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⑤]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명식
2021-07-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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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차명식

 

 

  몇 번째 시간이었나,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문탁 선생님은 오늘날 우리 사회 페미니즘의 양상을 말씀하시면서 그중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문제로 ‘그 많던 메갈은 어디로 갔을까’를 꼽으셨다.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의 기점으로 여겨지던 메갈리아 웹사이트가 동력을 상실한 지금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떠한 형태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 많던 일베는 어디로 갔을까?’

  이러한 질문의 변환은 급작스러운 발상이라기보다는 이번 양생 프로젝트를 수강하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특정한 문제의식에 기인한다. 그것은 이른바 ‘대문자 남성’의 문제다. 내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은 타자화된 여성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하여 여성 주체를 재구성하여 세계를 마주하는 과정이며 해러웨이, 브라이도티, 버틀러는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여성 개념을 해체하고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상으로서의 여성을 살필 수 있었다. 헌데 우리가 그러한 공부를 토대로 현실의 문제를 논하면서 남성에 대하여 말할 때는 대개 단일한 주체이자 동일자로서만 호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근대적 인간주체가 백인-성인-남성의 형상을 가졌으며 수 세기 동안 남성적 주체가 사회의 주류로 군림하면서 동일자의 법을 집행해 왔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 우리의 상황, 특히 젊은 세대에서 젠더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우리 현실에 가져와 적용하려 할 때 나는 어떠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나는 특정한 남성 계층 - 이른바 ‘잉여 남성 그룹’에 대한 통찰의 부재로 해석한다. 이들 젊은 남성 그룹은 앞서 일본에서 화두로 떠올랐던 이른바 ‘초식남’들과 일정 부분 유사성을 갖는다. 동시에 그들 중 일부는 ‘일베’라 불리며 한국 사회의 혐오자 집단을 상징하고 있다. ‘초식남’과 ‘일베’라고 하면 얼핏 상반되어 보이나 그들 계층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들 그룹을 계보학적으로 이해하고 그를 기반으로 하여 버틀러의 수행성·패러디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현재 격화되고 있는 젠더 갈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구축해보고자 한다.

 

 

  잉여에서 일베로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까지 일베의 출현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핫한 아젠다 중 하나였으며 자연히 일베라는 집단을 분석하기 위한 시도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분석들 중 대부분은 일베가 사용하는 자극적인 혐오의 언어들과 기괴한 문화코드 등의 스펙타클에 집중하면서 일베를 21세기 대한민국의 혐오자 집단으로 정의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얕은 분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분석들에는 일베를 포함한 ‘잉여 남성’ 그룹에 대한 고찰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잉여 남성들에 대한 몇 안 되는 분석인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원은 이들 잉여인간, 젊은 루저 그룹을 과거 20세기 중반의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와의 대조를 통해 규정한다. 비트 세대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쇠퇴한 정신적 가치를 한탄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면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면 현대 한국사회의 잉여인간들은 그보다도 훨씬 수동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으로부터 내버려진 존재임이 강조된다. 이미 낡은 단어가 되어버린 사포 세대 - 취업, 연애, 결혼, 출산의 포기. 현실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이들은 경계의 너머, 가상공간에서 자신들의 놀이를 찾는다.

 

  “현실에서 단 1cm의 전진도 어려운 수많은 이들에게 가상세계는 거의 유일하게 열린 도피처다. 그 자신의 존재까지도 가상으로 내몰린 이들은 수많은 신조어, 만화, 음악, 합성사진, 동영상을 만들어내고 이 작품들 속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마구 뒤섞인다. (...)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과 결여에 대한 열패감이 스쳐 지나가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초월의 메시지가 등장한다.” 1)

 

  일베의 경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희화화를 놀이의 핵심 코드로 삼았다. 그의 괴이한 합성사진, 그의 생전 음성을 편집해 만든 괴이한 음악,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경상도 사투리를 비튼 그들만의 괴악한 어투. 사실 일베가 아닌 다른 잉여 남성 그룹들 역시 비슷한 일들을 벌였다. 단지 그 소재가 일베처럼 자극적이지 않았기에 문제적으로 조명되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그로테스크한 생산물들이 아니라 이러한 활동들의 본질이 집단적인 ‘놀이’라는 점이다. 이는 일베라는 집단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일베는 노무현 전 대통령, 광주 518, 세월호 희생자 등등을 ‘진심으로 혐오’하지 않는다. 타깃을 ‘증오’하고, ‘파괴’하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그것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가장 극렬한 형태의, 평범한 사람이라면 천인공노할 수준의 사르카즘. 그것이야말로 일베의 본질에 가깝다. 소재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잉여 남성 그룹은 그러한 활동의 본질을 전반적으로 공유한다. 모든 것은 놀이다. 결코 진지해져서는 안 되는 놀이.

