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양생에세이①] 침범받을 용기

현민
2021-07-09 14:46
449

1. 정체화된 페미니즘의 현장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긍정적인 지지를 보냈다.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었고, 내가 조금 더 나에 가깝게 설명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지 못했다. 공공장소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의식적으로 작게 소리 냈고,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로 번역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와 메갈을 동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인 메갈로 오해받기 싫었다. 또, 페미니스트라면 PC(Political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하거나, 탈코르셋을 한 외관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PC하기엔 너무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매일 화장을 하며 죄책감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그렇게 생각했다. PC하고, 모두가 숏컷하고 바지 입는, 혹은 메갈인 것.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온 친구가 나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한 날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자신의 발언이 언피씨하다고 바로 정정했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런 게 있었다. 페미니스트다운 것, ‘진짜 페미니스트’의 이미지 말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서점에서 일하게 됐을 때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라는 책을 보게 된 적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낙인의 의미로 페미니스트 되기는 밥 먹듯이 쉽지만, ‘진짜’ 페미니스트는 너무도 숭고하여 셀수 없이 많은 판관들의 인증을 거쳐야 한다. 나는 ‘진짜’를 지향하지 않는다. ‘진짜’가 되려는 윤리적 욕망은 때로 타인을 폭력적으로 규정짓고 배척하며 제압할 위험이 있다. (이라영,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들어가는 말 중)

 

내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길 꺼린 가장 큰 이유는 탈코르셋이다. PC한 의견에 묻혀가는 건 비교적 쉬웠지만, 오랜 외적 구성을 바꾸는 건 누구나 그렇듯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치마를 좋아한다. 바지보다 품이 넓고 긴 치마가 좋다. 반짝이는 악세사리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많은 여자 친구들이 숏컷으로 자르는 동안 긴머리를 고수했다. 마스크 덕분에 립스틱을 안 바르게 됐지만, 가끔 색 있는 립밤은 포기 못 한다. 탈 코르셋을 접한지는 오래됐어도 내 스타일에 대한 의심은 진행 중이다. 내가 치마나 귀걸이를 좋아하는 게, 진정 나로부터 시작된 일일까? 내가 사회적 여성성을 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타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닌 게 아닐까?

 

우리는 쉽게 탈코르셋의 디폴트를 떠올릴 수 있다. 머리가 짧고, 화장을 하지 않고, 간편한 옷을 입는 사람. 탈코르셋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한 내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되지 못해 느끼는 부채감이 있다.

 

오랫동안 머리를 숏컷으로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스트로서 ‘진짜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수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머리를 자르지 못했을 때 따라오는 부담감도 커졌다. 해방하자고 하는 탈코르셋이 이렇게 편협해야 하는 걸까?

 

우리가 도망치려던 곳은 사회의 고정관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혼란스러운 새로움 속에서 ‘정상’,‘정답’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건 생각을 간단명료하게 만들어주니까. 그렇게 도착한 곳은 또 다른 디폴트다. 우리가 새롭게 찾은 디폴트는 젠더 규범만큼이나, 혹은 그것보다 더 촘촘하게 폭력적이다. 이곳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유방식을 찾아야 한다.

 

 

나는 삭발하고 원피스를 입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에 도달하고 싶다. 탈코르셋을 해도, 탈코르셋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을 가지고 싶다. 사람들이 더 가볍고, 유쾌하게 탈코르셋을 언제든 하고 또 그만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경계 안에서, 또는 밖에서 자유롭게 노닐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 ‘강요’와 ‘다양성’이 난무하는 현장

 

나는 고등학교를 통해 만난 친구들과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비슷한 깊이로 내향적이어서, 나는 그 사이에서 줄곧 외향적인 사람으로 대상화되곤 한다. 내가 이들과의 소통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을 때는 회의를 할 때다. 우리는 회의에 많이 의존해서 그 시간에 많은 걸 함께 정한다. 보통 내가 회의를 진행하며, 내가 제일 말을 많이 하고, 내가 글로 정리하는 역할이게 된다.

 

그렇게 끝나면 다행이지만, 나는 이렇게 일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토로한다. 이 마음을 표현할 때면 그들은 더 말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들에게 불편한 티를 내면서도, 그들이 강요당한다고 느낄까봐 두려워진다. 나는 그 느낌을 알고 있다. 누군가 나를 침범하려고 하면 내 방어기제는 공격적으로 반응해 강요하지 말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 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강요는 절대 하면 안 될 것으로 치부되고 있으니 그건 방패가 되기도 하지만, 내가 할 말이 있을 때 날카롭게 말을 막기도 한다.

