니즘)라는 이해의 범위를 넘었고 또 글자 그대로 비인간적/비인도적이다.

 

  생명정치의 이면에 있는 죽음의 모습을 우린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어떤 인구 집단들의 건강한 삶이 다른 이들, 특히 자연의 퇴화된 존재들과 건강하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불가피하게 여기도록 허용한다.”(154쪽) 불가피한 죽음들을 못 본 채 하며 우리가 추구한 건강이 결국엔 우리의 죽음을 불러온 것일까? 어느덧 우리 또한 유전공학적인 데이터 경영과 ‘생물자원 해적행위’에 의해 통제받고 있었던 것일까? 유전공학 자본주의는 포스트휴먼 곤경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의 유전공학적 구조가 신체들을 생명 정보의 운반자로 축소시켰고, 그런 신체들은 금융 가치로 투자 대상이 되고 자본화되었다. 신체들은 인구 집단 전체를 새롭게 분류하는 자료를 제공했다. 분류 기준은 유전자적 소인과 자기를 조직하는 생명 능력이다. 경제적 성장과 생물학적 성장 사이에 구조적 이종동형이 존재하며, 이러한 상황이 우리 시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권력관계를 포드 시대보다 더 거칠고 더 노골적으로 만든다.(152쪽) 

 

  인위적으로 만든 바이러스 유전자가 인간의 세포핵 속으로 들어와 인간의 몸에 있는 물질로 바이러스의 단백질을 만든다! 이것은 불치의 유전병을 치료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이용한 채소와 곡식(GMO)을 먹고 의약품(인슐린 등)을 써오다 결국 우리 몸이 GMO가 될지도 모를 시점에 와 있다. 우리의 생명은 더 이상 ‘정치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생명’인 ‘비오스’가 아니다. 바이러스와 우리 사이의 종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이를 아우르는 생명 개념은 생명 자체인 ‘조에’다. 죽음의 정치학을 논하려면 생명을 더 이상 비오스가 아닌 조에로서 봐야 한다고 브라이도티는 말한다. 

 

  기술적인 것과 유기체적인 것 사이에 근본적인 분리는 없다는 차원에서 유전자 백신을 맞는 우리가 사이보그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긍정적 포스트휴먼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유전물질이 몸속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우리 주체성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과정은 국가적이면서 초국가적이다. 이 자본이 휘두르는 죽음 권력에 우리의 주체성 또한 곤경 속에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판단을 유보하고 있거나 무작정 국가 정책에 따르고 있다. 

 

 

 

  포스트휴먼 윤리학(조에 주체성)

  정부가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면 거리두기 면제, 격리 면제 등 백신 인센티브를 제시하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백신을 맞겠다고 나섰다. 엄마는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이 백신을 맞고 엄마의 백신 접종 여부를 묻자 소외되기 싫어서 결국 백신을 맞았다. 팬데믹이 주는 공포는 관계에서의 소외, 일상에서의 소외, 경제적 소외 등 전방위적으로 작동한다. 한마디로 ‘죽음’과 다름 아니다. 이 죽음을 벗어날 방법은 이 백신들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팬데믹이 예견됐음에도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백신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어떠한 대비도 못한 게 아닐까? 

 

죽음정치적 사유와 조에적 사유를 브라이도티가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곤경을 벗어날 포스트휴먼 (조에) 주체성을 수립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죽음 권력에 저항하는 지점을 포착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실천적으로는 현재의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현재의 비인간 측면인 공포와 폭력을 거부하고 그것을 전환시켜 긍정의 대안을 구축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집단적으로 작업해야 한다.”(167쪽)

 

  그리고 그녀가 얘기하는 포스트휴먼 윤리학의 열쇠는 우선 의혹과 고통이 일으키는 마비 효과들을 넘어 움직이는 것이고 그 의혹과 고통들을 가로지르는 작업이다. 이번 백신 상황을 보면서 내가 놀란  거 역시 마비 효과이다. 유전자 백신을 맞는다는 건 인위적으로 인간 세포에 다른 유전 정보를 도입하는 과정이고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밝혀진 게 없지만 GMO 이슈보다 가볍게 다뤄졌다.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이력은 크다. 당연히 많은 수의 인간이 백신으로 급작스럽게 베타형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만들면 다른 형태로 빨리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지금 유행하는 변이형은 델타형이다.) 이것은 어려운 과학적 얘기가 아니다. 