 

 

  일베에서 메갈로

 

  우리는 보통 ‘풍자’라는 단어에서 긍정적인 뉘앙스를 읽어낸다. 그것은 권위에 항거하기 위한 약자의 수단이며 익살과 웃음을 무기로 삼는 우아한 공격이다. 하지만 사회의 도덕적 합의나 최소한의 예절 등도 권위에 해당할 수 있다. 예를 들면 518은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는 해석이 갖는 권위,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애도를 표해야 한다는 도덕적 상식과 그것이 조성하는 분위기가 갖는 권위. 일베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악한’ 조롱과 풍자로 그런 권위들을 - 그러한 권위들이 자리한 현실을 모독하려 들었다.2)
  그리고 일베는 자기 스스로를 소수자로 위치시킴으로서 그런 풍자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는 일베 정도로 금기적인 소재를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그 외 다양한 소재들을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여타의 잉여 남성 그룹들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러한 소수자로서의 셀프 포지셔닝이 이루어지는가? 바로 자체적인 욕망의 거세를 통해서다. 이들은 스스로의 결핍된 존재로 규정하고, 그 결핍에 대하여 수동적이고 자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러한 태도들의 공유를 통해 공동의 정체성과 동류의식을 형성한다. 이때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욕망 중 하나가 성적인 욕망이며, 이것이 소위 ‘남초 사이트’가 남성 유저를 디폴트로 잡고 여성들을 배척하는 이유이다.

 

  “즉 이런 종류의 ‘남성적’ 커뮤니티들은 ‘성애(연애) 가능성’의 제거와 그에 따른 동성 간의 연대로 이루어진 가상의 공간이다. 때문에 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의사소통에는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현실의 법칙들, 특히 ‘연애’에 대한 강박과 곤경은 물론이고,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더 짓궂게 굴고, 더 막나가고, 더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이 공간에서의 룰이자 주도권을 잡는 방법이다.”3)

 

  따라서 이들에게 여성 유저는 가상공간의 자조적 연대를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골치 아픈 위협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 유저로 인한 혹시 모를 치정 상황의 발생, 여성 유저의 등장으로 인해 자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외부적으로) 자신들의 결핍을 상기함으로써 오는 긴장 등등은 그들의 연대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대표적인 위험요소다.

 

 

  이에 이들에게 여성 유저들은, 나아가 여성 자체는 남자들을 등쳐먹는 ‘여왕벌’ 혹은 자기밖에 모르는 ‘김치녀’로 표상되며 적대시된다. 이런 면에서 이들의 여성혐오는 남성들의 소위 전통적인 여성혐오와 그 양상을 공유하면서도 그 발생의 맥락은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메갈’의 발생이 바로 이러한 남성적 커뮤니티에서 일어났으며 이들 잉여 남성 그룹의 ‘유희’ 방식을 모사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소수자들의 무기’를 찾아냈고 잉여 남성 그룹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조어, 합성 이미지, 동영상 따위를 만들어내면서 심지어 일베의 괴이한 말투까지도 카피해 가져왔다. 다만 그들은 잉여 남성 그룹이 그랬던 것처럼 ‘자조의 연대’를 구축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굳이 자조하지 않더라도 여성이라는 소수자 정체성 아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잉여 남성 그룹이 자기 스스로를 포함한 불특정 다수의 대상들을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메갈들은 오직 남성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를 타깃으로 삼았다.
  이것은 잉여 남성들에게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충격을 안겼다. 이전까지 그들은 늘 소수자로서 자조하면서도 주류 사회를 비꼬고 조롱하는 쪽이었는데, 메갈은 바로 그들이 사용하던 유희의 수단들을 써가며 그들 역시 비꼬고 조롱당해야 하는 대상, 주류라고 호명했기 때문이다. 충격은 곧 박탈감이 되었고, 박탈감은 곧 분노가 되었다. ‘취업도 연애도 다 포기하고 여기 가상공간에서 빌빌대는 우리가 주류란 말이냐? 소수자의 자리까지 우리에게서 빼앗겠단 말이냐?’ 이 분노는 곧 그들이 가장 중대한 규칙 - “모든 것은 놀이이며, 놀이에는 진지해져서는 안 된다” - 을 위반하게 만든다.
  어떤 점에서 일베는 소수자로서 주류 사회를 조롱하기 위해 특정한 혐오자를 연기해왔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방식은 택한 메갈의 출현은 페미니즘을 상대하는 한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 롤플레잉마저 그만두게 만들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한해 더 이상 그것이 놀이가 아니게 되자 무대(연기의 공간)와 무대 아닌 곳을 나누던 경계 역시 붕괴하였다. 최초 발생의 맥락은 달랐을지 몰라도, 바야흐로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혹은 회의감)은 젊은 남성들 전반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공유하는 공통의 성향이 되었다.