 

다양성은 현세대를 이해할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다. ‘너와 나는 달라’를 이해하는 건 한끝 차이다. 그 말을 사용할 때, 서로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나는 너와 달라서 어쩔 수 없다’는 은근한 무기력감을 느낀다. ‘서로에게 강요하지 말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해’라는 말은 너무 타당하고 숭고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말을 쓸 때 진정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쉽게 강요하지 말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느낀다. 특히 내가 페미니즘이나 비건을 할 때는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을 때도 강요하지 말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강요와 의견제시는 한끝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건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떨 때 강요하는 느낌을 받는지도 분석해봐야 할 일이지만, 사람들은 왜 강요하는 걸까? 그 기저에는 상대가 변화할 거라는 기대, 그에 대한 애정이 있다. 나는 그 애정을 상대에게 개입할 용기로 해석하고 싶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요하지 말라면서, 우리는 다르다면서 타인이 개입할 여지를 두지 않는 건 아닌가? 우리가 그 용기를 잃게 된다면 무엇이 남을까?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상대가 내 말을 강요로 느낀다고 하면 나는 재빠르게 쫄아 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 늪에 빠져 서로에게 개입할 수 없어진다면 그건 서로를 이해할 여지를, 그러기 위해 기꺼이 싸워볼 힘을 잃게 된다. 정체되지 않으려면 서로를 침범할 여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차이를 일탈이나 종속된 형태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차이들을 긍정성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차이들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집단성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 (로지 브라이도티, 『유목적 주체』 167쪽)

 

 

 

 

3.균열을 맞이하세요

 

이 에세이를 통틀어 나는 나의 것에 균열을 낼 용기, 침범받을 용기를 가질 것을 제안한다. 위에 제시된 문제들은 모두 나에게서 비롯된 일이다. 페미니즘을 접하지 못해 편협한 시각을 가진 게 아니었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화 이후에도 삶 속에서 편협함은 계속 발휘되어왔다. 우리는 새로운 사유방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내 말로만 가득 찬 내 안에 타인의 여지를 두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탈 영토화는 우리가 기반하여 살아온 영토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버틀러는 자신이 속한 영토를 유유히 떠난다. 버틀러의 시선은 내가 고유하다고 생각한 생물학적 성별을 해체하고, 그저 즐기기만 한 드랙이나 트랜스젠더 문화를 사회에 균열을 내는 움직임으로 바라본다. 버틀러는 태어났을 때부터 본디 창의적이고 급진적인 사람이었던 걸까? 버틀러가 난 놈이라 이런 대단한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버틀러는 소수자로서 배제당한 삶의 폭력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소수성은 세상을 탈 자연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굵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나는 내 정체성의 몇몇 부분을 이런 긍정성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남자가 아니어서 받는 차별은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다.

 

침범받을 용기는 어디서 오나? 침범받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침범받기가 시작되어야 그 속에서 내가 느끼는 바도 분명해질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나는 내가 줄곧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타인의 행동들이, 내 취약성이 다르게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균열이 난 곳에 계속 집을 짓고 있다. 내가 꾸민 집을 탈출하거나, 무너뜨리는 일은 너무 어렵다. 그리고 이 결론은 이미 어디선가 보아온, 시원찮은 열린 결말의 느낌이 있다. 하지만 균열 속에서 계속 집을 짓게 되듯이, 우리의 깨어진 사고가 정답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이 시대 페미니즘과 우리의 지속가능성이 될 것이다.

 

 

 

http://moontaknet.com/?page_id=5254&mod=document&uid=33691

댓글 4
  • 2021-07-09 22:18

    나의 것에 균열을 내려면 바깥에서 부딪쳐 오는 것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니,

    침범받을 용기야말로 자기변용을 가능하게 하는, 참으로 능동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침범받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침범받을 용기를 말하는 발상의 전환이 멋진 것 같아요.^^

     

     

    • 2021-07-12 11:45

       ^ㅅ^ 너무 감사합니다...ㅎㅎㅎ

  • 2021-07-10 09:46

    어제 현민과 친구들이 파지사유에 놀러왔다! 청년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만 봐도 입이 째진다~ 우리 가끔 같이 놉시다~

    • 2021-07-12 11:46

      그럼요 ~~ 쌤들 매번 환대해주셔서 너무 좋아요 ㅎㅎ

한문이예술
  한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   동은     1. “왜 이렇게 달라요?”   <한문이 예술> 수업을 마무리 할 때마다 오늘 배운 한자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 대부분 한자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난 칸 안에 몇 번 써보는 것 조차 어려워 하는데, 더구나 배운 한자랑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서는 갑골문으로 잔뜩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정작 오늘날 사용하는 해서체는 수업에서 다룬 모습과 다르니 그럴만도 하다. 아이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이 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업에서 한자가 가지고 있는 고대 사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아이들이 사용하고 만나게 될 한자는 오랜 시간 속에서 의미가 바뀌어온 오늘날의 그것일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나 문자의 모양과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한다. 최근 유행하는 80년대 뉴스 패러디 컨텐츠만 봐도 몇 십년 사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어투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면, 국립국어원에서 단어의 정의를 수정하거나 새 단어를 추가한다. 우리나라 말도 몇 십년만에 포괄하는 어휘의 범위나 원래의 의미가 바뀔 바뀔 정도인데, 한자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 6000년 동안 쓰였다고 하니 그 변화가 얼마나 더 다채로울까! 한자의 경우에는 종이가 없던 시기부터 뼈, 돌, 대나무에 새겨지기 시작해 시기마다 필요에 따라 수 많은 한자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니 바뀐 한자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의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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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5.14 | 조회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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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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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7 | 조회 167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봄날
2024.04.22 | 조회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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