 

 

 

현대 의학이 감염병에 대한 승리를 외친 지(7)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금 감염병들의 창궐을 맞이했다. 여기엔 난개발, 밀집식 공장 축산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의료와 과학이 자본화 되고 권력화 된 이유도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여러 원인들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지만 원인 치료가 아닌 대증치료에 집중한다. 언제나처럼 우린 빠른 치료를 원한다. 물론 나라고 뾰족한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리가 이 상황을 그저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 따르자 안 그러면 인도나 브라질처럼 될 거다 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면 그건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백신 접종률이 높은 영국과 이스라엘이 변이형이 다시 유행하고 있고 다시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는 건 안다. 

 

  물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백신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당장 백신 이외 어떤 뾰족한 수가 없다 해도 이 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 볼 수는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브라이도티가 하고 싶은 얘기지 않을까? 그리고 그녀의 이 말을 기억하고 싶다. 

 

‘삶’은 획득된 취향이며, 다른 중독들처럼 중독이고, 결말이 열려 있는 기획이다. 우리는 힘써 작업해야 한다. 삶은 통과해 지나간다. 우리는 삶을 소유하지 않으며, 단지 거기에 거주할 뿐이다.(173)

 

 

 

 

주석

 (1) 질병 X는 인류가 만나지 못한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을 일컬어서 WHO가 명명한 이름이다.

 (2) 고양이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제 1개가 이제 막 임상이 끝났다고 한다.

 (3) 코비드19 바이러스의 외피를 덮고 있는 스파이크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게 코딩된 유전물질(DNA 또는 mRNA)이다. 백신을 맞으면 그 유전물질이 우리 세포에 들어가서 스파이크 단백질을 생산해 세포밖으로 내보낸다. 체내의 림프구는 이 단백질을 대상으로 면역반응을 일으키고 항체를 생산한다. 

 (4) 화이자 백신의 경우 mRNA를 우리 세포에 넣기 위해 겉을 싸고 있는 LNP와 첨가제로 들어간 폴리에틸렌글리콜은 독성 때문에 평상시 같으면 절대 허가가 나올 수 없는 물질들이다.

 (5) 미국의 제약회사 모더나에 백신 개발을 위해 미국 정부는 약 2조원을 지급했다.

 (6) 이스라엘을 화이자백신을 대량 확보하는 대가로 실시간으로 접종데이터를 화이자에 제공하기로 했다.

 (7) 소니아 샤의 책 『팬데믹; 바이러스의 위협』에 의하면 1951년 맥팔레인 버넷 경은 서구 사회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요인으로써 감염병의 사실상 퇴치’를 달성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집트의 학자 압델 옴란은 사망의 주요 원인과 양상이 감염병에서 만성질환으로, 조기사망에서 후기사망으로 이행되는 현상을 ‘역학적 전환epidemic logical transition’으로 명명했다.

댓글 2
  • 2021-07-24 10:30

    길드다가 매달 내는 <아젠다>의 사장칼럼에서 문탁 사장님은 이제 다시 코로나 시대의 삶에 대해 숙고하고 토론해볼 때라는 이야기를 꺼냈더군요.

    문탁 2층을 꾸리는 살림회의에서도 사장칼럼에 대해 공감하면서 코로나 시대 우리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마음을 모았어요.

    마침 둥글레님이 이렇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글도 썼고, 또 이번에 일리치 약국이 준비한 월경 프로젝트 기획도 좋았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그래서! 토론회는 인문약방과 함께 준비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려고 해요.^^ 어때요? 괜찮지요?ㅎㅎ

     

    • 2021-07-28 11:01

      네~ ^^;;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띠우
2024.04.28 | 조회 45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토용
2024.04.27 | 조회 44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3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67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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