 

 

  놀이는 끝났소.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

 

 

  메갈은 잉여 남성들의 그러한 변화까지도 미러링Mirroring한 것일까? 잉여 남성들이 놀이의 규칙을 위반하고 ‘진지’해진 것처럼 풍자의 수단이었던 메갈의 미러링 전략 역시도 점차 ‘진지’해졌다. 이제 남자와 여자라는 이름은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맥락들을 빨아들인다. 그것들은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정체성으로서 무언가를 심판하거나 정당화하는 최우선의 기준이 된다. 역할극과 패러디는 잊혀졌고 그 자리에는 서로의 목을 치지 못해 안달하는 두 쌍둥이만이 남았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닮아있는 그러한 쌍둥이. 서로의 차이를 부르짖으며 각기 뭉치려하지만 그럼으로써 뭉치는 자신들의 차이는 외면하는 쌍둥이. 다른 언어를 사용할지언정 동일하게 수행함으로써 그들은 닮아간다. 똑같은 방식으로 증오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다투며 똑같은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나는 이것은 낭만적 레토릭 차원에서 발하는 탄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젠더는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작인의 장소나 안정된 정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다. (...) 이렇게 정형화된 젠더 개념은 본질적 정체성의 모델이라는 토대에서 빠져나와, 구성된 사회적 일시성으로서의 젠더 개념을 요구하는 토대로 이동하게 된다. 의미심장하게도, 만일 젠더가 내부적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본질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수행적 성과물이 된다.”4)

 

  잉여 남성 그룹은 의사-거세를 행하고 잉여의 놀이를 구사함으로써, 메갈리안들은 미러링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미 전통적인 남성-여성 젠더가 아닌 다른 젠더 정체성으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놀이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다시 정착하였고(집으로 삼았고) 남성과 여성의 이름은 재차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가리키게 되었다. 다만 제한된 파이를 두고 다투는 동일한 싸움꾼들이 서로를 적대하며 지은 진영의 이름으로서의 남성과 여성. 이것이 일베와 메갈이 만들어낸 젠더이며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남성·여성 젠더와는 명백히 그 성격을 달리하는 젠더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치 않고 다만 남성 혹은 여성이란 이름으로, 성별 대립이란 이름으로 세대와 공간과 기타 수많은 변인들을 초월해 모든 맥락을 하나로 엮어 호명하는 것은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때때로 잉여 남성 그룹과 메갈들 자신들조차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뭉뚱그리려고 하나 그는 제지되어야만 한다. 일베와 메갈을 거쳤음에도 젠더는 다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처럼 다루어지게 되었지만 거기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이전 시대와는 분명 상이하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란 이름 아래 어떤 배치 위에서 무엇이 수행되고 있는가를 보다 세밀히 살피는 것이다. 그 맥락은 아마도 숫자도 모양도 시작도 끝도 가늠할 수 없는 복잡한 잔뿌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 결코 단 두 갈래로 갈라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주:

 1) 최태섭, 『잉여사회』, 웅진지식하우스, 23p

 2) 오직 이러한 해석만이 왜 젊은 층이 주류인 일베가 뜬금없이 기성세대의 특정 지역 혐오 성향을 드러냈는지, 정작 ‘진지하게’ 특정 지역과 정파를 혐오하는 중년/노년 계층이 일베 사이트에 몰려들자 그들의 본진을 버리고 흩어졌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3) 앞의 책, 163p

 4)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349p

 

댓글 1
  • 2021-07-16 14:34

    제가 메갈의 등장에 대해 무척 놀라고 당황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진지하지 않은 사르카즘적 놀이로 일베현상을 해석하며

    (그와 달리 진지했던) 메갈현상을 분석하는 시각이 흥미롭네요. 

    그런데 잉여그룹남성이라는 용어 말인데요.  

    청년세대를 잉여그룹남성과 비잉여그룹남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일베를 잉여그룹남성이라고 묶는 것이 가능한지도 반신반의하게 됩니다.

    일베가 했던 주장들, 예를 들어 여가부 폐지나 여성의 병역의무 등이 이젠 일베를 넘어 (진지하게) 유포되는 건 또 어떻게 봐야 할까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ㅠㅠ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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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5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청량리
2024.04.14 | 조회 187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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