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③] 예순, 페미니스트 선언

먼불빛
2021-07-09 15:12
243

언어가 없었다

 

나는 60세.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정의 딸로 태어나, 남녀차별의 한복판에서 자랐다. 나는 공교육에서, 더 빈번하게는 혈연관계 아버지로부터 순결교육을 받았다.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결혼 이후 독박육아가 시작되면서 나는 남/녀, 가부장의 모순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우울하지 않으면 늘 화가 나 있었다.

 

90년대 초. 남편의 구타와 학대로 죽게된 아내들의 사건이 연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었을 때, 나는 여성의전화에서 상담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같이 살던 남자에게 향하는 화를 사회적으로 풀고 싶었다. 전화 상담은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과 폭력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전화기 속의 수많은 그녀들과 나는 똑같은 가부장 이데올로기 희생자라는 생각으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절반의 여성이라는 동질감과 연대의식이 왜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지는 못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나에게 페미니즘 운동으로 뛰어들게 만들 수 있는 이론적 무기가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상담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남성혐오자가 되어 갔고, 남/녀 대립으로 치닫기만 하는 감정적 언어와 화법밖에 쓰지 못하는 현실이, 나의 한계가 지겨웠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곤란함과 낯섬

 

해러웨이의 선언문을 읽은 후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곤란한 감정에 휩싸였다.

단순히 오랫동안 모호한 채로 방치된 과거의 경험이 다시 소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과거의 내가 왜 지쳐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모호한 채로 묻어둔 것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은 시원함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알게 됨으로써 내가 가져야 하는 책임감은 또 무엇이어야 할까, 그런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탐구는 오히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누가 행위를 하고 있으며 무엇이 가능할지, 어떻게 세속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책임감 있게 대하면서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이해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해러웨이선언문> ,p124)

 

페미니즘은 차이라는 것에 기초하여 세계와 그 안의 관계자들을 이해하는 인식론이고, 그런 인식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윤리, 철학적 규범을 세워나가는 실천적 담론이다. 이것은 자기배려적 주체화의 양식을 찾아가는 양생의 문제와도 맞닿는 것 아닐까.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창한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차이의 철학인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만으로 페미니스트가 된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이런 고민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어떤 표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원본도 없고, 본질도 없으며, 기원도, 순수 자연도 없는 것이 물질이라면 나 또한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해러웨이의 저 탁월한 문장만으로도 페미니스트-되기의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일단 도전!

 

 

 

세계에 있는 것은 누구이며, ‘우리는 무엇인가?

 

페미니스트 되기의 출발점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아마도 ‘알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된 담론을 장착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의 윤리 실천적 이론을 세우기 위해 해러웨이가 몹시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 존재론적 질문을 쫓아가 보기로 한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단순히 인간이라고만 할 수 없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해러웨이는 소중한 타자, <반려종>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포착의 합생’(‘구체적인 것’) 개념을 가져왔다. ‘무수한 실제 사건들에 의해 이루어진 포착의 합생’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자연+문화)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인식의 대상으로 ‘포착’ 되어 파악되는 순간 ‘합생’, 즉 다른 어떤 새로운 존재로 공구성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존재(자연+문화)는 관계의 산물이며 선행하지 않는다. ‘개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개체화의 과정을 통해 해체 및 재조립이 지속되는 유동적인 과정 속의 한 단면이다’(해러웨이선언문/123/각주). 그러므로 내가 그렇게 집착했던 여자, 남자, 혹은 보편=인간이라는 것은 출발선에도 없었으며, 고정된 무엇도 아닌 것이다. 자연과 문화가 아닌 자연문화이며, 근원도 행위주체도, 목적도 없다. 나선의 존재론적 안무 속에서 매번 다르게 구성되는 존재이다. 이 하나의 개념에서 나는 모호한 채 눌러 두었던 과거의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

 

 

“페미니즘 이론은 유형학적 사고, 이항적 이원론, 다양한 취향의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모두를 거부하며 창발, 과정, 역사성, 차이, 구체성, 동거, 공구성 및 우연을 다루는 방법들을 풍부하게 제공한다”(<해러웨이선언문> ,p124)

 

나를 해석한다는 것 또한 포착의 합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닐까?

해러웨이의 존재론적 질문은 나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가능성, 이원론의 미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호명

 

해러웨이의 선언은  나를 호명해 들인다. 그것은 우리 또는 나를 새로운 윤리적 삶의 가능성으로 인도한다. 나는 해러웨이와 브라이도티와 주디스버틀러, 그리고 나와 공명을 일으킬 수 있는 더 많은 철학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을 모순투성이인 현재의 구성물로 호명해 들이겠다. 이 호명의 주요 결과는 삶과 죽음, 고통과 기쁨, 용기와 상상력이다. 우리는 살/실체 속에서 이데올로기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함께 뒤섞일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이 선언은 개인적인 기록이고, 가부장제 경험과 이분법을 넘고자하는 시도이자 닫히는 가능성의 목록만으로 회자되는 60세의 몸에 중첩된 모순이 페미니스트 주체화를 더디게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이 도전을 계속할 수 있을까에 대답하기 위한 작업이다. 나는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과 언어를 구성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이 세계 안의 ‘우리’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책임감 있게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관조하거나 타자화하지 않는 부분적 연결성의 관계 맺기를 하겠다. 이 선언은 미시적 권력의 효과와, 나이듦의 불가역적 경험이 나를 유혹할지라도 존재의 춤을 안무하면서, 실패와 불협화음의 한복판에서도 충실히 살고자 하는 나와의 약속이다. 나는 이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

 

 

 

*이 에세이는 「해러웨이 선언문」,「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그리고 문탁샘의 페미니즘 강의안을 두루두루 참고 인용, 모방하여 썼습니다. 아직도 제 언어가 짧고 부족한 까닭입니다.

 

 

http://moontaknet.com/?page_id=5254&mod=document&uid=33691

 

댓글 4
  • 2021-07-09 21:37

    먼불빛님의 메니페스토군요! 

    읽는 동안 가슴이 뛰었습니다.

  • 2021-07-10 09:48

    강의녹음 파일도 복습하신다는 얘기 듣고 놀랐어요~ 그런 공부가 이런 선언으로 이어지는군요^^

  • 2021-07-13 10:33

    아.. 먼불빛쌤

    읽으면서 슬슬 가슴이 뛰기 시작하더니 끝에는 뜨거운 것이 올라오네요 

    끈기있는 공부의 결과물이군요~존경합니다!!

  • 2021-07-14 13:37

    먼불빛 샘 선언문!

    샘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빛이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건 뭘까요?

    샘의 페미니스트 선언, 응원합니다!!!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나무를 닮은 사람   다르덴 형제의 <아들(Le Fils/2002>     아들 살해범을 만났다   주인공 올리비에의 아들은 5년 전에 살해당했다. 그 후 올리비에는 아내와 헤어졌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친다. 아들을 잃은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갱생을 돕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데, 그는 자기 아들을 살해한 프란시스가 재활센터에 왔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가 동요한다는 것은 근접 촬영하는 카메라로 인해 전달된다. 초점은 어긋나고 사각의 프레임 안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살해당했는데 그 살인범을 지금 만났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보통 관객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시점을 따라 감독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가까이, 너무 흔들리는 시점을 보여주기에 ‘영화 보기’에 있어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 외에 어떤 설명도 따라붙지 않는다. 또 영화음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사물이 내는 소리나 인물들의 대사와 호흡으로 오롯이 채워 넣는다. 시간이 흘러가도 올리비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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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4.28 | 조회 133
토용의 서경리뷰
신화가 역사가 되다   정치는 실종되고 ‘심판’만 있었던 총선이 끝났다. 공약이 뭐였는지도 모르겠다. 민생은 아랑곳없이 저들만의 욕망을 채우려는 선거를 언제까지 봐야할지.... 의식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살 만한 세상, 보통 사람들이 소박하게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저마다 각자 살 만한 세상에 대한 감각은 다르겠지만, 동양고전 특히 유가에 관한 책들을 읽다보면 살 만한 세상의 전형으로 ‘요순의 시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요와 순은 유가에서 가장 존경받아온 성왕이다. 요와 순이 다스렸던 시대는 태평성대라 불렸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도 자신들을 특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자연에 따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나라는 원만하게 잘 운영되며 그 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유가는 이러한 요순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다.   이렇게 대단한 통치자 요와 순은 어느 시대 임금이었나? 안타깝게도 실존 인물이 아니라 전설에 존재하는 임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와 순은 중국고대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중국의 고대신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신화 속의 요는 반인반수의 모습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살았을 원시 부족의 후덕한 부족장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해 『서경』과 『사기』에서는 요와 순을 역사상 실존한 군주로 기록한다. 『서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와 순의 언행을 기록한 「우서(虞書)」, 하(夏)‧상(商)‧주(周) 각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하서」, 「상서」, 「주서」가 그것이다. 「우서」의 처음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은 요와 순이 가진 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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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4.27 | 조회 136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54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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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조회 187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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